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빛을 걷어내는 안개 (2)
스무 명에 달하는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악질 범죄자·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치는 전선의 흉악한 마수들·
가히 포식자라고 불릴만한 존재들을 여럿 봐왔던 베테랑 기사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단순히 포식자라는 말론 설명이 되지 않을 그 이상의 존재·
현재 제국 최악의 범죄자 시안 베르트를 마주하고 있는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심정이었다·
“우시프 제국의 빛! 위대한 디오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베르트 공작가의 일원 시안 베르트는 지금 이 시간 부로 모든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라! 반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파견된 기사들 중 유일한 상급 기사인 레드백 아커만이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내보이며 지시에 따를 것을 명했다·
“····”
허나 시안은 그곳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작은 굴욕감을 느낀 레드백이 이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니 지시를 받아들인 기사들이 시안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상급 기사도 아닌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않은 소년이 정예 기사들의 날카로운 포진을 벗어날 순 없을 터·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리 생각했다·
적어도
-서거걱
그들의 검이 전부 허공으로 뜨기 전까진·
“···!”
공중을 향해 매섭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소용돌이가 사그라진 시점에선 굳건하게 검을 쥐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맥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기사들의 입에선 작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마치 거대한 기운에 짓눌려 기절하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하얗게 바래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진 황군의 정예 기사들·
당황한 레드백이 말에서 내려 시안을 노려봤지만 시안은 한없이 덤덤한 눈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분노한 레드백이 직접 검을 뽑고선 바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
5보 밖의 거리까지 가까워졌음에도 시안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기사이기 전에 수십 년간 검을 갈고닦아온 검사로서 레드백은 확신이 들었다·
이건 자신이 분명하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서야 이 거리에선 어떠한 대처도 통하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마음으로 당차게 검을 휘두른 순간
-슈욱
공간을 가르는 검소리와 함께 눈앞에 붉은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검이 무언가를 베기는 했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검이 아니었으며 하물며 시안의 몸을 벤 것도 아니었다·
-투둑
다리에 힘이 풀린 레드백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의문과 의심이 뒤섞인 눈으로 힘겹게 눈동자를 돌리자 그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과 기사들이 지금껏 상대한 이 소년은
애초에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고·
그저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선 상위의 존재·
그것 말고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시안은 쓰러진 그들에게 연민의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황군의 선발대가 당한 것 같습니다····”
사태가 벌어진 곳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가람 학회의 마법사들·
예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경지에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작 기사 몇 명이 달라붙는다 해서 막을 정도였다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겠지·”
리겐스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감탄사조차 내뱉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학회장님? 이곳은 제국입니다· 사실상 저희가 나설 명분도 부족한 마당에 자칫 제국과 마찰을 빗진 않을지····”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대의란 있을 수 없는 법이지· 저 소년은 우리 가람 학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다·”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아들·
신에 필적하는 어둠 속성 수치 보유자·
대륙 제일의 살수 집단 미스트 소속의 암살자·
당장에 알아낸 사실만해도 이리 굵직한 마당에 저 무심한 얼굴 뒤에 무엇을 더 숨기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근 몇 년간 학회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결국 저 소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이제는 확실해진 상황·
그렇기에 자신들이 더더욱 그를 차지해야만 했다·
이는 학회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
리겐스의 눈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진을 개방해라·”
명령을 받은 학회원들이 즉시 내면에 깃든 모든 마나를 이끌어냈다·
그러자 그들이 내려다 보고 있는 바닥 한가운데에서 옅은 빛이 일어났으며 그 빛이 드리워진 곳으로 시안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마력의 공간 속에 상대를 꼼짝 못 하게 가둬버리는 상급 마법 일명 <봉쇄(封鎖)의 진>·
마력으로 공간을 만드는 제한 결계의 상위 마법이며 한 명이 아닌 다수의 마나가 동원되는 만큼 완성만 되면 자신조차도 쉽사리 걷어내기 힘든 마법이었다·
즉 저 공간에 대상을 가두기만 한다면 일은 그 즉시 끝나게 될 터·
환희와 기대에 찬 리겐스의 입에서 점차 미소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그 순간 어디선가 살갗을 스치는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돌풍에 실린 거친 모래 알갱이가 학회원들의 시야를 덮쳐버리면서 대다수가 눈을 찡그렸으며 이로 인해 원활하게 주입되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일순간 끊기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
리겐스는 마력의 근원을 찾기 위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
시안이 다가오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진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성의 손으로부터 가공할 수준의 마력이 느껴졌다·
남성은 당황에 찬 그들을 바라보며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낯익은 모래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더 볼 것도 없다·
이건 익숙하긴 하나 딱히 친숙하진 않은 어느 바보 왕자의 힘이다·
정면으로부터 열한 시 방향·
한 번에 달려가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 건물 옥상으로부터 역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흐름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다섯 걸음 앞에 있는 지점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그곳엔 광장 하나는 뒤덮을 커다란 마법진이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쇄의 진을 설치한 건가?
