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검은 머리의 악마 (2)
대륙에는 몇 년 전부터 미신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장황한 ‘빛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한 악마에 관한 이야기’·
언뜻 들으면 실없는 이야기꾼이 재밌자고 꾸며낸 소설처럼 느낄 수 있으나 근 몇 년 사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흔히 그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첫째는 레드 와인을 쏟은 듯 사방으로 퍼진 붉은 물줄기가 눈앞에 강처럼 퍼지며 대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등줄기가 서늘해져 식은땀을 흐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낯선 검은 안개가 드리워지면서 시야가 어두워지는데 이는 절대 자연에서 발생한 안개가 아니며 마치 대상을 가두려는 듯 사방을 순식간에 덮쳐버린다는 것이며
마지막 셋째는 그런 무지의 공간 저편으로부터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핏물로 물들인 것 같은 잔혹한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고 했다·
만약 본인이 이 세 가지 현상을 모두 겪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면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앉아 믿고 있는 신에게 빌라고 했다·
살려 달라고 비는 게 아닌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간절하게 빌라는 것이다·
그 모습에 조금은 측은함을 느낀 악마가 고통을 덜어줄지도 모르니····
“바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이냐?”
예기치 못 한 상황에 당황한 빈스가 작업장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분명 작업장에 들어오기 전 다 합치면 족히 50명에 이를 병력을 외부에 배치해 놨건만 어째서인지 달려오는 이는커녕 응답하는 이조차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아무나 들리면 튀어오란 말이야!”
이에 흥분까지 뒤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소리치니 붉게 이어진 물줄기 끝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못내 심장이 두근거렸던 빈스는 이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나타난 이는 갈색빛의 고급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영지 소속의 기사였다·
자신의 부름을 듣고 달려온 것이라 빈스는 생각했다·
“왜 너 혼자만 온 것이냐? 아니 그보다 지금의 이 상황은 대체···!”
안도의 순간도 잠시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불안한 생각에 빈스의 몸은 다시금 얼어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한 나머지 자신의 판단 능력이 저하되기라도 한 것일까?
전 병력이 한걸음에 달려와도 모자랄 판에 고작 한 명이 그것도 산책을 하듯 저리 여유롭게 오고 있는데 이걸 안심한다는 듯이 반응한다고?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급격히 밀려온 공포심과 두려움에 빈스는 물론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까지 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소 소속을 밝혀라!”
간신히 용기를 낸 기사 한 명이 신원확인을 지시했지만
“····”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도 않았다·
핏물에 적셔지기라도 하듯 선명한 붉은 빛의 눈동자를 앞세우며
그저 천천히 마주한 이들이 느끼고 있을 두려움을 점차 증폭시키려는 듯이
이 세상의 것이라곤 할 수 없는 괴이한 기운을 내뿜으며 빈스를 향해 점점 더 다가가고 있었다·
-쿵! 쿵!
그러자 앞서 시온이란 이름의 남성을 한 손으로 제압했던 거구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금의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다가오는 붉은 눈의 존재를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구의 기사는 빈스에게 있어 특별했다·
상인 시절 노예 시장에서 거금을 주고 사들여 풀어준 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수호 기사로 고용해 영지에까지 데려온 만큼 나름대로 애착이 있었다·
원래도 근력이 뛰어났지만 암지에서 어렵게 구한 마수의 피까지 먹이는 등
가히 성인 남성 수십 명의 근력까지 당해낼 수 있는 빈스에게 있어서 나름 최후의 수호병 같은 존재였다·
다소 위협적인 존재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눈의 악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예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보폭이 줄어들 기미조차 안 보였으며 시선은 계속해서 빈스에게 꽂혀 있었다·
-후욱!
이에 거구의 기사가 육중한 주먹을 휘둘렀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퍼지며 주먹 끝에서 단단한 턱뼈의 감각이 느껴졌다·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음을 감지하고선 그대로 힘을 가해 날려버리려 했지만
“···?”
어째서인지 정체불명의 기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한 것도 잠시 곧 그의 얼굴과 맞닿은 주먹으로부터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거구의 기사는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주먹이 닿은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닌 손 정확히는 손바닥도 아닌 손등이었다는 걸·
방어할 틈조차 없이 휘둘러진 주먹을 그저 손만 살짝 들어 올려 막아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이에 빈스를 향해 있던 붉은 시선이 비로소 기사에게 향했다·
거기에 동요하던 것도 잠시
-턱
기사의 손목은 어느샌가 그에게 단단히 붙잡혀있었다·
빼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부림까지 쳐봤지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참다못한 기사가 반대쪽 주먹까지 내지르려는 순간
-꽈악!
