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조력자들 (3)
책상 위 탑처럼 쌓인 서류 더미·
벌써부터 피로가 확 밀려오는 기분에 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제국의 여러 귀족과 영주 심지어 타국의 귀족 가에서도 넘어온 건의문들이었다·
대부분은 건의문을 위장한 반대문에 가까웠다·
“치울까요?”
아린의 눈치를 보던 레시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내가 선택한 길인데 좋은 말이든 안 좋은 말이든 전부 듣고 되새겨야지·”
아린은 힘찬 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은 뒤 바로 책상에 앉아 집무를 시작했다·
황실을 기만한 에쉘에게 수배령을 내린 것에 대해선· 귀족들 또한 어느 정도 용인하는 뜻을 내비쳤다·
허나 시안과 미스트를 향한 사면에 대해선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 역시 황실과 제국을 모욕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안개의 추종 집단을 용인한다는 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제국의 질서와 가치를 무시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허나 의외로 아린의 방향을 찬성하는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퀴젤 공작가·
황제의 전 장인이라는 거대 가문이 가장 먼저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비치자 쿤델 가에 협력적인 다른 가문들도 하나둘 동조한다는 뜻을 보였다·
물론 아직까진 반대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허나 아린은 천천히 의미 있게 바꿔가자는 마음으로 쌓인 건의문들을 꼼꼼히 읽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쓰인 것도 있었고 황녀의 결정을 대놓고 무시하는 불경한 것도 있었다·
특히 시안을 비난하는 내용이 매우 많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건의문을 살피던 아린은 이내 레시무스를 보며 물었다·
“베르트 공작가에서 온 건 아직 없는 거지?”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꽤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베르트 공작가·
이번 사건의 핵심인 두 남자가 공교롭게도 같은 가문이다 보니 베르트 공작으로서도 입장표명을 쉽게 하진 못할 것이다·
베르트 공작은 과연 두 아들 중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그 선택에 따라 아린이 선택한 방향이 좀 더 수월하게 갈지 아님 고난의 연속이 될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시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날 이후론 다시 만난 적이 없는 만큼 아린은 시안의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시안에 관해선 들려온 거 없어?”
아린이 시안을 언급한 순간 레시무스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실은 방금 전 기사들을 통해 접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소 말하기를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왜? 뭔데?”
평소와 다른 태도에 아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듯 물었다·
“지금 세벨리너스 변두리의 한 식당에서····”
레시무스는 몸을 숙이고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린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잠시 후 시안의 소식을 접한 아린은
“뭐?!”
깜짝 놀란 나머지 그대로 책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탑처럼 쌓여있던 건의문들이 충격에 사방으로 휘날렸다·
* * *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의 변두리 골목 구석에 자리한 어느 식당·
최대 수용 손님이 10명은 될까 싶을 만큼 작고 제대로 된 손님이 올까 싶은 허름한 식당이지만 오늘은 우리를 제외하고선 아마 한 테이블도 못 받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전세 냈거든·
우리 외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말 맛있어요 시안님!’
제국의 어딜 가도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면 요리·
하지만 하스티아는 그것을 너무나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먹고 있었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식욕을 자극했지만 좀처럼 내 입엔 들어가지 않았다·
머릿속을 심히 복잡하게 하는 하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근 열흘 만에 흔적이 파악된 에쉘·
이제는 나를 대신해 제국 최악의 범죄자로 전락해버린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벨리아스였다·
향한 이유는 뻔했다·
그곳의 영주이자 황실에 버금가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려는 의도겠지·
미스트의 정보망에 우선으로 걸린 만큼 아직 황실은 모를 것이다·
허나 결국은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을 터·
나로선 황실과의 협력보단 나 혼자 케이람을 들고 다녀가 그를 처리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지금은 좀 두고 보려 한다·
딴 게 아니라 뭔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다·
놈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
대뜸 눈앞에 포크에 돌돌 말린 면 더미가 나타났다·
포크를 잡은 손끝엔 하스티아가 푸른 눈동자를 끔뻑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시안님은 아직 한 입도 안 드셨잖아요? 가만히 있다간 아예 안 드실 것 같아서 제가 대신 먹여드리려고요!’
하스티아는 어서 입을 내밀고 먹어달라는 듯 쭉 뻗은 팔을 그대로 공중에 고정했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리 그대로 입으로 받아먹는 건 아니다·
대신 하스티아의 포크를 빼서 원하는 대로 한 입 먹어준 뒤 다시 돌려주었다·
하스티아는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잘들 논다 아주·]
그 모습을 달갑게 보지 않은 케이람이 옆에서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신의 눈 밖에 난 상황에서 음식이 넘어가냐?]
‘···!’
케이람의 입에서 신이 언급된 순간 포크 질을 하던 하스티아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나는 의식은 했지만 내색하진 않은 채 바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저 시안님?’
그녀는 이내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나를 불렀다·
“왜?”
‘시안님은 그러니까 그 지고의 존재님들로부터 반대되는 곳에 계실 생각이신가요?’
나름 돌려 말한 것 같긴 해도 사실상 직언과 다르지 않았다·
크게 반응할 이유도 없기에 덤덤하게 답했다·
“안 될 것 같으면 얘기해·”
‘···?’
하스티아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인간들 중에서 딱히 널 노릴만한 자는 없어· 더 이상 위험할 일도 없을 테니까·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프루이나로 데려다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시안님?’
“너도 그날 기운을 느꼈다며? 그럼 나랑 붙어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느꼈을 거 아니야?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하스티아가 뒤늦게 말하길 자신도 그날 루멘델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신의 보호를 받는 엘프이니 그들의 기운을 인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다만 그녀로선 루멘델에게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내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닐 테니
차라리 이쯤에서 나와 헤어져 프루이나로 돌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대체 왜 그런 말을 하세요!?’
