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마계의 최강자 (3)
마왕 벨카리온·
마계군단과의 전쟁에서 그를 목격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세상의 있는 모든 악(惡)이 한 데 모인 것만 같다·’
창세신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모든 생명체에게 부여한 정(情)이라는 내면의 작용을 철저히 부정하는 존재·
그 어떤 부정적인 말로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 존재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거부감·
신과의 계약을 이루어냈던 내가 두려움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다시 느꼈던 존재이기도 했다·
어쩌면 신조차도 두려워했을 남자·
격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현재 불안정한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인간 맞냐니깐? 왜 말이 없어?”
불러도 반응 없는 내 모습에 벨카리온은 대답을 재촉했다·
“벙어리인거냐? 아님 너 내 말 못 알아들은 거니?”
못 알아 듣긴커녕 토시 하나까지 다 알아들었다·
급기야 절벽에서 뛰어내린 벨카리온은 내가 서 있는 땅 위로 가볍게 안착하였다·
“분명 생긴 것만 봐선 10년은 살았을까 싶은 어린 친군데 꽤 당돌하네? 헬하운드를 한 번에 죽인 것도 모자라 들고 마시기까지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 마다 묵혀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상기된다·
최강자를 마주함으로서 느껴지는 전율·
뼛속까지 미치는 서늘함과 솟구치는 혈기·
뒷일은 생각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감정이 내면을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
교차된 손목과 전방을 향하고 있는 검끝 그 굴곡진 공간에 올라선 두 개의 눈동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둔 최적의 방어 자세로 돌입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본 벨카리온은 크게 웃었다·
“푸하하! 얘 되게 귀엽네? 야 긴장 풀어! 누가 죽이기라도 한···!”
벨카리온의 능글맞던 얼굴이 한 순간에 굳어졌다·
나와 마왕의 거리는 불과 열 보 남짓·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일지언정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아도 이미 내 주위엔 붉은 원형의 경계선이 형성된 상태·
정확히 한 걸음이라도 넘어오는 순간 그는 내가 설계해놓은 살검(殺劍)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굳었던 벨카리온의 얼굴에서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종족이라더니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내 살기에 보답하듯 마왕의 몸에서도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나랑 싸워보고 싶은 거냐 꼬맹아?”
펼쳐진 그의 오른 손에선 마나가 아닌 또 다른 기운이 응집되고 있었다·
결코 인간으로선 구사할 수 없는 마족의 힘·
서로의 준비는 완료되었으며 남은 건 누구의 발이 먼저 떨어지냐는 것이었다·
[일단 묻기는 하겠는데 쟤 누구야?]
잠자코 지켜보던 케이람이 마침내 입을 열고 물었다·
“마왕·”
예상과 달리 그녀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보였다·
[그럼 전생에 내가 영혼까지 바쳐서 소멸시켰단 놈이 쟤란 거네?]
“뭐 근원적으로 보면 그렇지····”
정확히 따진다면 케이람이 소멸시킨 것은 마왕이 아닌 마왕이 가지고 있던 무기 사검(死劍)이었다·
허나 지금 마왕의 손엔 사검이 들려있지 않았다·
손뿐만이 아닌 신체 곳곳을 살펴봐도 검으로 보일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케이람처럼 품에 숨길 작은 검도 아니었기에 분명 가지고 있었다면 딱 티가 났겠지·
지금은 없는 상태라 이건가?
[그래서 그런 엉망인 몸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고?]
사실 없다 해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솔직히 내 몸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에
밤사이 여러 일에 휘말림에 따라 힘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면서 내 몸에 남은 기력은 거의 바닥에 육박한 상태였다·
알게 모르게 케이람을 쥔 손에선 미세한 떨림까지 일고 있었다·
이거 도박으로 걸기엔 너무 솜털만한 확률인데····
과연 지금의 난 저 마왕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팍!
“···?”
그런 도중 갑자기 마왕의 손에 응집되었던 힘들이 한 순간에 소멸해 버렸다·
당황한 마음에 고개를 치켜들자 그는 나를 향해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됐다 됐어· 밤톨만한 꼬마랑 싸워서 뭘 한다고···· 해코지 안 할 거니까 경계 풀어 꼬맹아·”
눈에 한가득 차올랐던 살기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
긴가민가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방심할 순 없었다·
검을 더 치켜 올려 경계를 곤두세우니 그 모습을 본 마왕은 급기야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아 진짜 아무것도 안한다니까! 내가 아무리 망나니여도 어린이들은 안 건드려요! 정 안 되겠으면 우리 누워서 이야기 할까? 이렇게? 이러면 안심이 돼?”
