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안개의 질서 (3)
시안과의 만남이 있고 그다음 날·
아린은 시안이 말한 선택에 대한 화답으로 제국 전체에 공문을 내렸다·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이자 성검의 주인 에쉘 베르트는 그동안 황실을 기만하고 황제를 능욕한 대역죄를 저질렀다· 이에 황실은 그의 작위를 강제 해제하고 중죄를 범한 범죄자로서 수배를 내린다·>
현재의 질서를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공문을 통해 표명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밑의 내용·
<동시에 황실은 현 시간부로 미스트에 대한 모든 수배를 철회하며 시안 베르트에 관한 죄도 전부 사면할 것을 선포한다· 더불어 그에게 다시 귀족의 작위를 하사한다·>
에쉘에 대한 수배와 시안에 대한 사면·
일부 사람들은 이걸 보며 말했다·
이제 제국이 무엇을 선으로 보고 누구를 악으로 봐야 할지 결정한 거라고·
이 결정엔 큰 반발이 따를 것이며 곧 그녀의 의견에 반하는 수많은 세력이 들고일어나 그녀를 막을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린 황녀가 이를 막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아린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그저 제국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첫걸음일 뿐·
선과 악을 규정짓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설마하니 황녀님과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당신과 이런 관계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보리스·”
에쉘을 죄인으로 선포한 시점에서 그의 측근들 또한 죄의 화살을 피할 순 없었다·
온몸을 결박 당한 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보리스·
그는 이제 황실의 마법 고문이 아닌 엄연한 죄인으로서 아린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건 절대 황실과 제국을 위한 일이 아니에요! 속히 공문을 철회하시고 미스트에 대한 재 수배령을 내리십시오!”
보리스의 거듭된 요구에도 아린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황녀님은 그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물은 보리스는 어조를 바꿈과 동시에 눈에 핏대를 세우며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계신 그곳은 저와 에쉘님이 만든 자리입니다! 저희가 잠시 힘을 잃었다 해서 황녀님이 멋대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린은 생각했다·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고·
“황녀의 자리는 황제 폐하이신 아바마마 말고는 그 누구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한데 그 자리를 당신들이 만들었다고요? 참으로 불경하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네요·”
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겨우내 삼킨 보리스는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한 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저를 믿어주십시오 황녀님! 황녀님께서 지금 가지셔야 할 마음은 의문이 아닌 신뢰입니다! 빛을 향한 신뢰란 말입니다!”
처음 봤을 땐 한없이 높아 보였던 사람이 어찌 이리 추락한 것일까?
아린은 이내 몸을 숙여 그와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저 역시 보리스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여태껏 보리스님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느꼈던 사실 하나가 뭔지 아시나요?”
“무 무엇이었습니까?”
“보리스님의 말에는 저를 향한 진심이 없다는 거였어요·”
급 말문이 막힌 보리스는 입술만 이리저리 움찔였다·
“하물며 저에 대한 진심을 한 번도 안 보여주신 분께 믿음을 달라니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오 오해십니다! 전 황녀님께 항상···!”
아린은 더 듣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몸을 일으키고선 매정하게 돌아섰다·
“당신에 대한 처벌은 바로 하지 않고 조금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보리스는 그렇게 멀어지는 황녀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다 실성이라도 한 듯 입을 떡하니 벌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역시 인간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동물이군요! 어찌 같은 실수를 이렇게 반복하는지 참으로 비탄할 지경입니다!”
그 말이 못내 거슬렸는지 아린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누구도 절 처벌할 순 없습니다! 설사 황녀가 아닌 황제가 온다고 한들! 절 처벌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나락에 빠진 인간이 현실을 부정하다 못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
보는 이로선 차마 한숨을 뱉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하나 말씀 안 드린 게 있네요·”
그럼에도 아린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보리스님을 처벌하는 건 저희가 아니에요·”
“···?”
“참고로 보리스님이 있는 이 감옥엔 어떤 경계 병력도 배치되어 있지 않아요· 즉 보리스님을 위해 누가 찾아온다 해도 막을 병력이 없다는 이야기죠·”
말을 이해하지 못한 보리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럼 건투를 빌게요 보리스님·”
그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아린은 기사들과 함께 감옥을 벗어났다·
홀로 남겨진 보리스는 고개를 푹 숙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미칠듯한 웃음을 내질렀다·
“이 모든 일의 끝은 이미 정해졌거늘 어찌 저리 의문들을 품는지····”
곧 보리스의 몸 안에서 하얀빛이 일었다·
빛은 그의 몸을 결박하던 사슬과 자물쇠를 하나둘 풀어 주었고 머지않아 모든 포박이 풀린 보리스는 바닥에서 여유롭게 일어났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겠지요· 성서이시····”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성서를 부르던 그의 얼굴이 돌연 돌처럼 굳었다·
대답 없는 부름
반응하지 않는 마력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보리스는 자신의 두 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서이시여? 왜 제게 반응을?”
성서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성검이나 마검과 달리 먼 곳에 있어도 정신 감응을 통해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 성서이건만
성서 히스크레아는 어째서인지 보리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부러 보내지 않는 다거나
아님 보낼 수 없는 상황이거나·
지금의 보리스로선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저벅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감지한 보리스는 바로 행동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에 시선을 보냈다·
“뭐 뭐야?”
보리스는 이내 생각했다·
이 인기척은 자신에게 있어 매우 익숙하다고·
문제는 그것이 절대 좋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자신에게 있어서 엄청난 해를 일으킴과 더불어 절망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스스스
그의 직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곧 철창 사이로 검은 안개가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일전에 네가 네 입으로 그랬지?”
“···!”
