제254화· 황녀의 순방 (4)
-끼익
문이 열린 순간 침대에 앉아있던 여인이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베르트 공작의 정실이자 이 저택의 안주인인 마가렛 에르제스·
그녀의 눈엔 마주 선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쌍심지가 잔뜩 세워져 있었다·
버려진 손톱이 당장이라도 목을 파고들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턱
마가렛의 몸은 곧 기사들에게 가로막혔으며 갈 곳을 잃은 두 손은 허공에서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힘없이 늘어져 계실 줄 알았는데 아직 팔팔하신가 보네요·”
금발 여인은 그런 마가렛을 조롱하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아들 어딨어! 크란츠는 어디로 데려간 거냐고!”
마가렛은 아들의 행방부터 물었다·
“크란츠가 잘못되었기만 해봐! 내가 너희들을 전부···!”
“이거 왜 이러실까요? 내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모두 가문과 베르트 공작님 그리고····”
금발 여인의 입가로 이내 흐트러짐 없는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에쉘을 위한 일이라고요·”
에쉘이 언급된 순간 마가렛의 동공이 격하게 요동쳤다·
허나 그것도 잠시일 뿐
마가렛은 다시 그녀를 향한 노기 어린 눈빛을 보이며 소리쳤다·
“네년이 이런 짓을 하고도 공작님이 용인해줄 것 같아? 당장이라도 저택에 돌아오기만 하면 네년은 바로 끝이야!”
“공작님께선 지금 황실의 순방단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매우 바쁜 상태란 거죠·”
그녀는 마가렛이 지니고 있던 한줌의 가능성마저 여지없이 뭉개 버렸다·
그러곤 기사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지시를 받은 두 명의 기사가 밖으로 나가더니 곧 얼굴이 헝겊으로 가린 남성 방 안으로 한 명을 데려왔다·
“크란츠!”
남성이 누군지 바로 파악한 마가렛은 그를 애타게 불렀다·
“어머니?!”
크란츠 역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선 몸을 움츠리며 반응했다·
기사들은 바로 헝겊을 벗겨내어 모자를 마주하게 했다·
“외로운 고뇌의 시간은 인간의 단단한 신념도 무른 잡생각으로 만드는 법이죠· 두 분께서도 이 정도면 충분히 깨달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인은 마가렛에게 익숙한 인장이 크게 찍힌 두 장의 공문서를 들이밀었다·
그중 하나는 인장만 찍혀 있고 글씨는 적혀 있지 않은 빈 공문서였다·
“본 문서의 내용을 부인께서 자필로 직접 받아 적으시면 모든 게 끝납니다·”
내용을 읽은 마가렛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이걸 어디로 보내겠다는 거야?”
“당연히 부인의 본가이신 에르제스 백작가로 보낼 겁니다· 그럼 에르제스 가와 뜻을 함께하는 다른 가문들이 뭉쳐서 세력을 형성하겠지요· 현재 황실이 추구하는 방향에 반하는····”
마가렛의 손엔 어느새 펜이 쥐어졌으며 눈 아래엔 글을 받아 적기 위한 빈 문서가 놓여 있었다·
베르트 공작의 정실이자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 20년·
그 20년 동안 쌓아 올린 자존심과 자존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격동하는 눈으로 크란츠와 여인을 번갈아 보던 마가렛은 결국 피가 끓는 심정으로 빈 문서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대체 왜 돌아온 거야 네년은?”
“저도 돌아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어쩔 수 없더군요· 힘을 잃고 무너진 그 아이에게 다시 밟고 올라갈 계단을 만들어주려면 다시 돌아와야지요·”
마가렛은 납득할 수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고 공작 입으로도 죽었다고 했고 얼굴조차도 본 적 없는 이가 태반인 저 여인이
어찌하여 이 저택에 돌아왔단 말인가?
여인은 그런 마가렛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조만간 이 벨리아스를 시작으로 이 대륙에 검은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쿵!
갑자기 밖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기사 한 명이 바로 문을 열어젖힌 순간
-서걱!
오감을 자극시키는 살벌한 절삭음과 함께 기사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물러서십시오·”
남은 기사들은 즉시 여인을 뒤로 물리고선 검을 뽑았다·
벌컥 열린 한쪽 문 너머론 밖에서 대기 중이던 나머지 기사들이 목에서 피를 잔뜩 토해낸 모습으로 엎어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 셋이 당해버린 상황·
허나 정작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 열리지 않은 한쪽 문 너머에선
“···!”
오금을 저리게 하는 극한의 살기가 아지랑이 피듯 넘실거렸다·
이에 기사들은 서로 눈짓으로 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내 한 기사의 검에서 푸른 광채가 번쩍였으며 기사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문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콰직!
검기에 문이 베어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기사 한 명이 잽싸게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곤 공간을 베어 가를 기세로 크게 검을 휘둘렀지만
“···?”
문 너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기를 날린 기사 역시 바로 뒤따라 붙으며 등을 맞대고 사방을 경계했지만 이미 죽어 나간 시체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경각심을 놓지 않고 하나하나 모든 것을 확인하려는 순간
-쐐액
그들의 얼굴 쪽으로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무엇인가 싶어 시선을 돌리려던 것도 잠시
-툭
고개를 돌리던 기사들의 목이 곧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목에는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저벅저벅
곧 활짝 열린 문 너머 복도 한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마가렛이 질색을 표하며 겁을 내니 그녀의 곁으로 크란츠가 빠르게 달려왔다·
“저희로선 좋아해야 할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암튼 그놈이 왔습니다!”
“그 그놈이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냐?”
“그 음침한 괴물 놈 말이에요! 그 녀석도 이 벨리아스에 돌아왔어요!”
