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우연이 겹친 필연 (1)
(전능하신 빛의 신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니 그대도 자신의 죄를 그분께 고한다면 비로소 구원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만 놓고 봤을 땐 다 아는 말들인데
이걸 이상하다 못해 괴상하게 엮어놓으니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하나도 안 된다·
대충 나를 교화시키겠답시고 고상한 말들을 잔뜩 퍼붓는 거겠지·
나로선 감흥이 일어나긴커녕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오히려
‘일어나세요 시안님! 이런대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잠은 편한 곳에서 주무셔야 한다고요!’
저 순수하다 못해 얼빵한 엘프님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릴 뿐·
날 깨우고픈 마음에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다·
그냥 듣고 있기 안쓰러울 지경이군·
‘그만해·’
‘···?’
‘머리 울린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일깨웠다·
고개를 든 순간 눈을 어벙하게 뜨고 있는 하스티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보던 것도 잠시
내 시선은 하스티아의 바로 아래 불신과 부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성녀에게 향했다·
그러곤 일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케이람을 뽑아 달려들었다·
“서 성스러운 빛의 심판이····”
-턱!
마법을 시전 하려는 성녀의 손을 그대로 붙잡았다·
“암무 6식: 무(霧)의 공간·”
내게 따분한 교화의 시간을 선물해준 보답으로 나 또한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해줄까 한다·
그녀에게 있어선 지옥의 불구덩이 빠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시간을 말이다·
-스스스
손가락에서 빛줄기처럼 뻗어나간 안개가 곧 나와 성녀가 있는 공간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곧 빛 한점 들지 않는 무색의 공간이 완성되었으며 그 중심에 자리하게 된 성녀의 표정은
차마 입꼬리를 안 올릴 수 없을 만큼 무척이나 볼만했다·
* * *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의 공간에 있었던 것도 잠시
시안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기이한 안개에 잠식된 순간 하스티아의 몸은 검은 안개에 휩싸인 미지의 공간으로 전이되고 말았다·
‘이 이곳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낯선 분위기에 하스티아의 눈은 방황을 멈추지 못했다·
당황한 건 네프로티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건 신의 아공간?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걸?”
하스티아와 다르게 그녀는 이 공간이 어떤 장소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저 안개의 힘으로만 창조된 공간이 아닌 신의 힘이 가미된 공간·
평범한 인간으로선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절대적 공간을 어찌 이리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 냈단 말인가?
네프로디테의 시선은 곧 열 보 밖에 떨어져 있는 공간의 주인에게 향했다·
“···!”
그러곤 머지않아 깨달았다·
검은 머리 암살자의 손에 든 자줏빛의 단검과 그의 바로 뒤 흥미에 찬 음흉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을 마주친 순간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다·
“마 마검?”
검은 안개의 추종자이자 마검의 소유자·
이 땅에서 그게 가능한 존재는 단연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바로 검은 안개의 계승자 시안 베르트였군요· 이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네프로디테는 조소인지 미소인지 모를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7년 만인가요? 검은 머리의 악마로 불리는 것도 이젠 지겨워지신 모양이죠? 아님 계시의 날이 가까워지기라도 하셨나요?”
시안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 열쇠의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셔야 할 거예요· 지금의 상황은 순전히 당신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걸····”
이에 시안의 미간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시군요· 괜찮습니다· 곧 진실을 알게 될 터이니· 이 모든 것은 루멘델님의····”
“이봐 성녀님·”
침묵을 깬 시안이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모습에선 그녀의 말을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감정이 역력했다·
“쓸데없는 말을 그리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단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보는데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그 한마디에 네프로디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곤 그 말에 응해주겠다는 듯 두 손을 쫙 펼치며 다량의 마나를 발현해냈다·
“찬란한 인도의 빛이 어둠을 밝히리!”
주문과 함께 발현해 낸 빛의 구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니 구체에서 발산된 인도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환하게 밝혀냈다·
“하···!”
그 따스한 기운에 심취되기라도 한 듯 성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툭
빛의 구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힘없이 꺼졌으며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킥!”
연이어 들려온 외마디 비웃음은 덤·
빛이 사라짐에 따라 주변은 다시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여졌으며 네프로디테의 얼굴은 다시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곤란한데? 고작 빛 한 번 비춘 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치욕스러운 조롱에 그녀는 치를 떨었다·
“전 지고하신 빛의 신 루멘델님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자입니다! 그러니 저에 대한 모욕은 곧 루멘델님에 대한 모욕이죠! 신의 권위를 무시한 그대에게 더 이상의 안식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자초한····”
기어이 평정심을 잃은 그녀가 격분한 어조로 쏘아대던 것도 잠시
네프로디테의 몸은 곧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 마력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내면에서 차오르던 마나가 갑자기 촛불 꺼지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시금 마나를 끌어올려 봤지만
“왜···?”
이미 몸에는 마나라고 부를만한 힘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곧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하!”
이에 실성하기라도 한 듯 의도를 알 수 없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과연 빛의 질서를 무너트리려는 이단자답군요!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저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고통을 선사하실 생각이신가요?”
