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재림 (3)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세상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갈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준비했던 계획이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고 어긋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마음에 비올렛은 에쉘에게 한 번 이런 질문을 했었다·
“딱히 초를 치려는 건 아니지만 만약 당신이 준비한 이 모든 계획이 다 통하지 않게 된다면 어쩌실 건가요?”
이에 에쉘은 대답했다·
“전 항상 어떤 일을 계획하든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항상 성공할 것이라 믿어왔죠·”
이 세상 자체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에쉘은 이제껏 스스로 계획하고 진행해온 모든 일을 순조롭게 달성해왔다·
시안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가 들으면 한 번도 실패라는 걸 안 한 사람인 줄 알겠네요? 당신의 그 귀여운 막내와 있었던 트러블도 실패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실 건가요?”
“짓궂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딱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황녀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죠· 제가 이렇게 준비를 하는 만큼 제 동생 역시 저를 위한 많은 것을 준비할 테니까요· 허나 과정이 어떻든 최후의 웃는 자는 제가 될 것입니다·”
표정만 봤을 땐 그 준비를 매우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만약 최후의 웃을 자가 당신이 아닌 당신의 동생이 된다면 어쩌시겠어요?”비올렛의 꽤 집요한 파고듦에도 에쉘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역시 그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 제가 아닌 시안이 마지막에 웃게 될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
“그때는 되돌려야겠지요·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완전한 처음으로····”
수많은 기억과 상황이 있었지만 비올렛은 어째서인지 그때 에쉘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 말을 했을 당시 에쉘의 손엔
“···!”
지금 비올렛이 간절히 잡으려고 하는 그 상자가 들려 있었다·
-콱!
“아악!”
손목이 짓눌리는 고통에 비올렛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가녀린 손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누군가의 발·
다름 아닌 미아였다·
“이상하네요· 딱히 뭔가를 되돌릴 수 있는 물건이라곤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상자를 잡은 미아는 비올렛을 덤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비올렛은 아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자를 향한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언니!”
깜짝 놀란 아린이 소리쳤지만
미스트의 당주 앞에서 한눈을 파는 건 오만과도 같았다·
시리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아린의 복부를 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퍽!
한순간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아린
시리카는 바로 목을 벨까 싶다가도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검을 고쳐잡고선 그대로 어깨에 내리꽂았다·
“···!”
아린은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쓰러지는 동시에 아련한 눈빛으로 비올렛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 손길은 닿지 못했으며 바닥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참으로 처량할 지경이었다·
“참 눈물겨운 애정이 아닐 수 없네요·”
시리카는 그 모습을 보란 듯이 비꼬았다·
허나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모든 걸 돌릴 수 있다고?
그 정도로 엄청난 것이 저 상자에 담겨있단 말인가?
나름 최후의 수단이라 준비한 것 같긴 해도 보리스는 오히려 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며 경고하지 않았는가?
왠지 모를 찝찝함이 그녀의 마음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 상자 줘봐요· 미아·”
미아는 덤덤하게 상자를 건넸다·
시리카는 받은 상자를 눈을 좁히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엔 정말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상자 내부에서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풍겨오고 있었다·
일단 마력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성검이나 성서 같은 신의 무구가 발산하는 힘도 아니었다·
이 기운은 마치 평소 그녀가 아에르와 대면했을 때 종종 느꼈던 신 자체의 기운과 굉장히 유사한····
“···!”
무언가를 깨달은 시리카는 눈이 갑자기 크게 번뜩였다·
“이봐요 미아·”
“네?”
갑자기 확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미아도 살짝 당황했다·
“당신은 성검과 성서의 주인이 이 상자를 가지고 뭘 했는지 본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직접적으로 본 건 없어요· 다만····”
미아는 일전에 자신이 봤었던 일련의 상황을 시리카에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시리카는
“····”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홰액!
돌연 구석에 쓰러져 있는 보리스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네놈들은!!”
보리스는 피죽이 된 얼굴로 실실 웃다가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그 잘난 계승자를 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상자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저희로서도 차마 열고 싶지 않은····”
-쿠구궁!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에 진동이 일었다·
마치 근처에서 강력한 벼락이 떨어진 듯한 느낌·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한 와중에도 보리스는 실실 흘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벌써 재림한 모양이군요·”
“···?”
“다 끝났습니다· 당신들은 이제 바꿀 수 없어요· 지고의 존재들로부터 창조된 우리 피조물들로선 절대 바꿀 수 없는 그 미래를···!”
-퍽!
찰진 타격음과 함께 보리스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얼굴은 이내 힘없이 내쳐졌으며 보리스는 흩날리는 낙엽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리카는 다시 상자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수십 년간 다져온 암살자의 감각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아직 이 상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허나 이렇게 열지 않고 두는 것 자체도 미래에 있어 굉장히 위험할 것임을 시리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시안에게는 더더욱·
계승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녀로선
차마 이 상자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시리카는 지그시 눈을 감고선 내면에 묵혀놨던 안개의 힘을 전부 방출했다·
* * *
-휘이잉
피부를 스치는 싸늘한 바람이 지금의 내 처량한 기분을 가중시켰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텅 빈 눈앞·
나는 잠시 고개를 하늘 위로 들어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여기 왜 있는가?
미스트와 나의 각성을 위해 아린 황녀를 죽이려 했던 당주의 계획을 망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질서를 운운하는 놈들의 같잖은 계획을 무너트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를 위해 아공간에 갇혀 있던 아린 황녀를 구하고 당주와 혈전을 벌였으며 성검의 주인과 검을 맞대었다·
케이람 전 주인의 후손?
성검의 기사들?
