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신의 보호를 받는 자 (3)
벌써 다섯 시간 째·
도시의 중심 거리부터 민가 논밭 등 순방도 이런 순방이 없을 것이다·
일단 말없이 계속 따르고는 있으나 이쯤 오니 슈르츠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루나브 레인리버·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집착이 심한 여자일진 몰랐다·
모래사장의 바늘 찾기도 이거보다 무모하진 않을 것이다·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단서 하나 찾겠다고 도시 전체를 헤집는 게 말이 되는가?
그녀를 따르는 학회원들은 이미 익숙한 일인 듯 무념 무상한 얼굴로 묵묵히 뒤만 따르고 있었다·
자신이야 뭐 용병 활동으로 다져진 장거리 이동 경험이 있기에 아직까진 무난히 버틸 수 있다지만
이러다간 정말 며칠 밤도 새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치지도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친 산길을 계속해서 나아가는 그녀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집착을 넘어서 광기에 가까운 정도·
대체 검은 머리의 악마가 어떤 존재길래 이리도 찾으려 하는 것인지 슈르츠로선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런 루나브가 순방을 시작한 지 다섯 시간 만에 걸음을 멈췄다·
풀숲이 우거진 산중 한가운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루나브는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드디어 뭔가를 찾았나 싶은 생각에 슈르츠는 기대감이 한껏 차올랐지만
“···?”
이윽고 눈앞에서 벌어진 괴이한 광경에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털썩 주저앉는가 싶더니 흙이 무성한 땅바닥에 코를 박고선 냄새를 맡겠답시고 개처럼 킁킁대고 있었다·
정말 두 번을 봐도 적응 안 되는 모습이었다·
학회원들은 또 시작되었다는 듯 말릴 기세도 없이 저마다 고개를 숙이거나 이마만 붙잡고 있었다·
이에 보다 못한 슈르츠가 물었다·
“대체 무슨 냄새를 맡으시려는 겁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피로 향수를 만들면 날법한 냄새라고 할까요? 사실 그렇게 좋은 냄새는 아니에요·”
피로 만든 향수라는 말에 슈르츠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루나브는 그대로 학회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예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학회원들은 앞다퉈 나아가 금세 원 형태의 진영을 구축했다·
그러곤 각자 발현해 낸 마력을 땅으로 전승시키니
-우우웅
루나브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푸른 빛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
놀란 슈르츠가 몸을 황급히 물러서려 하자
“당황하실 필요 없어요·”
“예?”
“그냥 그 자리에서 느끼세요· 당신이 가진 그 어둠 속성의 힘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어떻게 변하는지····”
슈르츠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루나브는 다시금 자리에 앉아 고이 포갠 손을 바닥에 갖다 대었다·
-우우웅
그러자 마력에 반응한 지면에서 공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슈르츠는 이전의 광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리플레이(Replay)라는 마법을 시전 중임을 알 수 있었다·
허나 미지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마법진을 통해 전신으로 전달되는 다량의 마력으로부터 슈르츠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어둠 속성의 마력?’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질이 확연히 다른 어둠 속성의 마력이었다·
“마차가 있고··· 기사들이 있었네요·”
살며시 눈을 뜬 루나브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거길 누군가가 덮쳤고요·”
주변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 있는 무언가를 노렸던 걸까요? 아님····”
-휘익
당시의 상황을 돌이키던 루나브의 시선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두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루나브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흙길 옆 가파른 비탈길 아래로 몸을 던졌다·
“루 루나브님!”
깜짝 놀란 학회원들이 연이어 몸을 던지자 슈르츠 또한 얼떨결에 따라나섰다·
그렇게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도착한 곳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 어귀·
그들의 앞엔 작은 크기의 바퀴 빠진 나무 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마차를 스윽 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진 루나브의 입가로
-씨익
환희와 광기가 뒤섞인 섬뜩한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찾았네요· 선배····”
* * *
이따금 꿈을 꿨다·
무지의 황야에 홀로 서 있는 나·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천 명의 기사들·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처럼 저마다 검과 창을 앞세우고 있다·
하늘엔 그들에게 수호와 격려의 빛을 내려주려는 금빛의 오라가 일렁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건 오른손에 쥐어진 마검 하나뿐·
그 외엔 무엇 하나 곁에 있지 않았다·
그렇게 우렁찬 함성과 함께 기사들이 질주하면·
난 전부 죽인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무참히·
그러면 머지않아 그들을 지켜주던 금빛의 오라는 모두 사라지고
무지의 검은 안개로 둘러싼 나 혼자만이 황야에 외로이 자리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통 그쯤이면 꿈에서 깨어나지만 한 번 정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존재를 죽이고 홀로 남게 된 나란 놈이
과연 마지막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
눈을 떴다·
하늘은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 검푸른 장막으로 뒤덮인 상태·
마지막으로 눈 떴을 시점을 돌이켜봤을 때 세 시간은 내리 잔 듯하다·
오랜만에 가진 나름 긴 수면이었다·
‘····’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던 중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망토를 돌돌 감싸 안은 하스티아가 어느새 내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분명 눈감기 전만 해도 저쪽 나무에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조금은 난처한 마음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왜? 덮치지 못해서 아쉬워?]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케이람이 내 볼살을 찌르며 나타났다·
대꾸해봐야 나만 골치 아프기에 딱히 대답하진 않았다·
그 대신·
“신의 보호란 게 대체 뭐야?”
다른 걸 물었다·
[음?]
