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빛을 걷어내는 안개 (6)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검술이야 원래 하던 사람이니 기본기가 출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얻은 지 얼마 안 됐을 신의 무구를 꽤 봐줄 만 한 정도로 잘 다루고 있다·
-챙!
물론 봐줄 만하다고 해서 내게 비빌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최상의 상태에서 장담할 수 없을 마당에 지금의 빛바랜 성검은 내 앞에선 고기 써는 칼만도 못하다·
아니지·
성검의 힘이 반토막 난 상황인걸 감안 하면 저 정도도 못 다루는 게 사실 말이 안 되는 걸 수도····
“크윽!”
몇 번 줄기차게 휘두르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아무리 부딪쳐봐야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역시 똑똑한 남자다·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어쭙잖게 매달리지 않고 빠르게 포기해버리지·
안 되는 일에 굳이 힘을 쏟지 않는 사람이다·
좋게 말해 상황 파악이 빠른 것이요 현실적으로 말하면 포기가 빠른 것이지·
허나 안 된다 싶어 물러나 버리면 무얼 얻을 수 있겠는가?
보석은커녕 빵도 떨어지지 않는다·
“모두에게 희망을 주셔야 할 구원자님께서 왜 그리 주저하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 고귀한 성검으로 저라는 악의 존재를 처단하셔야지요?”
에쉘은 아무런 말 없이 돌처럼 굳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보인다·
놈의 부정 서린 눈빛에 담긴
나에 대한 의문과 의구심이·
“인간이란 존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시는 분께서 저 같은 인간을 두려워셔야 되겠습니까?”
“그 가당찮은 입으로 잘도 인간이라 지칭하는구나·”
적어도 난 당신처럼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가령 그뿐만이 아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날 인간이 아닌 추악한 악마로 본다고 할지라도 난 내가 어엿한 인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힘은 정직합니다· 쓰면 쓸수록 배가되고 안 쓰면 끝도 없이 무뎌질 뿐이죠· 형님께서 진정 세상에 빛을 가져올 구원자이시라면 기존에 완성된 힘이 아닌 형님께서 스스로 이루어내신 본인만의 힘을 개척하셔야 하진 않을까요?”
“····”
“부정하고 계시는군요· 형님의 눈빛만 봐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십니까? 저 또한 마검의 힘을 빌리는 것뿐이라 생각하시나요? 성검의 힘을 되찾기만 한다면 저 같은 건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거둬주십시오·”
“그 말은 너는 뭔가 다르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다르죠·”
명백히 다르다·
단순히 주어진 힘만 취하려고 하는 네놈과 다르게·
난 내 스스로 모든 걸 일궈냈으니·
-툭
“···!”
오른손에 쥐고 있던 케이람을 보란 듯이 앞으로 떨궜다·
검사에게 있어 상대에게 자신의 검을 내던지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인정 혹은 조롱·
내 경우는 당연히 후자다·
이런 신의 무구가 없어도 성검을 들고 있는 네놈 따위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굉장히 모욕적인 조롱·
“어리석구나· 시안····”
그걸 눈치챈 에쉘의 눈에서 거센 살기가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깊고 방대한 어둠이라 해도 초연하게 빛나는 작은 광채를 걷어내진 못한다·”
그는 내면에 잠든 모든 마나를 이끌어 성검에 전승시켰다·
“너의 안개는 나의 빛을 걷어낼 수 없다· 시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이 세상은 만들어져 있으니····”
쓸데없이 눈만 치켜올리며 석상처럼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그래도 뭘 하긴 하려는 모양이다·
-기이잉
호·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본인의 몸에서 이끌어낸 마나를 성검에 전승시켜 부족한 힘을 채워나가니
이에 반응한 성검의 기운이 에쉘의 몸을 공중으로 비상시켰다·
하늘을 감싸 안으려는 듯 양쪽으로 곱게 돋아난 빛의 날개·
잔잔하면서도 화려한 빛의 산란이 사방에 흩날리면서 마치 인계에 강림한 신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빛이 이끄는 곳에 진리가 있나니···”
하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한 기도가 읊어지자 빛바랜 성검에서 태양과도 같은 금빛 광채가 돋아났다·
‘구원의 심판(Judgment of Salvation)’·
전생에서 마계의 최강자 마왕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성검의 비기다·
인간이라면 차마 무릎을 꿇지 않고선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듯한 성스러운 광경·
주변의 몇몇은 감정이 폭발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래 나로서도 뭐 거의 수십 년 만에 다시 보는 나름 귀하면 귀한 광경이긴 한데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라고 같은 광경이라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봤을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지금 나에게 있어 저 성스럽다 못해 고귀한 성검의 비기는····
“킥!”
감탄에 이어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건 뭐 힘의 가치를 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밑바닥 수준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정작 위력은 하나 없는 완벽한 보여주기용 기술·
저 되지도 않는 검에 죽었어야 할 마왕이 새삼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다·
심판의 준비를 마친 성검은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진격하였다·
-슈우욱
성검의 끝이 내 목과 접점을 이루려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성검의 일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턱
“···!”
맞는 척이라도 해 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부질없는 짓 같다·
성검의 끝은 이미 내 목이 아닌 한참 옆으로 빗겨나갔으며 내 왼손은 성검을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꽈악!
“크흑!”
살며시 힘을 쥐여주자 그가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안개는 빛을 걷어낼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
“이 세상이 그렇게 맞춰져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나약한 변명일 뿐입니다·”
-쨍그랑
내 악력을 견디지 못한 그가 결국 스스로 손을 놔버리면서 쥐고 있던 성검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내 몸에 잠들었던 검은 안개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사방에 흩날리던 빛의 기운을 모조리 뒤덮어버렸다·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맞춰져 있는 거라면 그 맞춰진 세상을 새롭게 바꿔버리면 그만입니다·”
-쾅!