솔직히 참신하다면 참신했다·
나를 넘어서기 위해 준비한 그들의 노력이 나름 제대로 돋보였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라고 했던 내 조언을 충직히 수행한 것 같아 기분도 꽤 나쁘지 않았다·
결국 당신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수작을 부리든 간에 날 이길 순 없다·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한 뒤 절망에 휩싸인 상태에서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고통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전생과 현생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악연을 이제 그만 끝내려 했다·
근데 도망쳤다·
방생이 아닌 엄연한 도주·
그 잘나신 분들의 성스러운 보호를 받으며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달아난 것이다·
“하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긍정에서 비롯된 웃음은 아니었다·
웃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속된 비속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야 주인아·]
조금은 마음이 진정된 듯한 케이람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놈이 이제 너를 완전히 지워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모양이다·]
“그놈? 그놈이 누군데?”
케이람은 어째서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나로서도 딱히 닦달할 마음은 없었다·
아직도 완전히 누그러지지 않은 그녀의 떨림이 계속해서 검을 통해 느껴졌으니·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야? 내가 왜 갑자기 검을?”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야 나?”
성검의 세뇌에서 풀려난 기사들이 하나둘 제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에선 더 이상 성검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미 그 힘의 원 주인이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났다는 뜻이겠지·
아·
짜증난다·
명줄이 질긴 놈이라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았던 사실·
근데 이런 식으로까지 질길 줄은 몰랐다·
그토록 염원하던 복수의 대상이 눈앞에서 도망쳤는데 난 그걸 지켜만 봐야 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 지금의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놈에게 통수를 맞았던 것 그 이상으로 열이 뻗친다는 것을·
-스윽
불현듯 반대쪽 손에서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시안님?’
어느새 다가온 하스티아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접한 순간 치솟았던 마음이 작게나마 누그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그 뒤를 이어 달려온 브라이언·
그의 등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루나브가 포근히 업혀 있었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아린 황녀에게 상황을 수습하라 하고 그 이후엔···!
나도 모르게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휙획 둘러보았다·
“왜 왜그러십니까 도련님?”
“황녀는?”
“예?”
“아린 황녀는 어딨냐고?”
‘화 황녀님이라면 아까 황제 폐하를 모시고 현장을 떠나셨어요!’
대답은 하스티아가 대신 해주었다·
아린 황녀가 보이질 않았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즉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는 미스트의 검도 아직 거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로 갔는데?”
‘그 그게 방향이 아마···!’
차분히 방향을 더듬던 하스티아의 눈이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
멈춰버린 눈을 대신해 붙잡은 그녀의 손에 점차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두려움의 떨림·
어떤 불길한 기운이라도 감지했는지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몸을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뭐야? 너 왜 그래?”
하스티아는 입만 어버버거릴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혹시 모를 마음에 나 역시 그녀가 보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황궁·
느낌만 봤을 땐 그곳에 뭔가 엄청나게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
머릿속에서 대뜸 익숙한 신호가 울렸다·
이건 정신 감응을 활용한 당주의 호출 신호·
그 방향은 다름 아닌
“황궁 지하?”
황궁 지하였다·
“···!”
신호를 받아들인 대원들도 하나둘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예상 못한 신호였는지 얼굴에 하나같이 당황함이 역력했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으로의 호출?
아니 황궁이 무슨 빈집도 아니고 문 앞도 아닌 지하로 달려오라고?
하스티아의 시선과 당주의 호출이 겹치면서 내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어만 갔다·
일단은 대원들을 함께 호출 장소로 가보려는 순간
“가지 않는 걸 추천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가 나를 막아 세웠다·
“오히려 지금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걸 추천하지· 조금이라도 살날을 늘리고 싶다면 말이야·”
목소리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번뜩인 내 두 눈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브라이언의 등에 업힌 루나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바로 뒤에 자리한 흑발의 남성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 친구 보기보다 감각이 무디네? 지금 네 옆에 꼭 붙어 계신 숙녀님의 두려움이 안 느껴지나 보지?”
숙녀님의 두려움?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초·
이해와 동시에 안개가 피어오르며 케이람이 나타났다·
[····]
케이람은 어떠한 말이나 설명 없이 흑발의 남성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대뜸 나를 돌아보더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검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성 역시 더 말은 안 하겠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도 도련님? 지금 누구와 대화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브라이언이 눈을 멀뚱멀뚱 뜨며 물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보다가도
“금방 돌아온다· 내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아공간 게이트를 생성해 그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밀린 브라이언과 뭐라 묻지도 못했으며 하스티아의 시선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아공간으로 보낸 뒤 나는 즉시 당주가 신호를 보낸 곳으로 달려 갔다·
“치 침입자다!”
먼저 떠난 대원들을 모두 제치고 막아선 기사들 조차 막무가내로 지나치며 도착한 황궁 지하·
차디찬 돌바닥을 딱 처음 밝은 순간부터 비롯한 피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다지 향기롭진 않은 냄새·
나는 피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황급히 냄새의 근원지로 향했다·
이전에 감금되어있던 켈린을 죽인 바로 그 장소·
그렇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
나는 눈을 의심했다·
구석에 쓰레기마냥 처박혀 있는 보리스·
피를 흘리며 벽에 기대고 있는 아린 황녀와 그런 그녀의 곁에 꼭 붙어있는 비올렛 황녀·
놀란 눈으로 멀뚱멀뚱 서 있는 미아까지·
이미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광경이었지만
정작 내 눈과 몸을 떨게 한 광경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열 보 앞 거리에서 피를 잔뜩 흘린 만신창이의 상태로 공중에 붙들려 있는
“···!”
당주의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