“말만 그럴싸하지 이름에 비해 제대로 된 구실도 못 하잖아?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화이트 엘프가 고작 인간 몇 명에게 납치를 당해?”
몇 번을 되짚어봐도 속 시원히 이해되지 않았다·
신의 보호라는 건 즉 신이라 불리는 지고의 존재로부터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건데
내가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악의를 품은 기사들로부터 끌려가 어떤 모진 일을 당해도 몰랐을 일 아닌가?
[알잖아? 고작 무가치한 인간 몇 명으로부터 지키겠답시고 그런 거창한 보호를 걸 놈들이 아니란 거·]
“그럼 뭐로부터 지킨다는 건데?”
[너·]
케이람의 날카로운 손가락이 내 이마 정중앙을 찔렀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다 보면 할 말을 잊다 못해 헛웃음이 나온다고 지금의 내가 딱 그러했다·
[그 잘난 멀대들이 뭐 아쉬울 게 있다고 인간에게 보호를 걸겠냐? 당연히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으니 그런 거지·]
“목적이 있다고?”
[그래· 어떤 신이 보호를 걸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신은 이 꼬맹이가 인간에게 납치를 당한 건 물론이고 험한 일을 당해 몸과 정신이 망가져도 신경조차 안 쓸걸?]
내 눈살은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어떤 정신 나간 신인지는 몰라도 그 신은 이 꼬맹이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보호를 건 거야· 그걸 건드릴 일조차 없는 인간들은 위협의 존재로 간주하지도 않으니 힘이 발동되는 일도 없는 거고·]
“그럼 난 뭐 그 무언가를 파훼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놈으로 간주되었다 이 뜻인 거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비밀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져서 거부당한 거지·]
케이람은 늘 그렇듯 턱을 한껏 치켜올리며 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자존심이 높다 못해 하늘을 찌르는 지고의 분들이 가진 비밀이라·
내가 뭐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남 인생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판에 그런 거창한 프라이버시까지 관여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 비밀이 고작 풋풋한 첫사랑 상대 같은 초라한 건 아니겠지·그 이름 모를 신이 어떤 이유로 이 연약한 엘프의 내면에 비밀을 숨겨 놓았는진 모르겠지만
‘····’
그것이 이 여인에게 있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리 밝지도 않겠지·
-휘익
곤히 자던 그녀가 대뜸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감긴 눈이 자연스레 나와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
그런 밝지 않은 미래를 당장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하스티아는 나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가람 왕국의 수도 가울·
대부분 수도라 하면 영토 중심부에 위치하기 마련이지만 가울은 도시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대륙 아래에 치우쳐져 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위치 선정이다·
나약한 인간이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마법이란 것을 처음 발현시킨 곳이 바로 이곳 가울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써진 기록이 없어 사실상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가령 왕국뿐만이 아닌 인간사 전체를 통틀어 굉장히 의미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우와아····’
거리 중앙에 자리한 첨탑을 본 하스티아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첨탑의 끝엔 가람 왕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색 빛의 거대한 마법석이 찬란한 마나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간분들의 발전 능력은 정말 대단하네요! 마나를 이런 식으로까지 깊게 활용할 줄은 몰랐어요!’
뭐 나름 살아남기 위해 수백 년을 발버둥 쳐 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지·
“너와 함께 왔다는 동료들은 어디서 모이기로 한 거지?”
‘그 그게 마법 학회 본관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마법 학회 본관?”
나로선 별로 달갑지 않은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관계자가 네 일족원이라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저 사전에 서신으로 연락만 주고받았을 때 그곳에서 만나자는 말만 전해 받아서····’
애초에 화이트 엘프가 가람 학회 내에 관계자로 있었다면 걔가 몰랐을 리도 없다·
성격상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면 신경조차 안 쓴다곤 하지만····
아무튼 나로선 가까이 가기 편치 않은 곳이다·
이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대뜸 그녀가 내 곁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여기까지 바래다주셨으면 됐어요! 이 이상 폐 끼칠 순 없으니까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가도록 할게요! 저기 저곳으로 가면 되는 거죠?’
하스티아는 첨탑 바로 뒤에 위치한 마법 학회 본관 건물을 가리켰다·
‘욕심 같아선 시안님과의 만남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갖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돌려 드릴게요·’
하스티아는 여태 두르고 있던 나의 망토를 고이 접어서 돌려주었다·
“말도 못 하는 처지면서 혼자 뭘 하겠다는 거지?”
‘괜찮아요! 안 그래도 지금 근처에서 일족원들의 기운을 감지했거든요! 정신감응을 해보면 틀림없이 제 목소리를 듣고 반응을 해줄 거예요!’
그녀의 눈빛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저 보답이라 하기엔 약소하지만····’
하스티아는 품에서 새하얀 백석을 꺼내 내게 주었다·
“그냥 수호석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언젠가 시안님께 위험한 일이 생기게 되면 그 수호석이 시안님을 지켜줄 거예요!”
그런 좋은 게 있었으면서 왜 너는 납치를 당한 거냐는 물음이 입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삼켰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는 어느새 몇 걸음 달려가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 미련 없이 보낼 거니?]
“그럴 거였으면 아예 도시 입구에서부터 헤어졌겠지·”
내가 1차적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남은 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무슨 일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뭐 치안이라면 대륙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이니 그리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은 한다만···
-쐐액
“컥!”
하스티아를 보낸 대로변의 바로 옆 골목·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공간·
나를 향해 음침한 비수를 겨누고 있던 정체 모를 녀석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벽에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얼굴 양쪽으로 하얗고 날카로운 엘프의 귀가 돋아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