하스티아는 어째서인지 내게 화를 냈다·
‘시안님은 제가 필요해서 절 일족원들로부터 데려오신 거 아니셨나요?’
맞다·
궁극적으론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구시대의 기록이야 뭐 남이 볼일 없으면 사실 나도 딱히 들출 이유는 없지·
‘데려오셨을 때는 시안님 마음대로셨겠지만 헤어질 때는 아니에요! 저 역시 시안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시안님을 따라온 거라고요!’
“내가 왜 필요하지?”
‘···!?’
“너희 일족의 문제 말고 또 다른 게 있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가 날 필요로 할 이유가 있나?
당차게 반응할 땐 언제고 급기야 얼굴이 붉어진 하스티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우리 미련한 주인한테 뭘 바라겠니?]
케이람은 그런 하스티아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딴 건 다 그렇다 쳐도 쟤는 왜 여기 붙어 있는 거야?]
돌연 날카롭게 세워진 케이람의 시선이 하스티아의 옆으로 향했다·
“저 말인가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담담한 눈빛으로 맞받아치는 단발머리의 여인·
다름 아닌 미아였다·
[저 말인가요? 누가 그 머저리의 후손 아니랄까 봐 선조랑 하는 짓이 똑같네? 어디 근본도 모르는 내 짝퉁을 들이밀 땐 언제고 낯짝을 한번 당당하게 들고 다닌다?]
“전 시안님 곁을 자기 대신 있어 달라고 했던 시리카님의 유지를 받들고 있을 뿐이에요·”
[얼씨구? 네가 언제부터 그년 말을 따랐다고? 있어야 할 곳도 구분 못 해서 성서 놈의 인형 노릇이나 하고 있던 주제에?]
“뭐 그땐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제대로 판별을 못 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지금은 확실하게 알았어요· 보리스 선생님보단 시안님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마음에 편하다는 걸요·”
케이람은 기가 찬 나머지 연신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솔직히 나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인데
그래도 놓치긴 아까운 인재인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당주도 그렇게 얘기했었다면·
나로선 듣는 게 맞겠지·
“다른 건 몰라도 시안님 지키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요· 이렇게 한가롭게 식사를 하다가도····”
-쐐액!
잠자코 있던 그녀가 갑자기 식탁 위에 있는 나이프를 집고선 뒤쪽으로 휙 던졌다·
“언제든 시안님을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으니까·”
-푹!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나이프는 곧 식당의 정문 바로 옆벽에 푹하고 꽂혔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목을 젖힌 어느 익숙한 백발노인과 시종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일 년만 더 먹었어도 못 피할 뻔했구먼····”
노인은 십 년 감수했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출입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침입자예요· 죽일까요?”
“됐어· 놔둬·”
성난 곰처럼 살기를 남발하는 미아를 바로 진정시켰다·
“못 본 사이에 숙녀님들이 늘었군· 암살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다른 쪽에도 능력이 있는 모양이야?”
노인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고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밖에 팻말 못 보셨나? 오늘 여긴 내가 전세 냈는데?”
“거 섭섭한 말을 하는군· 그날 나와 내 부하들이 자네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안 그래도 다시 보면 물어보려 했다·
제레온 알킨·
과거 빛의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하며 지금까지 대륙 각지의 기사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는 분께서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다짜고짜 내 쪽에 붙어 한참 후배뻘 되는 기사들과 검을 맞대었으니 보는 기사들도 어이가 없었겠지만 나도 어이가 없었다·
“노망나신 것도 아닌 마당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던거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네· 그냥 그 상황에선 뭔가 미심쩍은 성검의 주인에게 붙는 것보단 자네들에게 붙는 것이 훨씬 더 옳다고 판단했거든! 뭐 결과만 놓고 봤을 땐 틀린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은가?”
원래 저런 성격인 건지 아님 나이를 먹고 변한 건진 몰라도 참으로 낙천적인 단장님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자네야말로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아무리 황실의 이름으로 죄를 사면받았다곤 해도 이렇게 식당 하나를 전세 내는 엄청난 배짱을 부리다니 말이야·”
황성 중심지에 있는 고급 식당을 전세 낸 것도 아닌 마당에 뭐가 문제라는 거지?
애초에 난 저 능글맞은 영감님이나 찾아오라고 식당을 전세 낸 게 아니다·
“늙은이의 섣부른 생각일 수 있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지 않나? 도망친 성검의 주인을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대답 대신 턱을 치켜올렸다·
“눈빛 한 번 무섭구먼· 아직 자네를 의심쩍어하는 시선이 많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네· 그날 하늘에서 번쩍하고 떨어진 황금 기사도 그렇고 이 나라는 아직 안개를 향한 불신이 많지 않은가? 자네가 옳다는 것을 빨리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성검의 주인을 하루빨리 잡아야겠지·”
“거 남 일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군·”
“이걸 어찌 남 일이라 하는가? 이미 제국을 비롯해 타국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네· 자네는 이미 만인의 시선을 집중하게 했어· 지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궁금해할걸? 자네들의 다음 행보를 말이야·”
앞으로가 기대된다는 듯 낄낄대는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다·
허나 틀린 말이 없는 건 사실이다·
만인의 시선이라·
전생에 시선이란 것 자체를 받아온 적이 없는 나로선· 만인은커녕 단 한 사람의 시선조차····
“이건 또 대체 무슨 상황일까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또 찾아온 것이다·
하긴 뭐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
그냥 우연히 지나갔다가 내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고 말할····
“꼭 제가 냄새를 맡고 직접 찾아와야 하나요· 선배?”
루나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