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외면 (2)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게 뭔지 아는가?
바로 돌아올 장소다·
어딜 가든 가서 뭘 하든
모든 일이 끝나면 언제든지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그것이 있어야지 진정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반 년 이상·
여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일을 끝내면 지체하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와 내 권솔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적어도 내가 두 눈 뜨고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한 줄곧 그러지 않을까 싶다·
붉은 석양이 서쪽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 하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나나와 나란히 앉으며 지극히 일상적인 자연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파· 나 사실 아까 사람 먹었어·”
“그래?”
이미 오면서 흔적들을 봤던 터라 별로 놀라진 않았다·
“응· 며칠 전부터 계속 집을 찾아와서 나쁜 냄새를 풍기길래 그냥 에밀리 언니 몰래 먹어버렸어·”
“잘했어·”
나는 특별한 반응 없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감촉이 못내 좋았는지 자연스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많이 컸다·
그냥 이 상태로 거리에 나가면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일 것이다·
뭐 빨리 컸다 해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빨리 자란 만큼 빨리 늙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아까··· 봤어?”
“뭐? 편지?”
“봤구나····”
조금 창피함을 느꼈는지 나나는 멋쩍게 웃었다·
“예전에 브라이언을 통해 받았던 거지?”
“응· 아린 언니가 내게 써줬던 마지막 편지였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따금씩 생각이 나· 아린 언니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하고····”
무리는 아니다·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자신에게 호의를 드러냈던 존재를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습성이다·
그 존재와 함께했던 기억이 좋을수록 더더욱 떠올릴 수밖에 없겠지·
“언젠가 내가 브라이언이나 파파의 보호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그땐 나 혼자서 아린 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물론이지·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다·
문제는 그 시기가 오면 아린 황녀는 물론이고 나까지 온전히 살아 있으리라 장담은 못 하겠지만·
-저버저벅
어째 조금 쉴까 싶으면 여지없이 일이 생기는 느낌이다·
우리의 뒤로부터 50걸음·
별로 반갑지 않은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 낯익은 누군가가 찾아오고 있었다·
“····”
잠시 후 나타난 검은 복면의 남성이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미스트의 대원이다·
그는 말없이 내게 까만 종이 문서들을 건넸다·
“당주님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못해도 열 장 이상은 돼 보이는 거로 봤을 때 지령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안에 적힌 내용을 읽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스스로 결정하라는 의미겠지·
나는 받은 문서들을 덤덤하게 읽기 시작했다·
“····”
그러곤 종이 구겨지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7년 전 이른바 ‘안개가 빛을 걷어낸 날’ 이후
당연하겠지만 나 시안 베르트란 존재는 이 대륙에서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의 근원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잠적하였다·
말은 뭐든 해보라고 난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며 큰소리는 쳤지·
하지만 이에 수반될 귀찮은 일을 생각해보니 별로 날뛰어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선 그냥 쥐 죽은 듯이 살아왔었다·
물론 정화 작업만큼은 간간 이라도 꾸준히 해온 덕에 검은 머리의 악마라는 별 이상한 호칭으로 불려 다니긴 했지만·
허나 이 지랄 맞은 세상은 좀처럼 날 가만두지 않을 모양이다·
자꾸 뭔가를 내게 요구하는 기분이다·
내가 구원에 눈먼 멍청이도 아니고 왜 자꾸 이런 걸 내게 들이밀려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터벅터벅
야심한 달이 떠오른 밤·
집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 온다·
어쭙잖은 목적으로 찾아온 밤손님은 아니다·
-탁탁탁!
여유로움이 다분했던 발걸음은 이내 속도를 높인 다급한 발걸음으로 바뀌었다·
-벌컥!
그러곤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도 도련님? 언제 오셨습니까?”
언제봐도 참 어벙하기 그지없는 나의 종자 브라이언이다·
“얼마 안 됐어·”
“그러셨군요····”
브라이언은 못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뭐 하고 온 거야?”
“그 그게 마을로 내려가서 어르신들 일 좀 도와드리고 왔습니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지라 제가 없으면 도무지 일이 진행이 안 돼서····”
“젊은 사람들이 왜 없는데?”
“일자리를 찾겠답시고 전부 큰 도시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뭔가 말하기 찝찝한 거라도 있는 듯 시선을 회피하는 브라이언이었다·
“됐고· 이거나 한 번 읽어봐·”
나는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검은 문서들을 브라이언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은 브라이언은 조심스레 안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냐?”
“예?”
“종종 마을로 내려가서 일하고 있다며? 그럼 사람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대충 듣기라도 할 거 아니야·”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것도 잠시
브라이언은 곧 차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7년 전 도련님께서 본모습을 드러내신 이후 도련님을 비롯해 관련된 모든 것들을 탄압하고 악으로 규정하는 움직임이 더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한데 그와는 별개로 도련님을 추종하는 움직임도 요즘 적지 않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최근 마을에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안개의 신도가 되기 위해서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 오고 있습니다·····”
“안개의 신도?”
