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조력자들 (2)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야?”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아침·
맑디맑은 하늘과 다르게 에밀리의 얼굴은 그야말로 어둡기 그지없었다·
몰래 아침 산책을 다녀온 나나가 무심코 탁자 위에 올려놓은 공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 내용을 확인하고선 차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도련님의 죄를 사면한다고?”
앞선 내용엔 에쉘에 대한 수배령도 적혀있었지만 이미 에밀리에 눈에 그런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휘둥그레 떠진 그녀의 눈은 곧바로 나나에게 향했다·
“야 꼬맹이! 너 이거 어디서 갖고 왔어?!”
“지금 마을에 잔뜩 뿌려져 있던걸요? 재밌는 글인 것 같아서 하나 가지고 왔어요!”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나나는 해맑은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파파의 죄가 사면됐대요! 그럼 우리 이제 파파랑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죠? 그런 거 맞죠?”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른 나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밝혔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으 머리 아파! 브라이언은 대체 도련님이랑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야?”
에밀리는 급 밀려온 두통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나가 볼게요!”
흠칫 놀란 에밀리를 대신해 나나가 쪼르르 문으로 달려갔다·
“잠깐만! 누군지 알고 열겠다는 거야?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악의는 느껴지지 않으니까·”
나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에밀리를 안심시켰다·
그러곤 직접 집의 결계를 풀고선 문을 활짝 열었다·
“에밀리님과 나나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말쑥한 제복을 차려입은 네 명의 남녀가 나나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누 누구세요?”
이에 덩달아 따라 나온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주님의 명을 받고 두 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다 당주님이요?”
“예· 시안 당주님께서 두 분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와달라 하셨습니다·”
나나와 에밀리는 동시에 눈을 번뜩였다·
시안이 당주라니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에밀리와 다르게
“그럼···· 시리카 당주님은요?”
해맑았던 나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 * *
음침하고 음산한 한기가 감도는 어두운 분위기·
브라이언으로선 늘 느꼈던 분위기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그 어두움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시안은 그 어두운 중심에 홀로 외롭게 서 있었으며 그런 시안의 옆에 브라이언이 다가왔다·
“도련님 방금 전언이 왔습니다· 에밀리님과 나나를 데리고 무사히 이쪽으로 오는 중이랍니다·”
“····”
시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이미 다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브라이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묵묵히 그의 옆을 지키는 것이 다였다·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브라이언·”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시안이 마침내 그를 불렀다·
“예· 도련님·”
“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지?”
바로 대답하기 힘든 난감한 질문에 브라이언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너도 지금껏 나를 따라오면서 계속 궁금했을 거 아니야· 나란 놈은 나이도 어린것이 어떻게 저런 무지막지한 힘을 가졌는지 미스트라고 하는 암살집단에 어쩌다 들어가게 된 건지 또····”
브라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이자 가문의 후계자로 여기는 에쉘이란 인간을 왜 그리 증오하는지를 말이야·”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브라이언은 그 의문들을 단 한 번도 시안에게 묻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 도련님을 따르는 종자이자 기사입니다· 그렇기에 도련님에게 의문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마음으로 지금껏 도련님을 모셔 왔습니다! 전 항상 도련님을 신뢰····”
“내가 한번 말하지 않았냐? 무지한 신뢰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브라이언은 입은 다물어지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진실을 이야기했던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 그 말은 나에 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젠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시안의 표정은 어두우면서도 매우 진지했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내가 어디 가서도 두 번 다시 안 할 이야기니까·”
그 첫말을 시작으로 5분여간 이어진 시안의 이야기는
브라이언에게 있어 세계 종말의 예언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비참하게 이야기로 전해졌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과거에 어떤 비극을 당했는지 알게 된 종자의 현 심정을 말이다·
“어 어찌 그런 일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긴 해도 그 이야기를 사실로 가정한다면 그동안이 시안이 보여왔던 비정상적인 모습에 대해 설명이 가능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진실을 알게 된 브라이언의 얼굴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으며 그런 브라이언을 시안은 한결같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문이 해소됐냐?”
