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황녀와 암살자 (4)
-깡!
검 끝을 타고 전해오는 거센 진동이 손목을 강하게 자극했다·
애초에 검이 사람의 몸을 파고들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것도 이상하지·
지금 케이람의 칼날은 아린 황녀의 살집이 아닌 척박한 돌바닥에 닿아있다·
그래·
못 찔렀다·
안 찌른 게 아니다·
엄연히 말해 못 찌른 거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이번엔 빗나가지 않도록 목표를 제대로 겨눴겠지만
못 하겠다·
그냥 내 머리와 몸 전부가 그녀를 죽이지 말라며 거부하고 있다·
“····”
입에 내뱉는 것조차 거북한 비속어들이 속에서 어지럽게 난무했다·
뭐 이제 와 동정심이 발휘되기라도 했냐고?
나란 놈에게 애초에 정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정을 줄 사람은커녕 그 감정이 생길 일조차 없었지·
그래서 내가 인간 취급도 못 받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 분명 전생엔 그래왔었지·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현생에선
안타깝게도 그 정이라고 하는 지랄 맞은 감정이 내게 생긴 것 같다·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지·
허나 나란 놈은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며 부정해온 것이다·
그걸 지금에 와서야 인정하게 된 거지·
이 미련한 황녀로 인해서·
“절 어떻게 구원하시겠단 겁니까?”
움직이지 않는 손 대신 입에서 나도 모르게 물음이 튀어나왔다·
황녀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생각했어· 빛을 걷어내는 안개라는 게 정말로 나쁜 것인지····”
의문·
사람이 어떤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가장 근원이 되는 마음이다·
나를 구원하겠다는 그녀의 마음 역시 이런 의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네가 그동안 내게 보여줬던 모습은 물론 안 보여줬던 모습이 더 많았겠지만 난 지금도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내게 있어 너란 안개는 분명 도움이 되는 존재였으니까·”
이제는 미련하단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래 당신이 내 진면을 처음부터 봤다면 저런 같잖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몰랐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거다·
거기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내 진면을 알지 않는가?
살생을 서슴지 않게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아무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그런 무자비한 암살자 말이다·
“너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 나같이 미련한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그러니 분명 그런 일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그 길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
말을 잇는 황녀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그러더라? 무언가의 진면을 알아보려면 그 무언가에게 힘을 주면 된다고· 그럼 자연스레 그 본성이 드러난다고 했어·”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인간은 더 그렇지·
태생적으로 나약함을 갖고 태어난 인간은 힘을 가지면 그 나약함 속에 감춰져 있던 본성이 샘솟게 된다·
그래서 제국 곳곳에 가짜 교서들을 뿌리고 다녔나?
내가 속해있는 안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제 진면이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황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제 진면은 지금 황녀님께서 보고 계신 모습 그대롭니다·”
황녀는 눈을 찌푸리며 부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황녀님께서 나아가고자 하는 세상에는 필요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그런 놈이란 말입니다!”
감정에 잠식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선에서의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던 진짜 내 모습·
당신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나다·
“네가 바라는 세상은 뭔데?”
황녀는 그런 나를 보며 또 한 번 물었다·
“네가 바라는 세상에 난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다시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설명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서가 아닌
그냥 할 말이 없어서였다·
“···!”
불현듯 등 뒤에서 느껴진 시린 살기에 바로 검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챙!
“꼭! 이렇게 하셔야만 했던 겁니까!”
분노와 증오로 뒤엉킨 격렬한 눈빛이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아린 황녀의 기사 레시무스 클라인·
혈우에 적셔지기라도 한 듯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전신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역시 대륙 제일 검의 정신이라 이건가?
생명은 지장은 없더라도 분명 까딱하는 것조차 고통에 힘겨워할 부위들만 골라서 찢어놨다·
내 장담하는데 그녀는 지금 온몸의 수십 자루의 칼이 꽂히는 것보다 더한 아픔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걸 기어코 감내한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달려와 나를 막겠답시고 달려든 것이다·
어느새 주위엔 영지 기사뿐만이 아닌 소란을 듣고 사람들까지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당신이 황···!”
황녀라는 말이 언급되려는 순간 레시무스의 입을 바로 틀어막았다·
그러곤 신음 외엔 어느 소리도 못 나오도록 거세게 옥죄였다·
“크으윽!”
레시무스는 그런 와중에도 나를 향한 분노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덤덤하게 쳐다보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망토를 벗었다·
-펄럭
벗은 망토는 쓰러져 있는 황녀의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곧 황녀의 몸과 얼굴은 내 망토를 통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되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손을 내리며 레시무스를 놓아주었다·
“···!”
레시무스는 숨 쉴 새도 없이 바로 황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 괜찮으십니까!”
망토에 둘러싸인 채 간신히 몸을 일으킨 황녀는 나를 보며 굉장히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심하게 등진 채 그 자리에서 발을 뗐다·
“왜··· 살려주는 거야?”
