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황제의 순방 (4)
우시프 제국의 황제 디오네 세벨러스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이자 전 황후 지금은 고인이 된 ‘디아나 퀴젤’ 두 번째 부인이자 지금의 황후 현 제국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카산드라 네펠리스’
전 황후로부턴 1황자와 2황녀가 현 황후로부턴 3황자와 4황자가 출생되었다·
그럼 5황녀는?
세간에야 어느 몰락한 후작가문의 소생인 걸로 알려져 있지·
허나 황성을 비롯한 중앙 귀족 사이에선 그녀가 첩출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이름도 모를 평민 출신의 여식으로····
비록 황제가 손수 거두어 황녀로 책봉했다곤 하나 앞선 네 자식들과 비교하자면 결코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하나의 황위와 이를 사이에 둔 네 명의 자식들·
근본 없는 첩출로선 저 치열한 싸움에 결코 끼어 들 수 없었다·
무늬만 황녀에 실상은 아무런 힘이 없는 껍데기·
언뜻 무기력해 보일지언정 솔직히 혈혈단신 여인의 몸으로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전무했던 것은 물론 그녀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일말의 지원 세력조차 구축하지 못했다·
결국은 내전으로 황성에서도 쫓겨나고 이후엔 별다른 재기도 없이 그냥 병으로 죽었던 것이 이 황녀의 비참한 전생이었다·
말 그대로 비운의 황녀·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참 어울리는 말이지 않은가?
지금이야 세상 순수한 얼굴로 평온하게 산다지만 몇 년 뒤엔 저 맑은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질 것이다·
“여기에선 얼마나 살았던 거야?”
“한 달 정도 됐습니다·”
“혼자서?”
“시녀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 그렇구나····”
대화가 이어지는가 싶으면 내 무심한 단답이 흐름을 뚝뚝 끊어버렸다·
그럴수록 황녀의 시선은 더욱 더 불안해졌으며 차단막 틈사이로부터 전해지는 에밀리의 시선은 더욱 따가워지고 있었다·
“이 일단 오늘 낮에 있던 일부터 사과할게· 황녀로서 정말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네 말대로 도움이 못 되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황녀님께 다소 무례한 언행을 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몸소 일어나 고개를 숙이니 그녀도 덩달아 일어난다·
손사래를 치려다가도 머쓱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 어 저기 그러니까····”
뭔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황녀·
일단 한 번 말없이 기다려보기로 했다·
“너 넌 왜 전선으로 온 거야?”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왔습니다·”
“무 무섭진 않았어?”
“극복중입니다·”
“그렇구나····”
천막 안으로 무거운 적막함이 흐른다·
결국 참다못해 내가 먼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응?”
“제 개인 신상을 물으러 오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렇게 큰 이유는 아니야! 그냥 너에 대해서 좀 물어보고 싶어서 왔어!”
“저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우리 주인 인기 많네?]
침대에 누워 지그시 지켜보던 케이람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으 응· 아까 경계문 앞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굉장히 다르다는 걸 느꼈거든· 나랑은 달리 되게 어른스러웠다고 할까?”
“그런 것 치곤 저를 별로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던 것 같습니다만····”
“아 그건 사과할게! 나도 모르게 널 시기했던 마음이 드러났던 것 같아·”
이쯤 되니 이 황녀가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른바 개인 상담·
동년배의 남녀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 가자는 취지였다·
솔직히 좀 뜬금없는데····
일단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둘째 치고 오늘 처음 본 남자애랑 대화를 위해 이 야심한 밤에 직접 찾아오다니·
황녀란 자가 주위에 그 정도로 사람이 없는 건가?
“죄송하지만 제가 황녀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기엔 곤란할뿐더러 전 황녀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른스러운 사람도 아닙니다·”
설령 측은한 마음이 생겼을지언정 내 인생 챙기기도 바쁜 마당에 남 인생까지 상담해줄 여유는 없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설사 황제의 핏줄이라 한들 길가의 돌맹이만도 못할 뿐이다·
[에휴 우리 우매한 주인을 어찌 할까?]
케이람은 혀를 내두르며 질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밀리의 시선 또한 더욱 따갑게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애초에 저들이 뭐라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내 알바가 아니다·
“이유가 뭐야···?”
그녀의 어투가 급 돌변해버렸다·
“너도 내가 껍데기 같은 황녀라서 무시하는 거니?”
“오해십니다·”
“아니 네 어투만 봐도 알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나를 보내고 싶다는 기분· 내가 다짜고짜 찾아온 게 잘못이긴 하지만 솔직히 매우 불쾌해·”
그녀의 시선이 마치 날카롭게 세워진 단도처럼 내려앉았다·
“그래 이해해· 네 입장에선 난 친분을 쌓아봤자 아무런 이득도 못 볼 존재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알아· 태어날 때부터 숱하게 겪으면서 깨달은 거니까· 내가 황녀라 해서 그 누구도 잘 보이려고 한 사람은 없었거든·”
나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녀가 겪어온 사람들이랑 다르지 않기에
더 이상 변명을 남발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한숨을 내쉰 황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뺏어서 미안· 그래도 얘기 정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에쉘 공이랑은 완전 다른 동생이었네·”
···뭐?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에쉘 공이랑은 완전 딴판인 것 같다고 했어· 뭐 설사 같은 형제라 해도 닮을 순 없겠지·”
왜지?
왜 저 황녀의 입에서 그 자식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한 내 얼굴에 아린 황녀는 놀라 움찔거렸다·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에쉘··· 아니 저희 큰형님은 어찌 아시는 겁니까?”
