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새로운 질서를 위해 (4)
금빛의 성스러운 기운을 발하는 성검의 힘·
쿤델은 그 힘이 담긴 기사의 검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신의 힘이라고·
정말 평생을 마법에 전념했던 자신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쿤델은 기사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떠한가?”
“무얼 말씀이신지?”
“지고한 신의 힘을 물려받은 소감이 어떠냐는 말일세”
기사는 잠시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이다가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무기력해진 느낌입니다·”
“무기력하다?”
“예· 저 역시 평생을 수련에 정진하며 검과 마법을 단련해왔지만 이 힘 앞에선 정말 이름조차 내밀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제가 지금껏 삶아온 삶의 두 배 아니 세배는 더 산다 해도 이 힘이 가진 경지에는 못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스스로 굉장히 무기력해졌습니다·”
기사는 실로 솔직한 감정을 표했다·
그는 퀴젤 가 내에서도 많은 기사의 존경을 받으며 전선의 상급 기사에 웃도는 능력을 갖춘 상급 기사였다·
“아마 저 말고도 이 힘을 전승받은 다른 기사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저희는 신의 경지에 이르기에 한참 역부족이라고····”
쿤델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하면 그 역시 신이 그래서 신인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 정도였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으로선 아직 창조주인 신의 경지에 이르기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했다·
“일주일 뒤 황실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제국에 공식적으로 선언한다고 합니다·”
곁에 있던 퀴젤 공작이 덧붙이듯 설명했다·
“뭐 어차피 황제 폐하도 아닌 비올렛 황녀가 할 테지·”
“아닙니다· 아린 황녀님께서 하신다고····”
급 미간을 찌푸린 쿤델이 피를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린 황녀가 대표로 선언한다고?”
“예· 아무래도 그동안 아린 황녀가 제국을 전전하며 여러 자선 활동을 해온 만큼 그녀를 내세워 대중들의 혼란을 방지하려는 의도 같습니다· 오히려 비올렛 황녀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이라고 합니다만····”
쿤델의 얼굴이 돌연 심각하게 굳었다·
제국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벤트에 아린 황녀를 얼굴로 내세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비올렛 황녀가 모를 리는 없을 터·
쿤델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아린을 대표로 내세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강하게 맴돌고 있었다·
* * *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끝나고 점차 깊어지는 황궁의 밤·
검은 하늘에 뜬 달을 벗 삼아 남은 집무를 보는 그녀에게 레시무스가 다가와 서신 하나를 건넸다·
“뭐야 이건?”
서신엔 발신자가 적혀있지 않았다·
“여기 오던 도중 보리스님을 만나 받은 것입니다· 가급적 최대한 빨리 전해달라고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황궁 안에서 갑자기 서신이라니?
아린은 조금 의아한 마음과 함께 바로 서신을 뜯어 확인해보았다·
“···?”
서신을 읽은 아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황녀님?”
“이 이게 대체 무슨 말···?”
-똑똑
이내 노크와 함께 밖에서 있던 시종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니그리티 백자가의 장녀 시리카 니그리티입니다·”
다소 늦은 시간의 난데없는 방문이었다·
허나 이에 놀랄 새도 없이 아린은 보리스가 전한 서신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일단은 들어오시라 해·”
허가가 떨어지자 곧 시리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은 시간에도 만남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아린은 조금은 얼떨떨한 반응과 함께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지난번에는 제가 경황이 없었죠? 갑자기 모셔 온 것도 모자라 멋대로 가버리기까지 했으니· 저로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그만큼 황녀님께서 제국을 위해 바삐 움직이신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오늘 보여준 모습도 정말 멋있었습니다·”
“정말··· 이신가요?”
“네· 목적이야 어쨌든 정해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의연하게 처리하신 모습이 제게는 크게 와닿았습니다· 진심으로요·”
옛 스승의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린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잠깐 나가 있어 줄래 레시무스?”
