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진짜 추종자 (3)
<이상 위 서신에 적힌 내용은 황실 일가에서 보낸 공문임을 인증합니다·>
<발신인: 아린 세벨러스·>
서신을 확인한 제레온의 미간은 마치 골짜기처럼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
과연 지금 보고 있는 이 서신이 황실에서 보낸 것이 맞는지 무척이나 긴가민가한 상황·
허나 서신 맨 아래에 찍혀있는 황실의 인장은 진짜였다·
현역 시절 수백 수천 장의 공문을 받아본 자신이 보장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원장께선 순전히 황실의 명을 따르기 위해 안개의 교전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 말인 것이오?”
“예! 그 교서도 엄연히 황실에서 보낸 것입니다· 전 이런 책이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수도원장은 그동안에 쌓인 설움이 폭발했는지 넋두리를 쉼 없이 쏟아냈다·
“아무리 황실의 명이라지만 저라고 뭐 안개의 교리를 전하는 데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그냥 루멘델님께서 내린 시련이라는 마음에 눈물을 머금고 했을 뿐입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였겠죠!”
그의 말에 따르면 황실의 공문을 받은 곳은 비단 이 수도원만이 아니라고 했다·
사페른을 비롯한 제국의 수도원이란 수도원엔 전부 전해졌을 것이며 올바른 빛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니 어떤 의심도 품지 말라는 경고까지 함께 받았다고 했다·
“기분은 어떠셨소?”
“기분이라니요?”
“빛의 수도사로서 안개의 교리를 전한 기분이 어땠냐는 것이오?”
수도원장은 두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말해 뭐합니까? 끔찍했죠!”
진심 어린 감정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레온의 눈엔 불신이 가득했다·
“스무 살 적부터 수도원에 들어와 루멘델님을 모신지 어언 30년입니다! 그런 교서 좀 읽는다고 해서 제 신념과 가치관이 변하기야 하겠습니까?”
확실히 틀린 말은 말이었다·
사람의 한 번 정해진 신념은 비비꼬인 나무줄기와도 같기에 쉽게 뒤틀리지 않는다·
“뭐 그래도 다른 사람들까지 그럴 거란 장담은 못 할 것 같지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뭐랄까요? 이상보다는 현실에 더 집중된 느낌? 솔직히 저희가 전하는 빛의 교리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자극하는 교리라는 것엔 분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의 교리를 들으러 오는 신도들의 수도 점점 더 늘어갔고요·”
제레온과 수도원장의 시선은 자연스레 탁상 위에 놓인 교서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뒷면 아래에 적힌 글씨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원장은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저자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모릅니다· 디오 하펜커스라는 이름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예?”
“아니오· 그러고 보니 신도들은 어떻게 모은 것이오?”
“아 그건 황실에서 공문과 함께 보내진 비밀 수신호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인데····”
수도원장은 두 손을 모아 허공을 쥐고선 그 사이로 바람을 후 불었다·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이오?”
“안개에 영혼을 불어넣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이 수신호를 통해 수도원 뒤쪽 공간에 신도들을 불러모아 교리를 전했지요· 오늘도 평소처럼 무난히 흘러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난데없이····”
“진짜 안개의 추종자가 나타났다는거군·”
수도원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정말 사지가 잘려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악마의 눈을 마주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을 정도로요·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합니다·”
자신들을 사칭하는 세력을 잡아다 심판해도 모자랄 판에 그 진짜 추종자는 황실에서 보낸 교서를 탈취한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제레온은 그 교서를 술집에서 어느 이름 모를 사내로부터 받았다·
그 말인즉슨 그 사내가 바로····
“안개의 교리를 전한 지는 얼마나 되셨소?”
“한 2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한데 그건 왜?”
“2주면 뭐 어느 정도 다 통달한 수준이겠군·”
말을 이해하지 못한 수도원장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제레온은 꺼낸 교서를 다시 품으로 집어넣었다·
“책은 좀 더 빌리도록 하겠소· 내가 아직 다 안 읽어서 말이지·”
“저 저희를 지켜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레온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눈을 번뜩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한테 뭘 바라는 것이오? 그대들 곁엔 항상 지고하신 루멘델님이 계시지 않소? 그분께서 지켜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곤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나가는 동안 구원을 울부짖는 수도원장의 호소가 들려왔지만 제레온은 귀만 후빌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수도원 정문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마크가 맞이해주었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어째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야 할 것이 더 많아진 기분이지만····”
제레온은 씁쓸한 표정과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더욱 시커먼 밤하늘은 그 흔한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짜 추종자라· 그 귀 큰 여자가 허용할만한 짓거리는 아닌데 여러모로 참 의외로군·”
“기사단에 서신이라도 보내 볼까요?”
“됐네· 자네나 나나 그 여자랑 뭐 좋다고 다시 엮이겠는가? 그냥 우리끼리 알아보는 게 낫다고 봄세·”
제레온은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마크 역시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자네 먼저 돌아가도록 하게· 따로 갈 데가 좀 있어·”
“이 야밤에 어딜···?”
