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개편의 날 (1)
근 몇 년 만에 불이 켜진 황제의 집무실·
집무실에 앞엔 출입을 위해 찾아온 에쉘과 비올렛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쉘의 얼굴엔 약간의 언짢음이 서려 있었다·
“꼭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사람은 익숙함에 취하다 보면 자신의 위치를 잊게 되는 법이에요·”
비올렛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황실의 일원도 아닌 당신이 이 황궁을 제집처럼 돌아다닐 수 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아바마마와 우애가 깊은 베르트 공작님의 아들이라서? 그 이름도 찬란한 성검의 주인이라서? 천만에요· 바로 내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비올렛은 서로의 입술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당신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할 순 없겠죠· 그러니 제가 이렇게라도 상기시켜드리는 거예요· 당신에게 있어 내가 어떤 존재인지·”
“····”
에쉘은 의기양양한 비올렛의 눈빛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며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라·”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지체할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우시프 제국의 2황녀 비올렛 세벨러스·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비올렛은 기품있는 몸짓으로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반면
“····”
에쉘은 예는커녕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디오네 황제를 응시하기만 했다·
“이게 무슨 무례에요 에쉘? 어서 아바마마께 예를····”
“어서오시오· 에쉘 공·”
비올렛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직 철들지 못한 말괄량이 딸 때문에 그대가 고생이 많구려·”
“아바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황제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에 놀란 것도 잠시
황제의 눈빛에서 뭔가를 발견한 비올렛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짙은 검은 색의 눈동자가 아닌 희미한 보랏빛의 눈동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눈 색이었다·
이에 비올렛은 깨달았다·
황제는 지금 절대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때로는 진실을 알고 혼란에 빠지는 거보다 모르는 채로 편히 지내는 게 나은 법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이윽고 에쉘에게 돌아갔다·
“황녀님께선 황제 폐하께서 몇 년 새 급속도로 쇠약해진 이유가 지병인줄 아셨겠지만··· 아닙니다·”
이번엔 에쉘이 그녀에게 입술이 닿을 만큼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 에쉘? 당시 대체 아바마마께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맞춰보십시오· 제가 무슨 짓을 한 것 같습니까?”
에쉘은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으며 역으로 물었다·
“분명 보리스 그 남자로부터 이상한 마법을 걸게 했겠죠!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아바마마께 이런 짓을!”
“마법이 아닙니다·”
그녀의 입을 닫게 하는 데엔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건 저만의 권능이지요· 저와 눈을 마주한 모든 이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지고의 존재께서 하사해주신 특별한 권능입니다·”
“궈 권능?”
“예· 하지만 전 이 권능을 비올렛 황녀님껜 쓰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아린 황녀님께도 쓰지 않았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비올렛으로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간단합니다· 외롭기 때문입니다·”
에쉘은 미소를 지으며 명쾌하게 설명했다·
“제 진면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형들의 주인이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황녀님처럼 진심으로 저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분이 곁에 있어야 저도 사는 맛이란 걸 느끼지 않을까요?”
비올렛은 웃지도 울지도 못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한 번 더 상기해주십시오· 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자· 제 동생이 황녀님께 무슨 수작을 걸었든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황녀님께선 그저 제가 바라고자 하는 자리에 몸소 오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이 지켜보셔야 합니다·”
“···!”
“그것이 제가 황녀님을 제 사람으로 만든 이유니까요·”
기어이 다리에 힘이 풀린 비올렛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탈함과 허무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있던 것도 잠시
“하하····”
그녀는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성해서 웃는 건지 아님 그의 진면을 알고 웃는 건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진 않았다·
“5일 뒤에 있을 조회식에는 비올렛 황녀님께서 대신 나서주시지요· 대본은 곧 다른 이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모쪼록 준비 잘해주시길·”
에쉘은 그런 황녀를 무심하게 놔둔 채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비 비올렛?”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황제가 주저앉은 비올렛을 발견하고선 눈을 번뜩였다·
비올렛은 황제의 부름에도 차마 대답할 수 없어 웃음만 이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놔둔 채 밖으로 나온 에쉘은
“시안····”
그리운 동생의 이름을 애절하게 불렀다·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내 진면을 안다고 자부했던 너와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그의 입가엔 환희 기대의 감정이 얽히고 얽힌 무척이나 기이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 *
벌써 5일째·
브라이언과 슈르츠는 믿을 수 없다 못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나브 레인리버·
그녀는 정말 사람이긴 한 걸까?