뭔가 둘만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아린은 레시무스를 밖으로 내보냈다·
“니그리티 가에선 성검의 힘을 받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전에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저희 쪽에선 성검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만은 아니라는 거 압니다· 전 다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여쭤본 거예요·”
시리카는 대답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그럼 저도 황녀님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뭐 그러세요·”
아린은 문제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황실이 추진하고자 이번 계획에 황녀님의 생각이 얼마나 반영되셨나요?”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올렛 언니는 이런 절 지지해주시고 보리스 선생님과 에쉘 공께선 여러모로 방향을 제시해주셨죠·”
아린은 한 점의 부끄럼 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엄연히 제가 했다고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검은 안개에 대해 처음 의문을 제기한 것이 바로 저였으니까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7년 전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직접 설명하는 대신 아린은 7년 전의 일을 언급했다·
이에 시리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께선 이전의 제게 빛이 과연 우리의 질서를 이끌어줄 수 있는 매개체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의문이야말로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촉진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 결국은 세상을 움직일 만큼 커질 수 있는 것이시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린으로선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잠시 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시리카의 물음에 아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니그리티 가문은 아시다시피 유서 깊은 학자 집안입니다· 그로 인해 전 어릴 적부터 많은 서적과 고서를 통해 여러 지식을 접할 수 있었죠· 아마 저도 황녀님과 비슷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왜 빛을 숭배해야 하고 안개를 배척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것이····”
의외의 사실을 접한 아린은 눈을 번뜩였다·
“그게 정말이신가요?”
“네· 그래서 한 번 깊게 파고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검은 안개의 원천은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을 배척해야만 하는 건 무엇인지 작게 피어올랐던 의문은 점차 흥미와 관심으로 이어졌고 전 그렇게 알아낸 것들을 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린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기세에 눌리기라도 한 듯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선 제가 탐구했던 안개에 관한 서적과 자료를 제가 보는 앞에서 불태울 정도로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셨죠· 그러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빛이야말로 우리를 이끌어나가는 근원이라고 안개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될 부정의 존재라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실로 날카롭고 차가웠다·
이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그 인자하고 따뜻했던 교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나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날 제가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빛에 미친 광신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죠· 이렇게까지 빛을 맹신하고 안개를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안개를 향한 제 의문은 곧 빛을 향한 거부감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 거부감은 이내 더한 의문으로 진화되었죠·”
시리카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린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입을 넘어 몸조차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그러한 의문은 제가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면서 모두 해소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에 따라 제가 나아가야 하는 진리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시리카는 곧 한권의 책을 꺼내 아린의 앞에 내보였다·
황실이 제국의 각 수도원으로 뿌렸던 안개의 교서였다·
“안개의 진면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힘을 주면 그 본성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하지만 잘못 짚으셨습니다· 검은 안개는 빛처럼 신념이나 결속 같은 것으로 강해지지 않습니다·”
시리카는 기이한 냉소와 함께 아린에게 더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조건적인 신념이 좋다고 보시나요? 아닙니다· 그건 도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의심하고 부정해야지만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순간 믿지 못할 것을 본 아린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한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린 시리카의 손바닥에서
미지의 검은 안개가 살며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의 원천은 내면의 분노 시기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동반될 때 그 힘이 더욱 커지게 돼 있습니다·”
피어오른 안개를 시리카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린 황녀님께선 그동안 제국을 돌아다니시며 많은 자선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평판도 매우 높으실뿐더러 일각에선 아린 황녀님께서 황제가 되길 바란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굳은 시선이 다시금 아린에게 향했다·
“아퀴젤에서 시안을 만나셨죠?”
“···!”
“시안은 황녀님을 죽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그 이유를 혹시 아시겠습니까?”
아린은 입술만 벌벌 떨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엔 없던 정이라는 감정을 황녀님께 품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이지요·”
시리카의 떨고 있는 아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정을 품은 황녀님이 저희의 손에서 잔혹하게 죽는다면····”
“···!”
“저희의 계승자가 그런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채 비로소 진정한 각성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때야말로 저희가 원하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게 되겠죠·”
-스스스
“그 시작을 위한 제물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아린 황녀님·”
그녀의 몸에서 내내 감춰져 있던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그 안개에 전신이 사로잡힌 아린 황녀는
“···!”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잠식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황녀님?”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레시무스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지만 이미 안에는 대답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벌컥!
황급히 문을 열어젖힌 레시무스의 눈에 보인 것은
“···!”
아린과 시리카가 대화하고 있던 자리에서 점차 사그라지고 있는
미지의 검은 안개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