두 모자가 서로를 꼭 껴안으며 불안한 마음을 공유하는 사이
정체를 모를 걸음의 주인은 계속해서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사태의 장본인이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
익숙하다 못해 깜짝 놀랄 얼굴을 마주한 마가렛은 기겁을 금치 못했다·
이 집안의 막내 시안이었다·
“내가 기억력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이건 확신할 수 있어· 난 당신을 본 적이 없어·”
시안은 한 걸음씩 마치 마주한 이들을 말려 죽일 듯한 기세로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근데 당신의 눈은 그렇지 않네?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보고 있어·”
시안의 물음에도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리 놀랍지 않다는 듯·
“역시 예언을 빗나가게 하는 남자· 당신과 이리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나 알아?”
“모를 수가 없는 분이지요·”
그러면서 한쪽 손을 가슴에 얹으며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안 베르트·”
나름 공손한 인사를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름 모를 젊은 여인에게서 그가 가장 증오하고 경멸하는 어느 남자와 비슷한 기운이 잔뜩 느껴지고 있었다·
“에쉘의 친모· 하니엘 파시나티 라고 합니다·”
* * *
인간은 세월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절대불변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
허나 지금 아린은 그 불변한 법칙을 거스른 듯한 실로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하고 있었다·
“신 벨리아스의 영주 윌리어스 베르트· 존귀하신 아린 황녀님을 뵙습니다·”
윌리어스 베르트·
황제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디오네 세벨러스와 로열 아카데미에서부터 인연을 이어온 종신이자 친우·
허나 오랜 투병으로 노쇠하고 병약해진 황제와는 다르게 그는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건재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감히 황제 폐하를 대신해 순방을 지휘하러 오신 황녀님께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작은 별다른 변명 없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조금 전 무례를 사죄했다·
이 역시 아린이 알고 있던 베르트 공작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올곧음과 강직함의 대명사·
무늬만 황녀였던 10년 전 자신이 책임자로 찾아온다 해도 지금 같은 무례를 범하지 않을 사람이거늘 대체 무엇 때문에 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단 말인가?
아린은 일단 속마음을 감춘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잘못을 인정하시고 친히 사과까지 해주셨으니 이 점에 대해선 더 짚지 않겠습니다· 대신 본격적인 순방을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공작은 그런 아린의 요구를 예상했다는 듯 바로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경계문 앞으로 정담을 논하기 위한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아린은 레시무스를 비롯한 특별 수행원들을 뒤로한 채 공작과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부터 먼저 확인해주세요·”
아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공작으로부터 받았던 전언을 꺼내 보였다·
“이 서신 정말로 공작님께서 보내신 건가요?”
“예·”
“이 서신에 적으신 요구 사항을 정말 우리 황실이 아니 제국이 해주길 원하고 계시나요?”
“그렇습니다·”
공작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대답을 이어 나갔다·
“그 누구의 의견도 더해지지 않은 공작님의 독단적인 생각이신 가요?”
“····”
그 질문에 대해선 공작은 답을 잇지 못했다·
대신
“황녀님께선 순방으로 하러 오신 겁니까? 아님 저를 취조하러 오신 겁니까?”
아린을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전 진실을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아린은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기세로 맞받아쳤다·
“아바마마께서 아시는 그리고 제가 아는 베르트 공작님께선 절대 전쟁이나 정벌 같은 어리석고 무모한 행위를 벌이실 분이 아닙니다· 이건 저만이 아닌 공작님을 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일 겁니다·”
“하시고 싶은 말이 무엇이십니까?”
“누군가요? 공작님께 마계 정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사람이····”
베르트 공작은 이 질문에도 마찬가지로 바로 답을 잇지 않았다·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라 하셨습니까?”
“네·”
“그건 단순히 제가 그렇게 보여왔단 이유 하나만으로 성립된 생각이겠지요·”
“아니라고 하시진 않겠지요?”
“저조차도 저를 모르겠는데 제가 아닌 다른 이들이 어찌 저를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공작은 아린의 생각을 원초적으로 부인했다·
“황녀님께선 마계 정벌이라고 하는 제 목표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모릅니다·”
순간 아린의 눈동자가 크게 번뜩였다·
“네?”
“저는 모릅니다·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왜 옳은 것인지 전 무엇하나 설명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베르트 공작!”
아린은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그를 강하게 쏘아붙였다·
허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 앞으로의 선택이 제 행위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린은 순간적으로 보았다·
굳은 시선으로 말을 잇는 그의 목 아래로 가지런히 다리를 잡은 그의 양손에서
미칠 듯한 떨림이 이는 모습을·
“저를 막아주십시오· 황녀님·”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에쉘은! 에쉘은 어디 있나요 베르트 공작!”
“···!”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그자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른 그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세요! 더 늦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는 이곳에 없습니다·”
공작은 한마디로 딱 잘라 일축했다·
“그럼 어디에?”
“벨리아스에는 없습니다· 하물며 제국에도 없고 이 대륙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린은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잠시 빠르게 굴렸다·
이 대륙 어디에도 없다고?
그럼 죽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는 죽은 게 아닌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분명 벨리아스에서 멀지 않은····
“···!”
아린은 이윽고 깨달았다·
그녀의 번뜩인 시선이 향한 곳은 마주 선 베르트 공작의 등 뒤
바로 경계문 너머였다·
이곳은 제국의 경계이자 우리 인계의 경계·
저 문을 넘어선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의 영역이 아닌 미지의 이종족이 사는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다·
즉 지금 자신들이 찾는 에쉘의 행방은 다름 아닌····
“마계?”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적막이 도는가 싶었지만
“황녀님! 어서 막사를 나오십시오!”
곧 아린의 등 뒤에서 레시무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