시선을 잠시 거둔 채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자 작년에 로얄 아카데미를 견학 할 때 우연히 만났어· 아바마마랑 친분이 있으신 베르트 공작님의 장남이시잖아? 그러니 자연스레 소개받은 거지····”
“····”
공기가 무겁다·
속이 메스껍고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다·
고작 이름 하나 들었을 뿐인데 감정이 너무나도 격해진다·
침착하자· 이래서야 진짜 만났을 땐 어쩌려고 그래?
지금부터라도 조절하지 않으면 정말 단칼에 사지를 찢을 것만 같다·
참아야지·
그런 허무하고 재미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해선 안 되잖아?
흥분되었던 내면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조용히 고개를 든 나는 다시금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셨군요· 그분에 걸맞은 모습을 못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마 맞아! 넌 좀 닮을 필요가 있어 보여! 게다가 에쉘 공은 내게 진심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고 해주셨다고!”
···?
누가 뭘 해줘?
“···큰 형님이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다고요?”
“그 그래! 남들이 뭐라 하든 흔들리지 말고 황녀로서 올곧고 당당한 모습을 이어나가라 했어! 그러면서 꼭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황녀가 되어달라고 했는걸?”
믿을 수 없다·
그 극도의 기회주의자가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고? 그 악마 같은 놈의 성품은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놈은 선의든 악의든 상관없이 본인에게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은 자에겐 정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
내가 그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도 아카데미를 졸업한 직후·
무능아였던 시절엔 정말 모르는 사람일 정도로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놈이 다른 황자나 황녀도 아니고 저 아린 황녀한테 조언을 했다?
황실일가 중 가장 미미하고 나약한 세력을 가진 일원이 바로 5황녀다·
아예 세력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볼품없는 존재이거늘 내가 아는 그놈이라면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 건넨 채 지나쳤을 것이다·
솔직히 거짓말이라 믿고 싶긴 한데····
이 순수한 황녀의 눈에선 그런 거짓의 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황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누차 말하지만 그놈은 절대 이유 없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아린 황녀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면 필시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터·
결코 덕담이나 하자고 그런 말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1년 전이라면 지금의 나하고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시기일 터·
그 말은 즉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제국에 도움이 되는 황녀라····
참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었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린 황녀는 결국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여자다·
누구 손아귀에서 어찌 움직이든 내 알바가 아니란 거다·
하지만 그 손아귀의 주인이 에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그놈이 어떤 플랜을 세우고 무엇을 구상하든 간에 난 그것을 곱게 봐줄 생각이 없다·
내가 알게 된 이상 세세한 것까지 파고들어 철저하게 망쳐줄 뿐이다·
-기이잉
손끝에서 콩알만한 마나구체를 만들어 낸 뒤 가볍게 튕겨냈다·
구체는 가루로 흩어져 분산되었고 곧 나와 황녀사이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마법 결계가 형성되었다·
“뭐 뭐한 거야· 지금?”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지금부터 행해지는 대화 내용을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도록 도청방지 결계를 시전 했다·
차단막 너머에 있는 3자들로선 개미 숨 쉬는 소리만 들릴 것이다·
“제국에 도움이 되는 황녀라 하셨습니까?”
“응 난 인형 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아· 황녀로서 나라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럼 감히 묻겠습니다· 황녀님은 혹 황위에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황위란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말 하는 거야! 황위라니? 나 난 그런 거에 전혀···!”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황위에도 관심이 없으신 분이 대체 어떻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사시겠다는 겁니까?”
아린 황녀의 얼굴이 심히 붉어지고 말았다·
“나 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될 가능성조차 없고! 지금은 어려서 힘들겠지만 내가 노력한다면 분명 황녀로서도 제국에····”
“한심하군요·”
“뭐?”
“제국의 실정을 그리 모르십니까? 황녀로서 제국에 이바지하시겠다고요? 지금은 어려서 힘들 거라고요?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 뭔가 바뀔 것 같습니까? 그 상태론 거리에 나뒹구는 거지 하나 못 구하십니다·”
흔들리는 동공과 떨리는 입술·
불안하게나마 잡고 있던 짤막한 믿음이 초라하게 부서진 순간이다·
본인도 알고 있었겠지·
허나 알면서도 아니라 부정하려 했겠지·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주제파악만큼은 철저하게 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자라 해서 나이가 어리다 해서 유하게 대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뿐·
일단 이 황녀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뼈저리게 각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눈가로 자그마한 이슬이 맺혀졌다·
“그 그럼····”
울먹이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묻는다·
“난 어찌하면 좋은 거야? 어떻게 살아야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건데···?”
“간단하지 않습니까?”
“···?”
“황제가 되시면 됩니다·”
황녀는 석화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빈말이나 하자고 던진 말은 아니다·
의지가 있고 힘이 있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밥이나 빌어먹던 천한거지가 어느 날 성검을 뽑아 영웅이 될 수 있고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가 혁명에 쫓겨나 거지가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황제정도는 돼줘야 내게도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댕! 댕! 댕!
그 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세 번의 종소리와 함께 초점 잃은 황녀의 눈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차단막 너머로 대기하고 있던 수호기사들이 달려 들어왔다·
“황녀님 급히 대피하셔야 합니다!”
나는 바로 도청방지 마법을 해지했다·
“마 마수가 출몰한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어서 후방캠프로····”
-펑!
연이어 마수들의 출현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음이 들렸다·
너무나도 큰 소리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가 가깝다·
그것도 엄청나게·
못해도 진영캠프 근처·
-쿠구구궁
거대 마수의 등장을 예고하듯 땅 아래로 거센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