기사의 손목이 빨랫감 쥐어짜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뼈와 신경이 하나가 되는 고통에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본인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쿵!
살벌한 낙하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 있는 발밑으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기사의 손을 툭 하고 놓은 붉은 눈의 악마는 다시금 빈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뭣들하고 있어! 막아! 어서 저놈을 막으라고!”
더욱더 초조해진 빈스는 급히 나머지 기사들에게 그를 막을 것을 지시했다·
그야말로 자살행위만도 못한 짓·
기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적 우세는 있으니 이를 잘 이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히이익!”
그 마음은 얼마 못 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풀썩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진 열 명의 기사들·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휘두른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손이나 발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이한 바람 소리만이 순간 휙 하고 지나갔을 뿐·
이제 땅에 제대로 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빈스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이 이게 뭐야?”
다리에 힘이 풀린 빈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검은 안개는 어느새 주변 전체를 장악할 만큼 드리워져 있었다·
그 까만 공간 속에 보이는 거라곤 벌벌 떠는 자신의 몸과 살기를 내뿜는 붉은 눈동자뿐·
둘의 거리는 금세 손가락 하나를 사이에 둘만큼 가까워졌다·
-스윽
살며시 손을 들어 올린 붉은 눈의 존재는 곧 빈스의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선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마력 결정이 나왔다·
“결정의 가치를 알면 훔쳐내지 못할 거라 그랬나?”
신경을 옥죄이는 섬뜩한 목소리·
마치 지옥의 악마가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기세에 눌려버린 빈스로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쩌적
쩌적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마력 결정이 가루로 쪼개져 분산되었다·
이에 결정 안에 담겨있던 작은 마나 구체가 선명한 푸른 빛을 발산하였고 그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의 검은 빛으로 물들여졌다·
“가치를 안다 해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
“뭐?”
“가치를 알 건 모르건 상관없이 결국 네놈도 이걸로 온갖 사리사욕을 채워왔던 거 아닌가?”
“···!”
“그럼 네놈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스릉
싸늘한 검소리와 함께 음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결코 평범한 무구라곤 생각할 수 없는 자줏빛의 기이한 단검·
그 검면에 비친 빈스의 얼굴은 너무나도 추잡스러웠다·
빈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고·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 채
최대한 이 악마로부터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간절히 비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하아 하아····”
출혈은 멈췄지만 몸의 감각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볼 뿐·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
차마 눈뜨곤 볼 수 없는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눈앞·
흑발의 남성은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저것이 정녕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행위란 말인가?
꽤 이른 시기부터 검을 잡고 피를 묻혀왔던 자신도 차마 온전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허나 남성은 그 모든 장면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온몸의 장기가 서늘해지고 피부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남성은 단 한 번도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광경에 한껏 심취되기라도 한듯····
-스윽
처형식을 마친 악마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흑의 밤하늘로 물들인 검은 머리
핏물로 적셔진 붉은 눈
음산한 한기를 내뿜는 자줏빛의 단검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머리의 악마가 정말로 나타나기라도 한 것일까?
왠지 모르게 흥분되는 마음에 남성은 피가 뒤섞인 마른 피를 삼켰다·
“···!”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악마의 시선이 마침내 남성과 마주쳤다·
지금 이 작업장 안에 멀쩡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자라곤 그와 남성 단둘뿐·
혹여 자신도 죽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남성의 마음은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시선만큼은 돌리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설명한다면
악마에 대한 두려움보다 경이로움이 앞섰기 때문·
새삼 악마에게 현혹된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
악마는 아무런 말 없이 남성을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를 조금은 흥미롭게 보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터벅
마침내 발을 뗀 악마가 성큼성큼 남성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바로 주저앉아 쓰러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묘한 눈 맞춤이 이어지던 것도 잠시
-우우웅
곧 악마의 손으로부터 새하얀 빛이 발현되었다·
빛은 상처 입은 남성의 몸에 그대로 스며들었으며 만신창이가 되어 차가워진 신체에 온기를 심어주었다·
이에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무뎌졌던 몸의 감각 또한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남성은 머지않아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느낌상으론 거구의 기사에게 당하기 전보다 훨씬 좋아진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
멍한 마음에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선 황급히 고개를 들어봤지만
“···!”
정체불명의 악마는 이미 눈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검은 안개만이 그 자리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