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남겨진 이들 (1)
“그 얘기 들었어? 얼마 전 액실리움에 이어 이번엔 브레누에서도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데?”
“그걸 이제야 들은 거야? 자네 소식이 여간 느린 게 아니구먼?”
하루의 일과를 마친 주민들이 피로를 풀기 위해 모인 술집·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의 입에선 저마다 공통된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세상에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이제 막 젓 비린내를 벗어난 열세 살의 공작가 막내가 사실은 그 무시무시한 미스트의 암살자였다니····”
소문이란 것은 으레 그러하듯 항상 와전되고 보태지기 마련이다·
미스트 소속의 암살자·
액실리움에 데빌 드래곤을 소환한 흑마법사·
한 번 휘두르면 백 명을 영혼을 수거한다는 사악한 마검의 소유주까지·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 베르트에 대한 소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지 뭐야· 그놈을 잡기 위해 그 전설 속에나 나오던 성검의 소유자가 친히 나타나 줬으니· 성검의 힘에 굴복한 나머지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다지 아마?”
“이 친구 이거 이리 순진해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거야 황실 쪽에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퍼트린 사실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나?”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거리 한가운데에서 일이 벌어졌는데 황군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일반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들이 하나같이 말하길 겨우 한 명의 소년에게 황군의 전부가 당해 버렸다더구먼! 그 성검의 소유자까지도····”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변인들의 눈이 번뜩 뜨였다·
“노 농담하지 말게? 어떻게 한 명한테 전부가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나랑 내기하겠나? 지금 대륙의 내로라하는 정보상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는지? 아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군· 그냥 이 자리에서 브레누로 달려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술술 말해줄 테니!”
때마침 술집 주인이 기사단으로부터 새로 받아온 수배서들을 게시판 한쪽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던 시안 베르트의 수배서를 포함해서·
“저리 곱상하게 생긴 얼굴로 진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다녔구먼·”
“누가 아니래? 그 가족들 속도 참 말이 아니겠어· 베르트 공작은 물론이고 그 집안 딸이 엄청나게 미인이랬지 아마? 이쁜 누나 가슴에 엄청난 대못을 박았어!”
“거 생긴 것만 봐선 진짜 툭 하고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데?”
시안의 수배서를 보던 큰 키의 남성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저 꼬맹이를 잡으면 저 집 딸이랑 결혼시켜주지 않을지? 낄낄낄····”
세 남성의 눈살 찌푸려지는 대화가 오가는 와중 바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색 머리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평범하게 계산 후 술집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세 남성이 빤히 쳐다보았다·
“와···· 얼굴 봤어? 저런 엄청난 미인은 진짜 오래간만에 보는데?”
“젠장·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나? 그냥 보내기엔 왠지 좀 아까운데····”
“아서라· 네 얼굴에 도망이라도 안 가면 다행···?”
재잘거리던 세 남성의 입이 한순간에 멈춰진 순간·
나간 줄만 알았던 남색 머리의 여인이 어느새 그들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나머지 눈만 깜빡거리던 도중 큰 키의 남성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왜요 아가씨? 술이 부족하기라도 하셨····”
-쾅!
고막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성의 머리가 테이블에 곤두박질쳤다·
“무 무슨 짓···?”
-쾅! 쾅!
화들짝 놀란 나머지 남성들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그들 역시 테이블과 진한 딥키스를 이루었다·
상상도 못 한 괴력에 짓눌린 나머지 거부할 틈조차 못 느꼈으며 일어나긴커녕 전부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후····”
아직 분이 삭히지 않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여성·
소리를 듣고 달려온 주인에게 그녀는 두둑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변상은 이걸로 해주세요·”
우락부락한 성인 남성 셋을 한 번에 제압한 여인치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곱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버린 주인은 차마 그러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홀연히 떠나려던 여성은 다시금 수배서가 붙은 게시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러곤 누군가의 수배서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쫘악!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던 시안 베르트의 수배서를 단숨에 떼버리고선 그대로 술집을 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잔잔해진 파도처럼
술집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술집을 나와 골목 모퉁이를 돌아선 여성은 힘없이 벽에 기대다가도 바로 주저앉았다·
가쁜 호흡 속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
차마 눈물을 흘리고 싶진 않았는지 그녀는 손에 들려있던 수배서를 꽉 움켜쥐었다·
“시안····”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길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몸이 향한 곳은 시린 바람이 불어 오는 북쪽·
인간으로선 그다지 환영받을 수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
베르트 공작가의 장녀 엘리스는 굳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오색 빛 마법석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가람 학회의 집무실·
브레누 사건이 발생한 지 이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사태 처리를 위한 작업이 바쁘게 진행 중이었다·
엄연한 제국의 땅에서 타국의 이방인들이 멋대로 찾아와 마법으로 소동을 일으킨 것·
이것은 자칫 우시프 제국과 가람 왕국과의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굉장히 민감하고도 중대한 사건이었다·
“루이넬 황자 쪽에서 요구한 배상금이 생각 외로 큽니다· 이걸 저희 쪽에서 온전히 부담하기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왕실 쪽에선 전혀 지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상관없다· 이 정도라면 이번에 아우람 학회를 타진하면서 수거한 자금들로 전부 메꿀 수 있어· 그냥 이의 없이 지불하고 끝내·”
리겐스는 상황만 종결할 수 있다면 별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루나브는 어쩌고 있지?”