고통에 몸부림치는 에쉘의 목을 붙잡고선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기 위해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죠····”
그러자 그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낯선 아티팩트가 바닥에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마리오네트의 인형·
누가 줬는진 안 봐도 뻔히 안다·
이런 같잖은 눈속임으로 나라는 존재를 밑바닥으로 추락시킬 상황을 연출하려 한 거다·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는다·
지극히 당신다운 행동이기에 그럴 가치도 없을 것 같거든!
나는 옆에 꽂혀있는 케이람을 자연스레 집어 에쉘의 목에 갖다 대었다·
케이람의 칼날을 눈앞에서 마주한 그의 안색이 일순간 하얗게 질렸다·
“두려우십니까? 안심하십시오· 지금 제 손에 쥐어진 이 증오의 칼날은 형님의 목을 베지 않을 것입니다· 왜? 형님께서 느끼셔야 할 고통의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니까요!”
“너 넌 대체···?”
궁금하겠지·
미칠 듯이 알고 싶을 거다·
하지만 알 턱이 없겠지·
그러니 계속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끝에는 발악할 것이다·
“저를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이라 칭하며 매장하셔도 되고 대륙의 내로라하는 용병들을 소집하여 저를 죽이기 위한 암살집단을 만드셔도 좋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형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걸 하십시오! 전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이상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곤 절망하십시오! 모든 걸 동원했음에도 저란 존재는 기어이 무너트릴 수 없다는 걸 깨달으신다면 비로소 제가 원했던 순간이 형님께 도래할 것입니다!”
의문을 넘어 이제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그의 눈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이미 당신의 눈엔 내가 인간으로 안 보이겠지·
허나 앞선 다른 것보다도 당신의 머릿속에 새겨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잊지 마십시오! 전 그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당신의 실체를 알고 무척이나 증오하는 더없이 평범한 인간 말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날 넘어서지 않는 한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가겠다는 네놈의 진리는 절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니·
“그때까지 부디 강녕하시길····”
그를 위한 진심 어린 기도를 끝으로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람들은 생각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제발 현실이 아닌 꿈이기를·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들이 기어이 인간이란 종족을 버린 것은 아닐지 이제는 의심마저 피어오를 지경·
도대체 저 시안 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수십 명의 정예 기사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킨 것도 모자라 안개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소환해 주변을 혼란에 빠트렸으며 이를 정화하기 위해 나타난 구원의 존재까지 처참하게 무너트려 버렸다·
그들에게 있어 이미 시안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발을 들인 악마·
그것 외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안 보였다·
-스윽
형제의 깊은 대화를 마친 안개의 존재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전의를 잃은 기사들로선 태연히 나아가는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위신 회복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나섰던 루이넬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며 쿤델 또한 긴장에 젖은 눈으로 시안을 쳐다만 볼 뿐 제지하려 나서진 않았다·
길목에 있던 이들은 전부 물러서기 바빴지만
딱 한 사람
딱 한 사람이 물러서지 않고 시안이 가는 길목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
결의 다진 듯 불끈 쥔 두 주먹과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처량한 눈동자·
아린은 대로 한가운데에 홀로 우두커니 선 채 시안이 다가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굉장히 짧은 거리였지만 그 시간이 아린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시안은 그런 아린에게 눈조차 마주쳐주지 않았다·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는 듯 경계나 방어 태세 없이 계속해서 무심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둘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고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칠 순간에 이른 순간
-턱
시안의 발길이 뚝 하고 멈췄다·
마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목을 꿋꿋하게 잡고 있는 아린의 오른손·
터지기 일보 직전의 감정을 필사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떨림이 시안의 몸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할 말 있으십니까?”
이에 시안이 먼저 입을 열고 나직이 물었다·
“아니· 없어····”
질문 추궁 확인 등·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마당에 해봐야 의미 없는 말들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아린은 모르지 않았다·
“그럼 놓으십시오· 절 막을 생각이 아니시라면····”
스스로 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그녀에게 손을 놔줄 것을 지시했다·
딱히 할 수 있는 말도 없고 그를 막을 수 있는 힘도 없지만
아린은 좀처럼 시안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의미 없는 행동인 거 알아· 미련한 행동인 거 알고····”
아린의 목소리는 손대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만큼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정말 미안하고 염치없는 거 아는데···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시안?”
이에 시안이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나 딱히 싫다는 의사는 내비치지 않았으며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아린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아무 말···· 정말 아무 말이라도 좋아· 조언도 좋고 욕도 좋으니까· 그냥 나에게 딱 한 마디만 해 줄 수 없을까?”
더도 덜도 말고 딱 한마디·
내용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시안이 해 준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를 그의 진심 어린 또 다른 한 마디를 아린은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나아가십시오·”
“···!”
시안은 늘 그렇듯 흔들림 하나 없는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황녀님 마음속에 품은 그 감정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나약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잊지 마시고 주어진 길을 끝까지 나아가십시오· 해서····”
시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란 존재가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
“이것이 제가 황녀님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한 마디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아린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시안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아린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시안의 뒤를 조심스레 뒤따르던 브라이언과 에밀리조차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마주하지 않는 것이 그녀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으니·
-주르륵
간신히 참아냈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리면서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차마 시안에게 보일 순 없기에
아린은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하늘을 보며 처량하게 흐느꼈다·
그렇게 시안은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홀연히 아린의 곁을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