차마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선 반응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예· 저도 듣고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것이 정녕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을까 생각마저 들 정도로····”
[어머? 우리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지지 세력이 생겨버렸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어느새 나타난 케이람이 웃으며 말했다·
허나 그리 재미있게 웃을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당주가 전해주라 했던 이 문서에도 브라이언이 말한 것처럼 제국 곳곳에서 안개의 신도들을 자청하는 세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적혀있었다·
이들은 기존에 세워진 빛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고 했다·
웃긴 건 그걸 제국 측에서 크게 탄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탄압은커녕 마치 세력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는 듯이 맹목적으로 방관만 하고 있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문서 끝에 적힌 마지막 문장이 너무나도 가관이었다·
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의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아린 황녀라고·
* * *
“···!”
초점을 잃었던 성녀의 눈에 빛이 돌아오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정신이 좀 드시나요 성녀님?”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의 앞엔 다름 아닌 아린 황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안심하세요· 이곳은 제국입니다· 가람 왕국에서 정신을 잃었던 성녀님을 모셔왔습니다· 지금은 세벨리너스로 이동 중이고요·”
네프로디테는 아직 몽롱한 머리를 붙잡으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있는 커다란 마차와 그 안에 있는 둘·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아린 황녀님께서 오셨나요?”
“제가 자처했습니다·”
“무슨 이유로요?”
“황녀로서 제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네프로디테의 얼굴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어디까지 들으셨나요?”
그녀는 자신을 빼내는 과정에서 분명 모종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아린은 침착한 눈빛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무엇을 들었다 해도 그걸 다른 곳에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물며 성녀님께서 화이트 엘프였다는 것까지도 말이죠·”
“···!”
네프로디테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누구나 살면서 하나쯤은 비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 비밀을 묻어두고 무엇을 위해 나아갔냐가 중요한 것이겠죠· 항상 제국의 번영과 대륙의 평화를 기원해주셨던 성녀님의 공을 전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로 인해 이렇게 됐는지도 아시는 건가요?”
아린은 대답 대신 침묵으로 화답했다·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네프로디테는 본인이 묻고서도 바로 고개를 저었다·
“···!”
순간 불온한 기온을 느낀 네프로디테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는 불신과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아린을 노려보았으며 아린은 변하지 않은 태도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린 황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녀로서 제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이윽고 마차가 멈추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가 문을 열었다·
“내리시지요· 성녀님·”
아린은 어떠한 말이나 설명도 없이 그녀에게 내릴 것을 지시했다·
그녀들의 발길이 내린 곳은 무지의 평원 끝 거센 칼바람이 살결을 가르는 절벽의 앞이었다·
“네프로디테님께선 60여 년 전 미스트의 근원이 되는 안개의 신도들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모습을 드러내시어 그들에 대한 위험성을 제기하셨죠· 그 움직임은 빛의 신 루멘델님의 이름하에 안개의 추종자들을 척결하기 위한 정화군 결성에 큰 영향을 끼치었으며 그 명맥을 이어온 빛의 기사단은 오늘날까지도 대륙의 평화를 위해 그 고귀한 힘을 바치었습니다·”
-스릉
절벽의 전경을 보고 있는 성녀의 귀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후에 행하신 악행에 대해선 도저히 제국과 대륙을 위한 일이라고는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걸 판단하는 거죠? 난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살아왔어요! 내가 나아갔던 길이 평화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걸 당신이 무슨 기준으로 판단한단 거야!”
기어이 폭발한 네프로디테가 토로하듯 소리쳤지만 아린은 물론 어느 누구도 반응해 주지 않았다·
“그럼 확인해보시죠·”
“···?”
“성녀님께서 정녕 루멘델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자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계시를 내려주지 않겠습니까?”
네프로디테는 차마 그럴 것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부끄러움을 느끼시고 죽음으로 사죄를 이루어내신 가녀린 성녀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겁니다·”
아린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에 다른 기사들 또한 아린을 따라 성녀를 향한 마지막 예를 표했다·
“루멘델의 님의 가호가 그대에게 함께하길····”
-푹
그 말을 끝으로 아린의 서슬 퍼런 검날이 성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네프로디테는 외마디 비명도 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그 비참한 모습을 아린은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황녀님····”
일을 끝마친 그녀의 곁으로 레시무스가 다가왔다·
“황실에 전언 좀 보내줘 레시무스·”
그녀는 더 이상 껍데기에 불과한 황녀가 아니었다·
주어진 길을 나아가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것 또한 마다하지 않는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했다·
“이제 일을 진행해도 될 것 같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