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마왕 벨카리온 (1)
어딘지 모르게 불그스름한 공기
사체가 썩는 고약한 악취
오금을 저리게 하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까지·
언뜻 봐도 발을 들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위험한 장소다·
-으득
거대한 덩굴나무 아래엔 데빌 보어 한 마리가 방금 잡은 사냥감을 야무지게 뜯고 있었다·
그 주변엔 동족이든 말든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건 뭐든 먹이로 취급하는 빅 맨티스가
그 아래엔 영역순찰 하듯 길쭉한 몸을 끊임없이 꿈틀대는 데스 웜이 나돌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마계 깊은 곳 어느 이름 없는 습지 안에서
선명한 붉은 눈빛을 가진 한 남자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기척을 감지한 마수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제 발로 찾아온 먹잇감은 더더욱 놓치지 않는 마수들의 습성상 발견 즉시 달려드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키이익····”
마수들은 경계의 울음소리만 낼뿐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남성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양의 투기를 인지하고선 겁을 먹은 것이다·
“안 와?”
그러자 남성이 고개를 까딱이며 마수들을 도발했다·
이에 자극받은 마수들이 일제히 이빨과 앞발을 세우며 달려들었지만
-파사삭
정확히 1분 뒤
남성에게 달려든 마수들은 전부 사지가 도륙 난 채 사방에 흩뿌려졌으며 그 후로 5분이 더 지난 시점엔
“아오! 이제야 몸이 좀 풀리네·”
습지의 마수들은 전부 괴멸되기에 이르렀다·
남성은 아무런 힘든 기색 없이 여유롭게 몸을 풀었다·
“여기 계셨군요·”
그러자 남성의 뒤에서 수염을 정갈하게 다듬은 또 한 명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가시는 건 좋지만 한마디 말씀이라도 남기고 가시라고요·”
“그럼 또 이거 조심해라 저거 조심해라 잔소리를 늘어놓을 거 아니야? 네 잔소리 듣고 있으면 있던 전의도 없어진다니까?”
“다 마왕님을 위한 저의 충언 아니겠습니까? 참된 군주가 되기 위해선 올바른 배움의 자세를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남성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아예 귀를 틀어막았다·
마계의 최강자이자 절대 군주· 마왕 벨카리온·
포악한 상급 마수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할 수 있는 압도적 무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종이자 마왕 성의 총지배인 로저스의 잔소리 앞에선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야 로저스· 내가 다 좋은데 좋은 일을 하고 난 이후에도 굳이 잔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오늘 같을 땐 그냥 덕담 한마디만 하고 넘어 가주면 안 될까?”
“저야 그러고 싶긴 해도 막상 현장을 둘러보니 그럴 순 없을 것 같군요· 아무리 마수들이 살기 좋은 습지라고 한들 이리 민가와 인접한 지역의 서식지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로저스는 고뇌에 찬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래서야 내가 더 자주 돌아다닐 수밖에 없지 않겠어? 우리 마계 주민들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벨카리온이 습지의 마수들을 괴멸시킨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습지 주변의 사는 주민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서였다·
그에겐 어쩌다가 한 번 하는 일도 아닌 매일 같이 마계 곳곳을 순방하며 지속적으로 해온 일상이었다·
“아무튼 얼른 돌아가시지요· 베스티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깐만! 여기 사체는 처리하고 가야지?”
“제가 하겠습니다·”
로저스는 마왕을 뒤로 물린 채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손을 앞으로 뻗어 마나를 결집시켰다·
-화르륵
곧 손에서 붉은 마법진과 함께 고열의 불꽃이 불기둥처럼 뻗어나가니 곧 찢겨나간 사체들에게 옮겨붙었다·
사체들은 머지않아 전부 한줌의 재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뒤처리까지 모두 끝마친 두 마족은 바로 마왕성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야 로저스· 나 요즘 무슨 생각 하는지 아냐?”
뒷짐을 지고 나아가던 벨카리온이 대뜸 입술을 히죽거리며 물었다·
“10년 전에 만나셨다던 그 인간 꼬마 생각이시죠·”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벌써 백하고도 마흔두 번을 더 얘기하셨습니다· 잊을만하다 싶으면 항상 꺼내시지 않습니까?”
“그래?”
급 머쓱해진 벨카리온은 하늘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인간들 나이로 따지자면 지금쯤 어른이 됐겠지?”
“그렇겠지요· 신체 나이로 따지면 딱 마왕님 정도 되셨을 겁니다·”
“난 말이지· 그놈이 내게 했던 그 당돌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마왕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그때의 순간을 상기했다·
“분명 마왕님과 거래를 하자고 말했다죠?”
“맞아·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 땅을 넘어오지 말아 달라고 했어· 그러면서 날 도와준다고 했지· 진짜 이상한 놈이었다니까?”
“확실히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군요·”
로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벨카리온의 생각에 동조해주었다·
“그러면서 요즘은 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벨카리온은 급 고개를 돌려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소년을 만났던 레메아 골짜기가 있는 방향이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내가 그 거래에 응해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난 과연 그 녀석에게 뭘 요구해야 할지 말이야·”
“거기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벨카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내 끓어오르는 투지를 식힐 수 있는 최고의 전투를 선사해달라고 하면 불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겨우 인간 남자 한 명이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운 요구이지 않습니까?”
로저스는 될 리가 없다며 마왕의 생각을 부정했다·
“네가 그랬잖아? 인간은 발전 가능성이 매우 뛰어난 종족이라고!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어? 게다가 그 꼬맹이는····”
“···?”
