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황제의 순방 (6)
-쿵!
팔 다리가 절단 된 트롤의 얼굴이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흐으윽····”
숨은 쉬고 있으나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
놈의 머리 위에 앉아 그대로 목을 그었다·
-서걱!
트롤의 몸이 헝겊대기 마냥 축 늘어졌으며 검에선 녹빛의 진득한 액체가 흘러 내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도 자연스레 핥았다·
“퉤!”
더럽게 쓰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지만 이건 좀 심한데?
어딘가 심상찮은 꾸리한 냄새에 중간 중간 비릿함도 올라온다·
[그 정도 맛 봐서야 되겠어? 남자답게 머리 하나 들어 올리고선 크게 들이켜야지!]
머리는 역겨워서 힘들 것 같고 대신 손목을 알맞게 베어 구멍을 만들어냈다·
움푹 파여진 공간 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트롤의 피·
눈을 질끈 감고선 그대로 입 안으로 들이켰다·
-꼴깍꼴깍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알싸한 향내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먹을 만한데?”
[···?]
상상 이외의 맛에 트롤의 반대쪽 팔도 똑같이 베어냈다·
잘 못 느낀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입안으로 들이키니 하급 마수들의 피랑은 차원이 다른 오묘한 맛이 느껴졌다·
트롤의 손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쪼그라져 버렸다·
[마족 다 됐네 아주····]
케이람의 소름 돋은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트롤의 피를 마셔본 게 처음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내 혀가 점점 미쳐가는 모양이다·
피는 이정도면 됐고 남은 건 처리인데····
-후두두둑
“이놈의 비는 끊길 조짐이 안 보이는 군·”
이래서야 불 속성 마법사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트롤의 시체를 불태우긴 어려울 것이다·
[왜? 그냥 두고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상급 마수의 시체를 그냥 버리고 가기엔 위험 부담이 커· 괜히 여지거리를 남길 필욘 없지·”
별안간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콰아아
불현듯 귓가에 낯익은 소리가 아른 거렸다·
마치 세찬 물 흐름을 연상케 하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라면····
[그럼 물에다 던져버리지 그래?]
저거다·
이 근방이라면 아마 피의 강 ‘블러드 리버’가 흐를 것이다·
장시간 내린 빗물로 인해 물살 또한 매우 거세졌을 터·
밑바닥에 쌓이든 마계로 흐르든 던지기만 한다면 거센 물살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결심이 선 나는 트롤의 사체를 들고 가기 적합하도록 좀 더 조각내었다·
“한 번에 다 들고 가긴 힘들 것 같고 두 세 번은 오고가야겠네·”
기둥만한 굵기의 두 다리를 어깨에 둘러메었다·
다리만 해도 이미 내 키를 훌쩍 넘은 길이·
두 다리 합쳐 100kg이상은 나가겠지만 마수의 피를 섭취해온 내게 이 정도는 거뜬한 수준이었다·
-콰콰콰
소리의 방향을 따라 3분 정도 걸었을까?
낮게 깎아진 절벽과 그 아래로 흐르는 붉은 빛의 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센 빗줄기로 인해 예상대로 수위가 많이 차올라 있었다·
망설일 것 없이 어깨에 들쳐 맨 두 다리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니 순식간에 세찬 급류에 휩쓸려 저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맛있다고 하더니만 한 번 맛보고 바로 버리면 아깝지 않아?]
“보관할 방법도 없는데 어쩌겠어? 한 번 맛보면 그대로 끝인 거지·”
내심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연이어 들고 온 나머지 사체들까지 모두 피의 강 속으로 던져내었다·
불로 태워낸 것만큼이나 나름 완벽한 사체 처리였다·
어째 잡는 것보다 처리하는 게 더 힘든 기분이네·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절벽 위로 턱하니 걸터앉았다·
마수도 처리했겠다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다른 쪽 생각·
조금은 넋 나간 듯한 내 얼굴에 케이람이 웃으며 물었다·
[그 황녀 생각하나 보구나? 설마 걱정하는 거니?]