“····”
“안타깝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할 거예요! 제 몸엔 전능하신 루멘델님의 가호가 서려 있으까요! 그 어떤 악의 존재도 제게 절망을 안겨줄 순 없습니다!”
아직 드러내지 않은 최후의 수가 남아 있는지 아님 근거 없는 객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네프로디테는 올 테면 와보라는 듯 두 팔을 쫙 벌리며 시안을 도발하고 있었다·
시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한 발 두 발·
무지의 어둠 속에서 절망의 그림자가 점차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코앞의 거리까지 이른 시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턱!
입가에 미소가 만연해 있는 그녀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니
“····”
뭔가 이상함이라도 느낀 것인지 대뜸 고개를 갸웃했다·
“루멘델의 가호라고 했던가?”
“···?”
“아무래도 그 신은 네년을 버린 모양이군·”
“무슨 말이죠?”
시안의 시선은 급기야 공간 구석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스티아에게 향했다·
그녀의 주위엔 청명한 푸른 빛의 가호가 서려 있었다·
반면 네프로디테의 주위엔
“그렇지 않고서야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네년의 몸에 내가 온전히 손을 댈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빛은커녕 오히려 시안이 발산해낸 안개에 점차 잠식되고 있을 뿐·
그녀를 지켜줄 만한 가호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1분 줄 테니까 그 잘난 신에게 한 번 빌어봐·”
“···!”
“제발 이 절망의 순간으로부터 널 구원해달라고· 그 신이 아직 널 버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널 죽게 놔두진 않겠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린 시안의 차디찬 마검의 날을 그녀의 목에 들이대었다·
네프로디테는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기묘한 얼굴로
스스로 악마를 자처한 어느 인간의 속삭임을 속절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누구 한 명은 죽어야지 끝날 기세로 전투를 지속하고 있는 가르니안과 미한·
허나 그들도 서로 지켜야 할 이들이 검은 안개에 잠식된 꼴을 보고 나서야 겨우 시선을 돌렸다·
“···?!”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둘은 누구 하나 먼저 다가서지 못했다·
마치 낯선 안개로부터 흘러나온 부정의 기운에 발이 꽁꽁 묶인 것처럼·
그렇게 아무런 행동 없이 넋을 잃고 쳐다보길 몇 분 여·
-파앗
성녀와 하스티아를 가두고 있던 안개의 공간이 바람 소리와 함께 사그라지면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하스티아님!”
“성녀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주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스티아님! 괜찮으십니까?”
‘가 가르니안?!’
얼떨결에 안긴 하스티아는 놀란 마음에 눈만 깜빡거렸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한 듯 보였다·
반면 성녀는
“성녀님! 성녀님! 정신 차리십시오!”
무언가 심한 쇼크를 받기라도 한 것인지
분명 눈은 뜨고 있는데 그녀의 멍한 눈동자는 좀처럼 초점을 잡지 못했다·
미한의 시선은 곧 여전히 제단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암살자에게 향했다·
“네놈이 감히 성녀님을···!”
능글맞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성녀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미한은 바로 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막 검이라는 것이 몸에 익기 시작한 수습 기사들이 기사단에 처음 입단하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검을 잡은 순간엔 절대 분노하지 마라·
분노라는 감정에 몸을 맡기면 일시적인 강함을 얻을 순 있으나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볼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극도로 결여되어 있는 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진 못한다고 했다·
빛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미한 하셀러스·
기사단 내에서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는 가히 정점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앞서 언급한 이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기사였지만
“편히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분노와 살의에 잠식된 지금의 모습에선 그 이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잊은 기사에게 찾아올 것은
-서걱
지극히 매정하고도 현실적인 결과뿐이었다·
1초 전만 해도 제단 위에 있었던 시안의 몸은 어느새 제단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본래 있었던 자리에는
-후두둑
여덟 조각으로 찢긴 미한의 사체가 힘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보 보지 마십시오 하스티아님!”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광경에 가르니안은 재빨리 하스티아의 시야를 가렸다·
허나 하스티아의 눈은 사체가 아닌 온전히 시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후 검을 집어넣은 시안은 아직 멀쩡한 상태로 서 있는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한결같은 무심한 눈빛으로·
‘괘 괜찮으세요 시안님?’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하스티아는 또 한 번 시안의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시안은 콧방귀와 함께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위에 하스티아는 눈만 멀뚱멀뚱 깜빡였다·
그나마 말이라도 걸어본 그녀가 나았다·
곁에 있던 가르니안은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다 못해 침조차 삼켜지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제대로 억눌린 듯 보였다·
-타다닥
불현듯 뾰족 솟아오른 귀를 자극하는 낯선 발소리에 두 엘프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한 명이 아닌 다수·
정황상 그들에게 있어 호의적인 이들이 오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누군가 오고 있어요! 시안님께선 어쩌실···?’
다시금 시안을 바라본 하스티아는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이건 뭘까?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무표정으로 반응하던 시안의 눈이
“···!”
흔들리고 있었다·
미묘하긴 하지만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절대로 만나선 안 될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느낀 사람처럼·
저의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있던 것도 잠시
곧 그녀의 귀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루나브님!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