“예· 아주 잘····”
“그럼 잘 기억하고 있어· 혹여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면 네가 나 대신 남은 사람들에게 나를 향한 의문을 풀어줘야 할 테니까·”
“도련님의 말씀· 이 몸에 각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브라이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시안을 평생 따를 것을 다짐했다·
“오바한다 또····”
시안은 그 모습이 내심 불편하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벅저벅
그러곤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하고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미아였다·
그날 이후 미아는 시안의 옆에 있어 달라는 시리카의 유지를 받들어 미스트에 입단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시안은 이를 무리 없이 허락했다·
즉 그녀는 지금 미스트의 대원으로서 시안을 만나러 온 거였다·
“대화 중이셨나요?”
“아니야· 괜찮아· 뭐 전할 말 있어?”
“그 사람이 있다는 곳을 찾은 것 같아요·”
시안의 눈은 순간 크게 번뜩였다·
현 상황에 시안이 찾을만한 사람은 단연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딘데?”
미아는 늘 그렇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답했다·
“벨리아스요·”
* * *
“오랜만입니다· 율켄·”
제국의 서부 경계 벨리아스 전선 경계문 외곽·
외부인이라고 하기엔 이곳의 지도자와 너무나도 가깝고 내부인이라고 하기엔 제국의 중죄인으로 전락해버린 한 남자가 기사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왜들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마치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보고 계시는군요·”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겠죠? 에쉘 도련님?”
듣다 못한 율켄이 한쪽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물었다·
“애석하게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벨리아스에 오는 동안 간간이 듣기론 제가 무슨 제국의 중죄인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절 이리 경계하시는 겁니까?”
“굳이 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쉘 베르트·”
율켄은 법도에 따라 그를 잡아들이겠다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대신 아버님만 한 번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불허합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마지막으로 죄를 고하려는 마음에 온 것입니다·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율켄·”
“당신이 죄를 고할 곳은 공작님이 아닌 황제 폐하입니다· 이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 황성으로····”
“멈추어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장엄한 미성에 기사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에쉘은 기다렸다는 바로 무릎을 꿇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신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 에쉘 베르트· 불초한 마음으로 아버님을 뵙습니다·”
“따라오거라·”
베르트 공작은 아들의 인사를 무심히 넘기며 그를 경계문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도착한 후방 캠프 공작의 막사·
공작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고압적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며 에쉘은 굴하지 않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대응했다·
이내 공작은 책상 서랍에서 꺼낸 두꺼운 종이 뭉치를 에쉘의 앞으로 던졌다·
“그게 무엇인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황실을 등에 업고 네가 저지른 비리들이 낱낱이 적힌 것들이다· 며칠 전 비올렛 황녀님이 내게 보낸 것이지·”
에쉘은 확인해 볼 필요는 없다는 듯 굳이 종이를 들추진 않았다·
“또한 그녀는 서신을 통해 과거 자신이 엘리스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까지 내게 숨김없이 고백했다· 거기에 네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부 포함해서 말이다· 여기에 대해 달리 할 말 있느냐?”
“없습니다·”
에쉘은 이미 밝혀진 사실들을 애써 부정하진 않았다·
“나는 네가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물며 나를 따라 가문의 유지를 받들고 대륙의 평화를 이어 나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
“하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든다· 네가 장남이라서?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나는 대체 무슨 이유로 너에게 집착한 것인지 이제 와선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에쉘은 대꾸 없이 공작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전에 막내가 내게 그랬다·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했다·”
막내가 언급된 순간 에쉘의 눈빛이 바짝 세워졌다·
“너는 내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왔겠지만 난 네게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얌전히 황성으로 가라 에쉘· 너에게 아직 베르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명예가 남아있다면·”
공작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허리를 젖히며 턱을 치켜올렸다·
아비의 확고한 반응에 충격이라도 먹은 것일까?
에쉘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으시군요·”
공작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가문 제국 평화· 아직도 이런 허상에 집착하십니까?”
에쉘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떨궜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왜 제게 집착했는지 모르시겠다고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제가 그러도록 만든 것이니까요! 다른 자식은 모두 제치고 오직 저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제가 아버님을 현혹한 겁니다!”
-스릉
공작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검을 뽑아 에쉘에게 겨눴다·
“네놈이 방금 한 발언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설명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처음부터 저란 존재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증거!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저의 권능입니다!”
-피잉!
순간 에쉘의 눈에서 선홍빛 광채가 번쩍였다·
그 광채에 시선에 뺏긴 공작은 멍한 눈으로 에쉘을 빤히 쳐다보다가
-스윽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아까와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에쉘?”
에쉘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천천히 공작의 앞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선의 모든 기사에게 명해주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