“별로·”
[황제가 되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무덤덤한 척을 하시네? 너 근데 황제가 되라고 한말은 진심으로 한 거야?]
“뭐 적어도 빈말로 한건 아니지·”
나름 ‘제국에 도움이 되는 황녀가 되십쇼’ 보단 훨씬 더 가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킹메이커라도 하려고?]
“전혀· 난 순전히 방향만 정해줬을 뿐· 나머진 그 여자가 알아서 할 일이야·”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던 길바닥에 나앉는 거지가 결국은 그녀하기 나름이다·
다만 에쉘이 관심을 두었다는 걸 확인한 이상 장기간에 걸쳐 지켜보긴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두고 본다면 비운의 황녀라는 운명을 되풀이하진 않으리라 본다·
시간도 꽤 흘렀겠다 지금쯤이면 후방의 지원군들 또한 합류를 완료했을 것이다·
적당히 그 근처에 있다가 발견된다면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겠지·
그렇게 몸을 일으켜 다시 진영캠프로 돌아가려는 순간
“···!”
갑작스레 와 닿은 낯선 기운에 얼굴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번쩍 뜨인 눈동자가 마주한 곳은 서있던 절벽 보다 조금 더 높게 솟아오른 맞은편의 절벽·
마치 굶주린 맹수가 사냥감의 냄새를 맡고 돌아선 기분이었다·
나는 보았다·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당당히 펼쳐져 있는 보랏빛의 영롱한 날개를!
검을 박아 넣은 듯 날카롭게 솟아오른 꼬리와 발톱을!
신성한 대륙의 영기를 먹고사는 다른 종들과 달리 어두운 마계의 영기를 먹고 산다는 영적인 존재를!
“드 드래곤?”
마계의 희귀 거물급 마수 데빌 드래곤이었다·
“····”
크기로 보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성장형 개체였지만 뿜어져 나오는 마기로 보아 틀림없는 데빌 드래곤이었다·
마계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놈이 레메아 골짜기엔 왜 나타난 거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렇다쳐도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는 거잖아?
설마 이 녀석도 내 냄새를 맡고 왔나?
그런 거 치곤 딱히 공격적으로 보이진 않는데?
여러 생각이 교차하면서 머릿속이 매우 난잡해졌다·
침착하자·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조치를 취하면 된다·
데빌 드래곤·
성장형 개체이긴 하나 어쨌건 거물급 마수·
상급 마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양질의 피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인 왜 갑자기 말이 없어졌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내 몸을 케이람이 톡톡 건드려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생각이 정리된 나는 케이람을 부여잡고선 나지막이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엥? 뭐야 갑자기!?]
당황해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안개로 변한 케이람은 내 몸 속으로 흡수되었다·
뭐 땜에 그러냐는 케이람의 외침이 울려댔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내 머릿속엔 지금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저 드래곤을 잡아야··· 아니 먹어야 한다!”
* * *
“쿠어어억!”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트롤·
그를 반겨준 것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수호기사의 검이었다·
-서걱
빛의 힘이 담긴 검격에 트롤은 맥없이 쓰러졌다·
곁에 있던 기사들이 마무리 일격을 가함에 따라 상급 마수는 손쉽게 처리되었다·
“벌써 다섯 마리째····”
토벌은 순조롭게 진행 됐지만 베르트 공작의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조우한 상급 마수만 벌써 다섯·
한 달에 한 번 나타날까 말했던 개체들을 이렇게 단시간에 다량으로 마주치다니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좀 더 서둘러야겠군 윌리어스·”
황제 역시 급박한건 마찬가지였다·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딸을 생각하자면 잠시도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부디 무사히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라던 그 순간
“···!”
전방이 아닌 꺾어진 방향으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닌 여럿의 발소리·
진격하려던 기사들이 하나 둘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곧 공중에 띄워진 인도의 빛이 발소리의 주인을 밝혀 주었다·
“아 아린?”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황군의 기사들과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 명의 소녀·
진영 캠프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던 아린 황녀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를 알아본 기사들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사이에 꼭꼭 숨어있던 시녀 한 명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째서 아바마마가 여기에?”
