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가짜 추종자 (2)
빛의 유적·
구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손으로부터 만들어진 창조물·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로선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의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
루나브는 하스티아가 누워있었다던 제단 위로 마나와 함께 손을 얹어보았다·
-우우웅
허나 눈에 띄는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미한 공명만이 일어날 뿐이었다·
이에 제단 밑으로 내려오는 그녀를 슈르츠가 맞이해주었다·
“버 벌써 끝나신 겁니까? 루나브님?”
“끝나긴커녕 시작조차 못 했어요· 아무래도 이 유적은 제가 힘을 쓰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에요·”
루나브의 손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소량의 마나가 계속해서 발현 중이었다·
리플레이(Replay)를 통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확인하려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녀의 힘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성녀란 여자는 자신이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자였다고 했었는데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엘프가 왜 인간의 영역에서 성녀 노릇을 했던 걸까요?”
빛의 성녀 네프로디테 아이리스·
빛의 기사단의 실질적 맹주이자 지고한 신의 목소리를 처음 전달한 존재·
그녀는 60여 년 전 이 땅에 안개의 신도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젊음을 유지해왔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자신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나 가면 속에 감춰진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는 법·
그녀는 인간이 아닌 화이트 엘프였기에 나이를 먹지 않은 것이었다·
“예 예전부터 그런 말도 있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신의 성정을 가장 닮을 피조물이라고···· 신의 피조물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요?”
“바른길이라· 누가 그걸 바른길이라 정한 거죠?”
루나브의 단호한 되물음에 슈르츠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금의 평화를 유지해주고 있다는 그 빛의 질서가 과연 우리가 알지 못한 구시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걸까요?”
슈르츠로선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그 네프로디테란 여자는 알고 있었다고 봐요· 그러니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이런 유적을 알아서 찾아온 거겠죠·”
“그럼 그 성녀란 자를 데리고 좀 더 심문을 해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문해봤자 어차피 알아들을 수 없는 찬양만 남발했겠죠· 아쉽게도 전 직접 본 것만 믿는 성격이라서요· 그리고 그 여잔 아마 살아서 제국으로 못 돌아갔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신지?”
“협상 때 봤던 아린 선배 아니 아린 황녀의 눈빛이 영 심상찮았거든요·”
루나브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슈르츠는 의문스런 마음에 고개만 갸웃했다·
“그래서 이번엔 용병 경험이 풍부하신 슈르츠 씨의 힘을 좀 빌려볼까 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불현듯 슈르츠의 뒤로 학회원 한 명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는 문서 한 장이었다·
“···!”
문서를 확인한 슈르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루나브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루나브는 늘 그렇듯 한결같은 눈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문서 맨 위엔 검은색의 ‘미스트’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걸까?’라는 질문엔 보통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는 이런 짓을 벌여도 괜찮을 만큼 대비방안이 철저하게 구비돼있는 경우고
둘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지성으로 행한 경우다·
근데 내가 볼 때 지금 상황은 후자다·
이 겁에 질리다 못해 기절 직전인 수도원장의 얼굴을 봐라·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
검은 안개의 추종자를 사칭하면 진짜 검은 안개의 추종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자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이런 놈은 끌고 가서 고문을 해봐야 얻을 것도 없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교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으로 향했다·
언뜻 교서처럼 보이긴 해도 책 전체가 새까매서 뭐 글씨나 제대로 보일까 싶다·
뭐 일단 성당에서 본 교서랑은 확실히 다른 것 같긴 한데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부터 캐봐야 할 것이다·
“원장님 이거 어디서 나셨어?”
“···!”
산속의 흐르는 물처럼 말을 술술 쏟아낼 땐 언제고 지금은 입 벌린 벙어리가 돼버렸다·
자비로운 마음에 한 번 더 물어주었다·
“안개의 존재가 묻잖아· 원장님· 이거 어디서 나셨냐고?”
“아 안개의 존재?”
이미 다 눈치챈 마당에 뭘 또 이제 와 깨달은 척을 하실까?
속이 빤히 보이다 못해 다 비칠 지경이다·
“나 나타나셨습니다! 안개의 존재께서 마침내 우리 곁에 나타나 주셨어요! 우리에게 진실된 구원의 길을···!”
-콱!
놈의 같잖은 목을 붙잡고선 내 앞으로 끌었다·
“내가 두 번까진 몰라도 세 번씩이나 참을 위인은 아니라서 말이지· 지금 내가 듣고 싶은 건 같잖은 찬양 같은 게 아니지 않아? 어디 하나가 좀 잘려야 이해를 하려나?”
성대를 붙잡힌 수도원장은 괴로운 신음을 남발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내 오른손 다름 아닌 교서였다·
뭐 책을 준 사람이 이 안에 적혀있다는 건가?
다시금 놈에게 시선을 돌리자
“····”
놈이 기절해버렸다·
-툭
굳이 깨워서까지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기에 그냥 놔버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나에게 가지각색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교인들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경이로워하거나·
제각각인 반응이 꽤 흥미롭긴 해도 뭐 어쩔 것인가?
내 알 바 아닌데·
검은 안개는 애초에 구원이란 단어를 내세울 만큼 그리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하물며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또한 알 이유도 없지·
나는 아무런 방해 요소 없이 그 장소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 *
[너 지금 제정신이니?]
“왜? 뭐 문제 있어?”
[문제 있냐고? 너 지금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인지하고서 묻는 거야?]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관 술집의 2층 테이블 중 하나·
술집이 자랑하는 오늘의 안주를 곁들이며 아까 수도원에서 탈취해온 교서를 읽는 중이다·
뭐 문제라고 할 게 있나?