“나도 모른다네· 그저 기운이 흘러가는 데로 갈 뿐이지·”
얼떨떨해하는 마크를 홀로 남겨둔 채 제레온은 어딘지 모를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골목길·
수도원 쪽에선 보지 못했던 낯선 검은 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소 음산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레온은 아무런 내색 없이 골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딱히 경계할 필욘 없네· 아까와 다르게 이번엔 나 혼자 왔거든·”
허공에 대고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거 젊은이 속고만 살았나? 자네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지금 이 근방엔 나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이번에도 반응이 없는 건가 싶은 순간
-스스스
무성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그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사내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제레온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짙은 흑발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기묘한 기운의 사내·
아까 전 술집에서 만난 바로 그 사내였다·
“더 들려줄 이야기라도 남으셨나?”
사내는 세상 무심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아온 일대기라면야 뭐 3일 밤낮을 새도 부족하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우리 사이엔 나눌 이야기가 꽤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제레온의 넉살스러운 대답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자네 안개의 추종자지? 수도원에 있는 가짜들이 아닌 진짜 안개의 추종자 말이야·”
사내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네나 나나 이 책에 관해선 오늘 서로 처음 본 것 같은데 안개의 신도를 사칭하는 세력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 도시에 왔나?”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사내는 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자네에겐 신뢰를 먼저 줘야 할 것 같군· 그럼 뭐든 좋으니 나한테 물어보게나· 어떤 질문이든 내 성심성의껏 답변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사내의 시선엔 여전히 불신과 의심이 가득했다·
“어려워하지 말고 물어보게· 자네 역시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기운을 남긴 것 아니었나?”
사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심한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짧은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생각을 정리한 사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그들을 쫓으려 하는 거지?”
“내 술집에서도 말하지 않았나? 죽음이 머지않은 늙은이의 못다 한 한이라고나 할까? 난 단지 자네들에 해서 알고 싶을 뿐이야· 황실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가짜들이 아닌 진짜 검은 안개를 추종하는 자네들을 말일세·”
황실의 계획이라는 말에 사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순간을 캐치한 제레온은 바로 말을 이었다·
“아직 자네도 모든 걸 다 알진 못했나 보군· 그럼 어떤가? 나랑 거래를 하지 않겠나?”
“거래?”
“그래 거래! 과거에 뭘 했고 지금 소속이 어디든 간에 상관없이 우린 지금 목적이 같지 않은가? 서로가 모르는 걸 알려주고· 아는 건 보충해주는 지극히 간단한 거래라네· 어떤가?”
“거절하지·”
사내는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부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유는?”
“내가 더 손해 보는 느낌이라서·”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흠· 역시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로군· 좋아· 그럼 이번에도 내 쪽에서 먼저 선의를 베풀도록 하지·”
제레온은 술집에서 받았던 교서를 꺼내 보였다·
“자네 이 책을 누가 만들었는진 아나?”
“···?”
두말할 것 없이 책 뒷면에 적힌 이름의 주인일 것이다·
허나 제레온은 생각했다·
그 디오 하펜커스라는 인물의 정체를
사내는 모를 것이라고·
“자네의 눈빛을 보아하니 딱히 알고 있는 것 같진 않군 뭐 당연할 거야· 이 땅 위에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테니까·”
“그 말은 즉 당신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레온은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물론이지! 하펜커스라는 이름은 말이야· 그 먼 옛날 이 땅에 혼돈을···!”
순간 뒤에서 낯선 기척을 느낀 제레온은 급히 눈을 돌렸다·
허나 눈동자만 돌아갈 뿐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
시야 양쪽으로 퍼지는 미지의 검은 안개·
얼음에 닿은 듯한 싸늘한 감촉이 그의 목덜미를 시리게 자극했다·
제레온의 주름진 목을 감싸 안은 새하얀 손길·
손끝엔 단검을 빼다 박은 것 같은 붉은 손톱이 바짝 선 핏줄을 노리고 있었다·
“아 아가씨·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달라졌구먼?”
손길의 정체를 파악하고선 급히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뭐 하는 짓이야?”
흑발 사내의 입이 대신 열렸다·
그의 시선은 제레온이 아닌 그 뒤에 있는 여인을 향해 있었다·
* * *
예상 밖의 상황이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난데없이 실체화해 노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다·
같잖은 위협이나 하잡시고 저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케이람의 눈은 당장이라도 저 노인의 목을 딸 수 있을 만큼
살기에 버무려져 있다·
“묻잖아· 뭐 하는 짓이냐고?”
두 번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케이람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
그저 신경 쓰지 말라는 무언의 시선만 보낼 뿐·
이에 케이람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는 순간
“크윽!”
그녀가 노인의 목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전후 사정 상관없이 죽이려는 것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면서 술식을 외쳤다·
“암무 9식: 마검 제어!”
[···!]
급 두통이 밀려온 케이람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턱!
노인의 목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붙잡는 동시에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받아냈다·
살기 어린 눈엔 무언가에 대한 못마땅한 기색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세 번째로 묻는다· 말해· 뭐 하는 짓이야?”
[뭘 뭐해? 노망난 늙은이 목을 잡아다가 분지르려는 거지· 보고도 몰라?]
“그러니까 그걸 왜 갑자기 네가···?”
[내 마음이야!]
나도 모르게 입이 멈춰버렸다·
[내 마음이라고!]
왜지? 왜일까?
내 눈에 담긴 케이람의 모습에 너무나도 낯선 것이 담겨있다·
분노와 살의 그리고 그 안에 자그맣게 담겨있는 알 수 없는 두려움·
그 복합적인 감정들이 지금 그녀의 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