스스로 말하면서도 아린 황녀는 자신으로 인해 황제가 이곳까지 직접 왔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감히 황제이자 아버지에게 심려를 끼친 점 이것은 황녀이자 딸로서 매우 큰 죄가 아닐 수 없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황녀 역시 황급히 무릎을 꿇고 사죄를 청했다·
“무사했으니 됐다·”
황제는 더 이상의 질책 없이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일단 당장의 큰 시름은 던 셈이었다·
“····”
누구도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황제가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에 에밀리는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몸에서 흐르는 게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정도의 엄청난 압박·
이제 끝났나 싶어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온 낯선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히이익!”
다름 아닌 베르트 공작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에밀리는 뒤로 자빠져버렸다·
“넌 분명 시안이 데리고 왔던 시녀가 아니더냐?”
“마 맞습니다 공작님! 시안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에밀리라고 합니다!”
저택에서부터 종종 봐왔던 만큼 공작으로선 모를 리가 없는 얼굴이었다·
허나 어째서인지 정작 시녀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엄습해오는 강한 불안감에 공작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빠 빨리 그 사람을 구해야 해요!”
애달픈 황녀의 외침에 모두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누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녀님?”
“시안 공자요! 저희를 대피시키고선 자기 혼자 마수를 유인하겠다며 사라졌어요! 빨리 그를 도우러 가야해요!”
그녀의 눈가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황녀가 아닌 영락없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
충격을 받은 공작의 오른 손이 심히 떨리고 있었다·
침묵에 빠져버린 그를 대신해 황제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 도망쳤더냐?”
“저희가 방향을 알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가서 그 공자를 구해오겠습니다!”
황녀를 호위해온 수호기사들이 다시금 되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뭐하고 있나 윌리어스? 자네의 아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작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직접 나서려던 순간
“작전은 하던 대로 진행합니다·”
작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목소리·
황제는 물론 주위에 있던 모두가 경악한 순간이었다·
“위 윌리어스 자네 진심인가?”
“지금 진영 캠프에는 수십 명의 목숨들이 생사의 갈림길 앞에 서있습니다· 확실치 않은 제 자식 하나 찾자고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순 없지 않습니까? 황녀님을 무사히 대피시킨 것만으로도 그 아이의 소임은 다한 것입니다·”
설사 황제라 한들 대륙의 수호자가 내린 냉정한 결단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꺾을 수 없는 의지를 확인한 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상 전군은 작전을 지속한다!”
기사들은 다시금 진영 캠프로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아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왜? 대체 왜···?”
고작 황녀란 이유 하나만으로 던져진 그의 목숨·
정작 자신은 그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바마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일이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그를 구해야 해요!”
아린 황녀는 간곡히 호소했지만 황제는 그녀의 시선을 차갑게 외면하였다·
“뭣하고 있느냐? 어서 황녀를 데리고 가라·”
돌아온 것은 무심한 명령뿐·
매정한 현실에 그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만큼 한심한 순간이었다·
‘그런 상태론 거리에 나뒹구는 거지 하나 못 구하십니다·’
일언반구의 반박도 못 할 만큼 딱 들어맞는 말이지 않는가?
세상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는 무능한 황녀·
그것이 ‘아린 세벨러스’ 라는 이름의 현주소였다·
-후웅!
별안간 어디선가 돌풍이 불었다·
황녀는 물론 진격하던 기사들까지 일제히 몸을 숙였다·
돌풍과 함께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으며 어둠으로 잠식된 하늘에 별안간 그늘이 드리워졌다·
황녀는 바람이 닥쳐온 방향으로 고개를 서서히 들어보았다·
“···!”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담겨진 미지의 생물·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 올린 일반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함이 느껴졌다·
땅에 발을 붙인 모두가 그 존재를 우러러 보던 찰나 황녀는 별안간 아래로 뻗은 생물의 발끝으로 낯선 존재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시 시안?”
그녀의 마음이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으로 교차된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