“눈동자가 여간 위협적인 게 아니었거든!”
기분 탓일 수 있지만 벨카리온은 그 소년이라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인계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요즘 레메아 협곡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이에 로저스는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레메아 협곡? 거기 마수들 날뛰는 거야 늘 있던 일 아니야?”
“그렇긴 해도 이번엔 좀 문제가 다른 것 같습니다· 최근 마수들이 협곡과 블러드 리버를 넘어 마계 내부까지 넘어온다고 하더군요·”
벨카리온은 급 가던 발길을 멈추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마수들이 뭐 자기들 영역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협곡에 새로운 상급 마수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협곡 너머에 있는 인간들이 대대적으로 마수 토벌에 나선 것일 수도 있겠죠·”
로저스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간들이라·”
이에 마왕은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마침 지금 있는 곳도 레메아 협곡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
마음을 정한 벨카리온은 바로 날개를 펼쳤다·
“너 먼저 돌아가라 로저스· 난 말 나온 김에 레메아 협곡에나 가볼라니까·”
“베스티님껜 뭐라고 전할까요?”
“흠···· 선물 사러 갔다고 전해!”
벨카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까지 그 모습을 쭉 지켜본 로저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며 다시 마왕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30분 정도 날았을까?
레메아 협곡 인근에 도착한 벨카리온은 곧 날개를 접고 지면에 안착했다·
-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땅속에서 데스 웜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튀어나왔다·
허나 벨카리온은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웜의 입 양쪽을 붙잡은 뒤
-콰지직!
무시무시한 근력으로 그 자리에서 입을 찢어버렸다·
“로저스의 말이 사실이었군·”
벨카리온은 찢겨나간 웜의 사체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협곡 내부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데스 웜이 협곡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확신한 벨카리온은 급히 협곡 안으로 발을 옮겼다·
“····”
조용하다·
평소라면 마수의 습격이 못해도 대여섯 번은 벌어졌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협곡엔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을 품은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니 곧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블러드 리버가 눈앞에 드리워졌다·
홀연히 나아가던 벨카리온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딱 10년 전 바로 그 장소·
벨카리온이 서 있는 곳에서 딱 스무 걸음 앞에서 그 소년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 위치엔 벨카리온이 보았던 흑발의 소년이 아닌
다른 인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어느 금발의 남성이·
“처음 뵙겠습니다· 마계의 주인이시여····”
당연하겠지만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초면의 인간이었다·
허나 남자는 벨카리온을 보자마자 확실하게 마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마치 그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너 나 아냐?”
“몸에서 베어 나오는 기품으로 보나 은은히 풍겨오는 힘의 세기로 보나 이런 기운을 가지실 분은 이 마계를 통틀어 한 분밖에 없겠지요· 혹여 아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능글맞음이 여간 거슬리는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벨카리온은 방금 전 그의 말에서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마계의 주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저 인간은 마계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원하고 있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고대했단 표정을 지을 순 없을 것이다·
일단은 거기에 맞게 응해주기로 했다·
“그래 뭐 이 근방의 마수들은 네가 다 처리한 거냐?”
“저 혼자선 불가능한 일이지요· 저를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몰아냈습니다· 막다른 길을 뚫어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말이죠·”
이해 못 할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남자는 다짜고짜 벨카리온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계의 주인이시여· 아니 마왕이시여! 부디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부탁?”
“예! 저희 인계엔 지금 신의 질서에 반하는 부정의 존재가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허나 저희의 부족한 힘으론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해서 이렇게 마계로 넘어와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나보고 네가 말하는 그 부정의 존재를 처리해달라 뭐 그 말이냐?”
“저희가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그런 염치없는 부탁을 할 순 없지요· 저희가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저 인계로 넘어와 작은 소란을 일으켜주는 것뿐입니다·”
벨카리온의 눈이 순간 가늘게 접혔다·
“인계로 넘어와 달라고?”
“예· 그렇게 넘어오셔서 아주 작은 피해만 일으켜 주십시오· 제가 마왕님께 부탁드릴 건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얻는 건 뭔데?”
남자는 바로 답하지 않고 살며시 입꼬리를 위로 틀었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여니
“그 부정의 존재가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저희 인계 전체에 인식시킬 겁니다·”
“···!”
“도와주시겠습니까?”
벨카리온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을 통해 인계에 있는 부정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인지시킨다고?
그건 그냥 자신을 갖다가 본인들 입맛대로 인형극을 벌이겠다는 것 아닌가?
감히 마계의 최강자에게 인형극을 해달라는 당돌한 제안을 하다니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그냥 어이가 없었다·
“이봐 인간 친구·”
심기가 불편해진 벨카리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에쉘· 에쉘 베르트입니다·”
이름을 들은 벨카리온의 입술이 순간 살짝 움찔거렸다·
“베르트?”
평소 기억력이 그리 좋진 않지만 그에게 10년 동안 잊지 않고 뇌리에 제대로 박힌 한 이름이 있었다·
에쉘 베르트·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벨카리온이 기억하는 그 이름과 유사한 이름을 가졌다·
“혹시 혹시 말이야····”
이에 벨카리온은 그를 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 네가 말하는 그 부정의 존재라는 친구 말이야· 그 친구는 이름이 뭐야?”
부정의 존재의 이름을 묻자 남자는 어째서인지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말 못 할 것은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답을 이었다·
“시안·”
“···!”
“시안 베르트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싸늘한 적막이 흐르고
머지않아 벨카리온의 입가엔
“시안 베르트라고?”
진심 어린 환희의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