마왕이라기엔 참 처량해 보이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애절함이 통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검을 내리고 경계를 풀었다·
“거 어린놈이 의심은 많아 가지고 딱 보니까 나중에 뒤통수는 안 맞겠네·”
“···!”
뒤통수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허나 내색하진 않았고 계속해서 절제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였다·
“그럼 일단 아까 했던 질문으로 넘어가서 꼬맹이 너 인간 맞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쩌다 온 거야?”
“···물살에 휩쓸려서·”
“휩쓸려서 왔다고? 그럼 자의로 온 건 아니란 거네?”
잠시 주저하다가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물어서 대답은 했다만 그는 정말로 아무런 악의 없이 순수하게 묻는 듯 보였다·
“그래 뭐 온 건 그렇다 치고 암튼 너 되게 묘한 놈이다? 보기엔 새파랗게 어린놈이 답지 않은 살기를 잔뜩 품고 있고 정체가 뭐야?”
“평범한 인간····”
딱히 적합한 설명은 없어보였기에 한 말이었다·
“킥! 설마 믿으라고 한 말은 아니지? 평범한 인간이 헬하운드의 피는 왜 먹고 있었어? 그거 너네 주식도 아니잖아· 아니면 너무 배가 고파서 눈에 뵈는 게 없었나?”
“남이 뭘 먹든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기분을 자극시킬 수 있는 맹랑한 답변에도 마왕은 변치 않는 미소를 유지했다·
“거 꼬맹이 되게 툴툴대네· 네 말마따나 뭘 처먹든 상관없다만 적당히 먹으라는 뜻에서 한 말이야· 딱 보니까 한 두 번 먹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다 네 냄새 맡고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잔뜩 꼬일 수도 있다 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별로 놀라진 않았다·
생각보다 덤덤한 내 얼굴에 벨카리온은 꿍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야 꼬맹아· 내가 자랑은 아니지만 난 이래 봬도 네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에서 꽤 권위 있는 마족이거든? 거짓말 안하고 이 마계에 사는 마족들 중 나를 모르는 이는 없을 정도로····”
그렇겠지 마계에 살면서 마왕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될 테니까·
“하지만 꼬맹이 넌 마족이 아닌 인간이고 여기 마계엔 처음 온 거잖아· 그렇지?”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명 나랑은 초면일 텐데 어째 지금 네 얼굴은 되게 묘하다? 좀 전에 경계하던 것도 그렇고 마치 내가 누군지 안다는 것처럼····”
역시 보통눈치가 아니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꿀떡 삼켜냈다·
이와 함께 머리에서 흘러내린 식은 땀 한 줄기가 그대로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너 나 어디서 본 적 있····”
“아니 초면인데?”
물론 이번 생 한정이었다·
물음보다 빠른 대답에 수상할 법도 했지만 그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나도 인간이 처음인 마당에 네가 날 어디서 봤겠냐? 아님 인간이란 놈들은 원래 그렇게 다 무심한 성격을 가진 건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가 마왕과 이런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대화를 할 게 아니라 내 두 다리를 분질러 도주수단을 차단하고 고문과 악행을 일삼아 원하는 것을 얻은 뒤 무심하게 버려져도 모자랄 판에 이런 실없는 대화나 이어가고 있다니····
이 마족 정말 내가 알던 마왕이 맞는 걸까?
“···당신은 여기 왜 있던 거야?”
이 대화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 난 원래 잔소리 심한 어떤 마족이랑 이 근처를 순방하던 참이야· 그런 와중에 이 협곡 쪽에서 요상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딱 와 본 거지· 설마 하니 인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순방?”
“그래 순방! 마왕으로서 내가 군림하는 땅을 순찰 하는 건 기본이지· 사실 귀찮아서 빼먹는 게 일상이지만 이번엔 그 잔소리꾼 땜에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의 얼굴이 급 일그러졌다·
마치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했다가 들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꼬 꼬맹아· 내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마왕으로서 내가 군림하는 땅을 순찰 하는 건 기본이란 거?”
“어 그래 그렇지····”
벨카리온은 뭔가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고 있었다·
“안 놀랍니?”
“뭐가?”
“내 입으로 방금 내가 마왕이란 걸 말했는데 안 놀랍냐고!”
“····”
“너 진짜 나 어디서 본 거 맞지? 그러지 않고서야 암만 세상모르는 꼬맹이라도 마왕이란 말을 듣고도 그런 반응을 보이겠어? 너 엄마한테 말 안 들으면 마왕이 잡아간단 말도 못 듣고 살았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확실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마왕은 내가 알던 그 무자비한 마왕이 아니었다·
마왕조차도 태생부터 악하지는 않았다는 건가?