“우리의 관계가 최상으로 무르익었을 때 해소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그래야 더 성취감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급기야 다리의 힘을 풀린 보리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나 힘겹게 엉덩이를 이끌고 움직여 봤지만 소용없었다·
앞은 철창으로 막히고 사방은 철벽으로 막힌 이 좁은 구역에서 그가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곧 철창 사이로 스며든 검은 안개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니
“난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리스는 질색하다 못해 안색까지 파랗게 변한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쾅!
희열을 주체못한 나머지 철창을 강하게 치며 살의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흑발의 남자·
지금의 이 순간을 너무나도 기다리고 기다렸던 시안이
“안 그래?”
그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찾아왔다·
* * *
우시프 제국 마법학회장· 최연소 9성급 경지 달성·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인재·
그러면서도 항상 놈의 곁에 붙어 다니며 놈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는 충직한 수하 노릇을 자청한 남자· 보리스 르헬름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괴인이 나타난 것일까?
그의 연고지는 대륙 북부 도시 액실리움에 위치한 슬럼가·
무려 검은 피가 흐르는 저주받은 일족이라 멸시당하며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무리의 출신이다·
평소엔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못 받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놈의 곁에 붙은 것이다·
거듭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지·
마치 그곳에 잘살고 있던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만 같았다·
“이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입에서 검은 피를 연신 토하던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하나 죽인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에요· 난 봤습니다· 이전에도 당신과 똑같은 자를 봤어요·”
나는 살며시 다리를 굽혀 몸을 숙인 뒤 엎어져 있는 놈의 머리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얼굴을 보니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대답 대신 놈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할 말 있으면 실컷 지껄여보라는 의미였다·
“그래요· 난 현시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과거의 시대 즉 구시대의 사람입니다· 빛의 세력을 도와 안개를 추종하는 이들을 처벌했던 자였죠·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검 케이람의 전 주인이었던 디오 하펜커스는 제 친구였습니다·”
[···!]
반응은 내가 아닌 오른손에 있는 케이람이 대신했다·
“제국 전역에 뿌렸던 안개의 교서 알고 계시죠? 그거 디오 그 친구가 쓴 겁니다· 그가 죽기 전 제게 마지막으로 주었던 선물이기도 하죠·”
나는 동요하지 않고 녀석의 이야기에 계속 집중했다·
“저와 그 친구는 서로 마법을 공부하던 탐구자였습니다· 하지만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죠· 디오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의문만 가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잘못된 길에 빠졌죠· 바로 당신처럼!”
케이람을 잡은 오른손에서 순간 강한 떨림이 일었다·
허나 그녀는 몸을 떨기만 할 뿐 딱히 말을 걸거나 실체화하진 않았다·
“그 친구를 향한 제 연민은 머지않아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대체 왜 이 빛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요소를 신뢰하지 않고 항상 의심하는 걸까? 그 의심에 대한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녀석은 광기에 찬 웃음을 남발했다·
“결과적으로 검은 안개의 신은 신계에서 추방당했고 그를 따랐던 수많은 인간은 마검의 소유주로부터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했으니까요! 디오는 마지막으로 제게 그랬습니다! 나로 인해 잘못된 길을 따랐던 사람이니 자신이 직접 안식을 주는 것이 맞다고 말입니다!”
결국 미아가 이야기한 진실은 이거였다·
빛에 굴복당한 마검의 주인이 자신을 따른 추종자들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지하고선 그들을 죽여야만 했던 일·
차마 온전한 정신으론 그럴 수 없어 케이람에게 자신을 먹어 치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케이람은 그런 소유주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겠지·
본성이 아닌
애증의 마음으로·
“그래서 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된 날 제 인격을 스스로 성서 안에 봉인하기로 했습니다· 먼 훗날 당신과 같은 부정한 존재들이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다시 한 번 그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액실리움에 있는 검은 피의 일족도 결국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일족 같은 게 아니에요! ”
검은 피의 일족이 언급된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저 제 인격이 이전될 수 있는 육체일 뿐! 어디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슬럼가라는 하나의 구역 안에서 통제한 것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 올 제가 온전한 몸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죠! 보리스라는 이름도 사실 제 진명은 아닙니다!”
그래 그게 네놈의 정체였다 이건가?
네놈의 언제일지 모를 다음 생을 위해 그 수많은 사람이 겪어야 할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거지?
하기야 뭐 지극히 네놈다운 일이니 별로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지 마십시오 시안 베르트! 당신은 아직 산 중턱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앞엔 넘어야 할 끝없는 고난의 산맥이 펼쳐져 있으니까요! 시리카 교관 외에도 당신을 따랐던 모든 이들을 잃게 될 겁니다!”
“····”
“아 그러고 보니 제 진짜 이름을 아직 말 안 드렸군요· 보리스 르헬름이 아닌 제 진짜 이름은 바로···!”
-콰직!
사람은 원래 죽을 때가 다가오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지·
“커헉!”
한데 네놈은 좀 선을 넘었다·
내가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나는 놈의 가슴팍에 꽂은 케에람을 자비 없이 뽑아냈다·
그러곤 푹 숙인 놈의 머리를 다시 집어 눈을 마주했다·
“네놈이 과거에 뭘 하고 앞으로 뭘 하려 했건 내 알 바 아니야·”
“···!”
“네놈은 그저 그 악마와 함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했던 날 뒤통수친 놈이라는 거· 내가 널 죽이는 이유는 순전히 그거 하나야·”
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해 못 하겠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고 상황을 돌이켜봐도 지금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해하지 마· 그 의문과 부정을 해소하지 못한 채····”
-쐐액!
“죽으면 되니까!”
나는 검은 안개로 뒤덮인 왼손으로 보리스의 목을 조른 뒤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참회의 시간·
비명과 절규가 한데 어우러진 하모니가 공간 전체에 아름답게 퍼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