[되지도 않는 머저리들한테 얼굴이란 얼굴은 다 팔아놓고 이런 곳에서 한가롭게 책이나 읽으시겠다?]
“나름의 역발상이라 생각해·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하다못해 날 찾아다니겠답시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뒤져댈 놈들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지·
[어련하실까?]
케이람은 못내 불만인 듯 나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러다 말 것임을 알기에 그냥 온전히 교서를 읽는 것에 집중하려는 순간
-털썩
그녀가 내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버렸다·
[왜? 뭐 문제 있어?]
그러곤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한 미소를 보였다·
“뭐 하는 짓이야?”
완전실체화를 써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남자가 그것도 술집에서 혼자 있는 것만큼 모양 빠지는 일도 없어· 적어도 난 내 주인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 싫거든? 그러니 어쩌겠니? 이 누나가 술 상대라도 해줘야지·]
그러곤 앞에 놓인 빈 잔에 태연하게 술을 채웠다·
나 혼자 있을 때랑 다르게 주변의 시선들이 하나둘 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아닌 케이람에게·
[하여튼 꽃 예쁜 줄은 알아 가지고· 이래서 내가 웬만하면 안 나타나려 했던 건데····]
어떻게 저런 망언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본인들이 보고 있는 꽃이 싱싱한 장미로 위장한 수백 년 된 할미꽃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이런 내 못된(?)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야 너 지금 무슨 생각 했어?]
“착한 생각·”
내 단호한 대답에 입술을 쭉 내미는가 싶더니 대뜸 채워진 술잔을 거하게 비워버렸다·
“마검도 술이란 걸 먹나?”
[남자도 먹는데 술이라고 왜 못 먹겠니?]
케이람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면서 요염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 글씨나 보일까 싶은 그 까만 책에서 얻은 건 있고?]
나름 얻었다면 얻은 게 있지·
이 책을 지은 사람이 어마어마한 괴짜라는 거·
거짓말 안 하고 이건 빛의 교서 그 이상이다·
그 먼 옛날 미스트의 근원이 되었던 안개의 신도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었다 해도 무방할 만큼 아에르에 대한 개소리를 아주 정성스레 적어놨다·
“소설을 썼으면 아주 크게 성공했을 위인이라는 것 정도? 대체 뭘 보고 살았으면 이딴 걸 글로 적을 생각을 한 건지 이름이나 좀 알고 싶군·”
[저자라고 하면 보통 책 앞면이나 뒷면에 쓰여 있지 않니?]
그 말에 바로 책의 양면을 확인해 보았다·
앞면엔 저자는커녕 책 제목도 적혀있지 않을 만큼 깨끗한 반면
뒷면엔 그냥 봤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맨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나로선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왜 누군데?]
“누군지 말하면 알고?”
[혹시 모르지 않겠니? 이래 봬도 인생을 두 번 산 너보다 몇 배는 더 살았어· 사람을 죽여도 너보다 몇 배는 더 죽였다고·]
뭐 좋은 거라고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하실까?
그래도 케이람의 말마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디오·”
[····]
“들어 본 적 있어?”
[아니· 없는 것 같네·]
평소 그녀답지 않은 빠른 대답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 다른 곳을 돌렸다·
뭐 딱히 더 캐물을 생각은 없다지만·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에 나 또한 다시 교서를 분석하는데 집중하려는 찰나
-털썩
웬 이름 모를 낯선 노인 한 명이 내 반대쪽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러곤 꿍꿍이가 있는 듯한 음흉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술집은 노인이 접대를 하나?”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술집은 아니지· 내 잠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노인은 다짜고짜 내게 물을 것이 있다고 했다·
“그쪽· 조금 전까지 수도원에 있었지?”
“대답해줘야 하나?”
“나 역시 조금 전까지· 수도원에 있었기에 물은 말이라네· 어떤 비쩍 마른 사내들이 자네를 어디론가 끌고 가던데 가서 뭘 했나?”
내 대답은 앞서 말한 것과 동일했다·
“거 젊은이가 보기보다 깐깐하구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런 태도는 좋지 않아·”
헛웃음조차 안 나올 말이었다·
수도원에 있었던 노인이라고?
딱히 기억나는 얼굴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지하 광장에 있었던 교인은 아닌 듯 보였다·
“이 아리따운 아가씨를 앞에 두고도 그런 고리타분해 보이는 책이나 읽고 있다니· 자네 성격이 여간 괴팍한 게 아니군·”
[노인네 아직 눈은 안 멀었나 보네?]
그걸 또 좋다고 받아들이는 케이람이었다·
“언뜻 봐도 그 수도사들이 나누어준 교전이랑은 좀 달라 보이네만 어떤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내게 그 책을 주지 않겠나? 물론 대가는 지불하도록 하지·”
“뭘 내주시려고? 별로 주머니가 두둑해 보이진 않는데?”
“나이를 먹으면 좋은 게 뭔 줄 아나? 주머니가 두둑해지진 않아도 머리만큼은 두둑해진다는 거야· 내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이야기를 듣고서 만족했다면 그 책을 내게 주는 걸세 어떤가?”
이 노인네· 생긴 것과 다르게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다·
뭔가 소싯적에 이름 좀 거하게 날렸을 법한 기세가 느껴졌다·
호기심과 더불어 묘한 흥미가 차올랐다·
“어디 한 번 해보쇼·”
“좋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내 소개를 먼저 해야겠군·”
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당연하겠지만 돈이나 금화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놀랄 일도 없겠지·
노인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문장·
어떤 소속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문장이었다·
나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곳의····
“난 젊었을 적 빛의 기사단에 있었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