내가 앞으로의 역사를 크게 바꾸지 않는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마계 군단의 침공은 예정되어 있을 터·
이렇게 수수하고 털털한 모습이 마왕의 원래 본성이었다면 대체 무엇이 그를 변모하게 한 것일까?
결국 난 그렇게 변한 마왕과 또 다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진짜 보면 볼수록 되게 묘한 놈이네? 암튼 너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이 강을 거슬러 가면 되는 거냐?”
“그럴 예정이야·”
“그래 맞지도 않는 곳에 오래 있어봐야 불편할 뿐이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다 꼬맹아· 헬하운드들 잡는 꼬라지 보니까 딱히 걱정은 안하겠다만 어쨌든 조심히 가라·”
조심해서 가라는 친절한 배웅까지 받아버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
살아 돌아갈 수는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조금 전과 달리 너무 싱겁게 끝난 느낌이다·
미약하게 남은 경계심과 함께 몸을 돌렸지만 어째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당신····”
“음?”
“당신이 정말로 마왕이라면···”
입안에 고인 마른침이 삼켜지고 심장에선 요란스런 방망이질이 이어진다·
고개를 돌려 또 한 번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마왕으로서 뭘 하고 싶은 거야?”
실로 많은 것을 내포한 질문·
더 나아가 앞으로의 내가 이 마왕이란 존재와 어떻게 엮이게 될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벨카리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꼬맹이 이제 보니 당돌한 게 아니라 맹랑한 거였구나?
줄곧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마침내 발을 떼고 내 앞으로 다가온다·
열 보의 거리는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 사이의 거리까지 좁혀졌다·
“마왕으로서 뭘 하고 싶냐고?”
내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장신의 육체가 고조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별거 있겠냐? 그냥 내 밑에 사는 놈들이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지· 그게 왕으로서 해야 되는 역할이니까··· 하지만!”
혈기어린 마왕의 눈동자가 한 순간 크게 번뜩이면서 억제되어 있던 내면의 살기들이 잔뜩 표출되었다·
입가엔 광대가 승천할 만큼 실로 섬뜩한 미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그걸 방해하는 놈들이 있다면! 방해를 넘어서 피해를 끼치는 놈이 있다면! 감히 내 땅을 침범하고 내 종족들에게 해를 끼친 죄를 물어 모조리 괴멸시킨다! 그게 이 땅의 주인이자 마왕인 나의 의무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마왕 벨카리온의 잔혹한 진면을····
지금은 알 수 없는 여러 족쇄가 그를 억제하고는 있으나 그 족쇄는 언제든지 풀릴 수 있으며 그날은 세계에 혼란이 도래하는 날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 예정된 미래를 내가 막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
다만 마음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만큼은 뚜렷하게 잔재할 뿐·
“마왕 나랑 거래 하나 하지 않겠어?”
“거래?”
난데없이 거래를 하자는 말에 벨카리온은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당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그건 마왕 당신의 현재 마음가짐을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올 거야· 마치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내가 멀쩡한 세상을 굳이 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건 당신은 그 일로 인해 지금이랑 180도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거야· 그리고 당신의 변화로 인해 우리 인간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겠지····”
내 말이 허풍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듯 그 또한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내가 너희의 땅을 침공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러니 거래를 하자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의 땅으로 넘어오진 말아줘·”
마왕은 코웃음을 쳤다·
“하! 꼬맹이 너 뭐 예언자 그런 거냐? 다짜고짜 거래를 하자는 것도 웃긴데 너희의 땅으로 넘어오지 말아달라고? 좋아 내가 넘어가질 않으면 꼬맹이 넌 나한테 뭘 해주겠다는 거지?”
“도와줄게·”
도와준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도와줘?”
“뭐든 다· 당신에게 닥친 모든 위기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도와줄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마왕은 아무런 말없이 잠시 동안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가 입을 열기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꼬맹이 너 이름이 뭐냐·”
“시안 베르트·”
“시안 베르트라···· 좋아 마계의 주인으로서 약속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의 땅을 침공하지 않겠다·”
마왕은 순순히 내 거래에 응해주었다·
“하지만 뭐든 도와준다는 그 말 분명히 책임져야 할 거야· 난 애나 어른이나 약속을 안 지키는 놈들을 무지 싫어하거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래가 과연 멀지 않은 미래까지 이어질 진 모르겠지만 기어이 다시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적어도 마왕과 검을 부딪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건 그와 다시 만나는 일이 없는 거겠지····
나는 다시금 전선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