거짓말 않고 그 5일 동안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마법으로 만든 소환수라해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건 뭐 인형이라 믿을 정도·
정말 대단한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
그런 그녀가 5일 만에 반응을 보였다·
옆에서 줄곧 보조하던 하스티아도 덩달아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추방된 존재라 해도 신은 신이라 이건가요? 정말 어지간히도 복잡하게 막아놨네요·”
루나브는 심히 불편한 낯빛을 보였다·
지쳤다기보단 자존심이 심히 상한 것만 같았다·
‘벌써 5일이 지났어요!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아린 황녀님은 무슨 일을 당하고 계실지 모르는데····’
하스티아는 지친 와중에도 아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하다못해 시안이라도 돌아온다면 좀 더 단서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정작 시안은 5일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루나브는 잠시 몸을 돌렸다·
“황성의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내일 있을 황실의 조회식으로 인해 굉장히 분주한 느낌입니다· 한데····”
브라이언은 살짝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뭔가 분위가 좀 심상치 않습니다· 아린 황녀님 없이 조회를 여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불만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슈르츠도 거들었다·
“검문 작업이 이틀 만에 끝난 것도 그렇고 이런 심각한 와중에 갑자기 평민들 앞에서 조회를 열겠다고 하니 적잖은 거부감이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듣기론 귀족들의 반응도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비록 아린이 그동안 황실에서 껍데기 같은 취급을 받았다곤 허나 지금은 명백히 한 명의 일원으로서 제구실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녀를 찾기 위해 황성을 넘어 제국 전역을 뒤져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조회 준비나 하고 있다니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일이었다·
“그럼 둘 중 하나라고 봐야겠네요·”
루나브는 바로 가설을 세웠다·
“황실은 이미 아린 선배가 죽었다고 판단해 그냥 예정된 거사를 이행하려한다 거나 아님····”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린 선배가 조회 때 나타날 거라 보고 있다거나· 이 정도로 볼 수 있겠죠·”
루나브는 후자를 좀 더 확신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을 뿐이에요· 시안 선배도 그리 서두르진 않는 걸 보면 아직은 아린 선배가 무사히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봐요·”
대답을 마친 루나브는 이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백색 유리구슬이었다·
그녀는 꺼낸 구슬을 바로 슈르츠에게 전달했다·
“루나브님 이건?”
“마법 아티팩트 ‘전령구’를 휴대하기 쉽게 소형화시킨 거예요· 그것만 있으면 아공간 밖에 있어도 저랑 통신할 수 있어요·”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전령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걸 가지고 내일 조회 장소로 나가주세요· 나가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제게 보고해 주시고요·”
“저도 가겠습니다!”
브라이언도 동행을 자청했다·
“좋아요· 그 보고를 바탕으로 나랑 하스티아는 계속해서 아공간의 기운을 살펴보도록 해요·”
하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찬 긍정의 의사를 보였다·
다시금 계획을 정리한 루나브는 잠시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내일 아린 황녀는 미스트와 함께 조회식에 나타날 터·
그럼 그 틈을 노려야 한다·
그들이 아린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게이트를 여는 그 순간의 틈을 이용한다면
루나브는 틀림없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검은 안개 신의 아공간 속으로·
* * *
황성 대로변 한가운데 높이 솟은 단상·
곧 있을 황실의 조회를 위한 준비 작업이 바쁘게 행해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부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황실은 제정신인가? 아린 황녀님께서 어찌 되셨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조회라니?”
“황녀님은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대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을 공표하겠다고 이러는 건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듯 하늘도 굉장히 우중충했다·
금방 비와 벼락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고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비올렛 황녀가 단상 위에 올라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곧 소리 증폭 마법을 시전하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오늘 이 자리는 구원의 기사단 리딤의 의전식과 새로운 질서의 선포가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허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겠죠·”
이에 군중 속에서 하나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아린은 황실의 일원이기 전에 제 가여운 동생입니다· 자신의 불후한 처지에도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아 지금은 어엿한 황녀로서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는 아주 기특한 아이였습니다· 허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입에 담기도 거북한 추악한 이들로부터 납치를 당해버렸습니다·”
감정에 복받쳐 오르기라도 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작은 안 봐도 뻔합니다· 아린 황녀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거죠· 매일 같이 루멘델님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그 마음을 남들에게까지 나누어준 그녀가 무척이나 거슬렸던 겁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황녀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자 어디 한 번 나타나 보십시오 미스트! 제 동생을 납치한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 자리에 나타나 떳떳이 밝히란 말입니다!”
비올렛은 어디서 지켜볼지 모를 그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딱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분노에 찬 사람들의 목소리가 대신 퍼지고 있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나타나라 미스트!”
“황녀님을 돌려내!”
그 모습을 한쪽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제레온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래서야 안개의 존재들까지 어떻게 구원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분위기만 봤을 때 당장이라도 정화군을 다시 편성해 그들에 대한 토벌 작업을 진행할 판이었다·
그렇게 미스트를 향한 부정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퍼지려나 싶은 순간
-스스스
갑자기 단상 위로 미지의 검은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피하십시오 황녀님!”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기사들이 비올렛을 황급히 피신시켰으며 군중들도 일제히 단상 위의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렇게 안개 속에서 낯선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발견한 사람들은 전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침한 살기를 내뿜는 검은 옷의 무리들 때문이 아닌
그 앞에 피를 흘린 채 주저앉은 누군가의 모습 때문이었다·
일부는 놀라다 못해 괴성마저 질렀다·
“아 아린 황녀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