속삭이듯 속삭인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물음이 차가운 밤바람을 타고 내 귀에 전해졌다·
물론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생각은 없다·
설사해 줄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난 어떠한 말도 그녀에게 할 수 없었다·
뭘 해봐야 그녀에겐 같잖은 희망만 주는 것일 테니·
* * *
“뛰어!”
오밤중에 급히 중무장을 마치고 현장으로 뛰어가는 기사들·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굉장히 심각했다·
“거리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여관을 나온 하스티아와 가르니안은 난데없이 나타난 기사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도 자연스레 그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이윽고 도착한 거리의 한 지점·
소란을 듣고 나타난 사람들과 이를 통제하는 기사들 사이로 누군가가 부축받는 모습이 보였다·
‘···!’
하스티와 가르니안의 눈이 동시에 번뜩 뜨였다·
모여든 무리 속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는 두 여성·
불과 몇 시간 전 자신들을 찾아왔던 우시프 제국의 황녀 아린과 그녀의 수호 기사 레시무스였다·
특히나 레시무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서 있는 것조차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 들 만큼 전신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고 그런 그녀의 부축을 받는 황녀는
‘저건?’
하스티아에게 있어 매우 낯익은 무언가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틀림없다·
저것은 본인도 한 때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몸에서 떼지 않았던 누군가의 망토·
시안의 것이었다·
이에 하스티아는 급히 소울 스톤을 꺼내 보았다·
이제는 보는 것조차 불길함을 느낄 만큼 훨씬 더 강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소울 스톤·
그 기운에 끌리기라도 하듯 하스티아는 갑자기 몸을 틀고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스티아님?!”
가르니안 역시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거리와 민가를 지나 인적이 없는 어느 숲속 한가운데에 도착한 둘·
-졸졸졸
곧 그들의 뾰족 솟은 귓속으로 청아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물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엔
“저 남자는?”
하스티아에게 있어 매우 친숙한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안님?’
둘을 등진 채 눈앞에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시안이었다·
분명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스티아로선 반가우면서도 의문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니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예? 하지만····”
가르니안은 등진 시안의 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 남자 전과 다르게 지금 상태가 굉장히 불안해 보입니다· 자칫 하스티아님에게····”
‘괜찮아요· 그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가려는 거니까·’
가르니안을 못내 안심시킨 하스티아는 옅은 미소을 지으며 시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뵙네요· 시안님?’
반갑게 정신 감응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하스티아는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굳게 감긴 눈과 닫혀버린 입·
마치 앉은 상태로 잠에 빠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태에 어쩔까 하고 고민하던 순간
-파악
시안의 눈이 갑자기 번쩍하고 뜨였다·
당황한 하스티아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걸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시안은 하스티아의 목을 그대로 붙잡았다·
“하스티아님!”
놀란 가르니안이 황급히 달려오려는 순간
‘멈춰요 가르니안!’
하스티아는 빠른 정신 감응으로 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하아····”
시안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였다·
그러자 하스티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시안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고·
눈앞으로 다가와 정신 감응을 걸 때까지 그는 차마 자신이 오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곤 뒤늦게 위협 세력인 줄 알고 거친 대응을 한 것이다·
이에 하스티아는 시안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시안은 그녀의 목을 놔주었다·
“너 뭐야?”
‘하스티아에요· 벌써 제 이름도 잊어버리신 거예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일족원들과 함께 프루이나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그러다 날이 저물어서 오늘 하루를 이곳에서 묵기로 한 거고요·’
하스티아는 미소를 잃지 않은 태연한 얼굴로 답을 이어 나갔다·
‘시안님께서 돌려주신 소울 스톤이 평소보다 크게 공명했어요· 그래서 가까운 곳에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와봤어요·’
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하염없이 흐르는 물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절 구원해주신 분이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저희 일족이 비록 인간분들보다 더 오랜 수명을 가졌다곤 해도 한 번 맺은 인연과 정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간직하는 걸요?’
시안은 피식 웃으면서도 좀처럼 얼굴에 묻은 근심을 덜어내지 못했다·
‘아까 이 나라 황실의 일원이라고 하는 아린 황녀님께서 저희를 찾아왔어요·’
시안의 시선은 그제야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다·
“뭐 때문에?”
‘저희 일족이 지키고 있는 구시대의 기록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희로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바로 거절했죠·’
하스티아로선 그녀가 소울 스톤을 보고 놀란 것과 시안의 망토를 가지고 있던 것을 추가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분과··· 어떤 관계가 있으신 건가요?’
대신 그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을 했다·
“····”
‘말하기 힘드시면 안 해주셔도 돼요· 원래 가장 힘들 때 누구 한 명이 옆에 있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된다고 했거든요·’
“····”
‘그냥 속으로 혼자만 말씀하셔도 되고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이대로 가만히 있어 주셔도 돼요· 그냥 전 옆에 있기만 할게요· 힘들 때 혼자 있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으니까요·’
시안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그러면서도 옆에 있어 주겠다는 그녀의 배려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스티아는 더 이상의 아무런 말이나 행동 없이
시안의 빈 옆자리를 그렇게 채워만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시안은 자신의 마음을 옥죄이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