그러고선 바로 손녀의 소재를 물었다·
“그 그것이 지금 학회 실험실에 있다고 합니다····”
“실험실?”
예상치 못한 장소에 리겐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 브레누에서 입은 내상을 완전히 회복한 이후부터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듣기론 특별한 일 아니면 자신을 찾지 말라며 당부까지 했다고····”
리겐스는 바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가 향한 곳은 단연 루나브가 있다는 학회의 실험실·
학회원들의 인사도 전부 무시한 채 굳게 닫혀있는 실험실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오셨어요· 할아버지?”
그곳에 있던 루나브가 한결같은 무덤덤한 어조로 그를 반겨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리겐스가 아닌 실험실에 있는 각종 도구들에게 향해있었다·
“여태 뭘 하고 있었던거냐?”
“보시다시피 실험실의 시설이랑 다른 연구재료들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앞으로 저에게 행해질 실험이랑 관련 있는 것들 위주로····”
평소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리겐스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나브는 대뜸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빼곡히 적더니 리겐스에게 보란 듯이 건넸다·
“차차 이뤄질 제 실험들에 대한 수정 계획안이에요· 검토해보시고 그대로 진행해주세요·”
이에 리겐스는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기존에 쓰던 마력 결정이나 파우더 같은 재료들도 좀 손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수급처를 다시 알아봐 주세요· 제가 적어드린 곳 위주로 확인하면 질 좋은 품목들로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소년 때문이냐?”
“····”
루나브는 차마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네 몸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하트 커브가 없어졌더구나·”
“잘도 확인하셨네요·”
“분명 그 소년이 떼준 것일 테지····”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시안 선배가 왜 떼줬는지에 대해선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루나브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인정하마· 그날 네게 보여줬던 너의 능력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
“학회의 실험 덕분이었다는 말을 하진 않겠다· 너 스스로가 이루어낸 것과 더불어 그 소년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의 네 마법 등급은 못해도 6성 이상· 그마저도 7성에 거의 유사한 수준까지 이르렀지····”
루나브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리겐스는 평소와 다르게 그녀가 입을 열기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확실히 그날 벽을 느끼긴 했어요· 제가 태어나서 여태껏 했던 일중 가장 무모했던 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날 학회원들로부터 시안을 떠나보냈던 루나브는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 리겐스를 저지하였다·
허나 가람 학회의 수장이자 9성급 대현자의 마력을 그녀가 홀로 감당하기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우려한 리겐스가 마지막에 힘을 거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한동안 마나를 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내상을 입고 며칠을 기절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리실진 몰라도 그날 전 할아버지를 구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만약 그때 할아버지와 시안 선배가 정말 진심으로 붙었다면···· 아마 할아버지께선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
리겐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이 와도 그때의 선배를 당해낼 순 없었겠죠·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뿐만이 아닌 거기 있었던 학회원 전부의 목숨을 구했다고 봐야겠네요·”
여전히 무덤덤한 루나브의 눈빛엔 거짓 하나 없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시안의 몸을 마지막으로 끌어안으면서 확인했던 진짜 본연의 힘·
그것은 인간이 차마 소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무척이나 깊고 거대했으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 힘이 마검이라고 하는 신의 무구에만 기반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분명 그 힘을 완성하기 위한 선배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겠죠·”
단순히 시안 베르트라는 한 명의 남자를 좋아했던 걸 넘어 이제는 그가 가진 힘의 근원과 가치에 더 큰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마법은 나약한 인간이 이 땅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었던 원동력이자 생존 도구였다죠? 하지만 시안 선배의 힘을 느끼면서 깨달았어요· 우리 인간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군림하기엔 아직 멀었다고·”
그녀의 눈엔 안개에 휩싸였던 시안의 무거운 뒷모습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그동안 인간의 미래라는 명목으로 학회가 절 이용했듯이 저 또한 같은 명목으로 이제부터 학회를 이용할 생각이에요·”
리겐스는 머리가 심히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이 마냥 나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손녀의 눈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지를 심히 불태우고 있는
진정한 인간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
“한 번 가보죠· 할아버지· 아주 재밌는 여정이 될 거예요·”
루나브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