뭐 나름 황군의 머저리들 보단 제대로 준비했네·
딱히 걸린다 해서 못 빠져나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모래바람 덕에 애먼 고생은 던 것 같다·
나는 케이람을 고쳐잡고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콱!
케이람에 담긴 마나가 지면을 타고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전승되니 푸른 빛을 발하고 있던 마법진에서 점차 검은 안개가 샘솟기 시작했다·
-콰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법진은 얼마 못 가 소멸해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 소용돌이의 주인께서 모래바람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체험 학습 간 거 처음부터 기각됐었다면서? 덕분에 나 정학 처리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설명 안 했었던가?
일부러 안 했다기보단 그냥 여러 일이 겹쳤다 보니 자연스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너 요즘 꽤 시끄럽더라? 암살자니 뭐니 별로 닮지도 않은 수배서까지 뻔히 나돌고 말이야·”
그는 내 수배서를 보란 듯이 내밀며 씨익 웃어 보였다·
녀석이 아무리 생각 없는 바보 왕자라 한들 그 수배서에 적힌 내 죄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저리 반응할 순 없을 것이다·
“경계 풀어 임마! 남자의 감이라는 게 있지 내가 이딴 종이에 적혀있는 걸 믿을 것 같냐? 넌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거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묘하게 고개는 끄덕거려지지 않았다·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라····
나도 나를 모르는데 이 바보 왕자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내 진면을 알고도 저런 변함없는 미소를 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참 여러모로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남자는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니까· 너한테 딱히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노델리에서 있었던 일 지금 여기서 갚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만 이런 식으로 퉁치면 곤란한데?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 내 천상의 라이벌이 이런 곳에서 잡히는 꼴을 볼 순 없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후우웅
이 꼴을 좋게 볼 리 없는 분들께서 모래바람에 화답하는 강한 돌풍을 일으켰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다시 바람이 불어온 것을 바라보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은밀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어느 현자님이 보였다·
가람 학회의 수장 리겐스 레인리버·
저 남자가 학회원들을 이끌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는 건 아무래도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겠지·
별로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뒤늦은 시점에 찾아왔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
아마 그 잘난 후배님 덕분이겠지·
“오래 대화할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저 빼빼 마른 놈들이 헛짓거리 못 하도록 일단은 내가 막아줄게· 그 틈에 네 시종들 데리고 탈출해라·”
바보 왕자는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내면에 잠든 마나를 폭발하듯 분출해냈다·
“그 망할 놈의 목소리가 이럴 땐 또 잠잠하단 말이지! 진짜 도움 안 되는 놈이라니까!”
녀석이 있는 곳을 기점으로 아까보다 더 거대한 모래 소용돌이가 치솟았다·
덕분에 나를 향해 마력을 겨누고 있는 마법사들의 시야가 또다시 차단되었으며 일부는 아예 몸까지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이따금 나타난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와주지 않는 이상 오래 지속되진 못할 것이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뭐 할 말 있냐?”
“감기 조심해·”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다·
“그딴 거 난 안 걸린다니까!”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조심해야 할 거다·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네 나라를 위해서라도 말이지·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를 지나치니 공간 전이라도 쓴 듯 어느새 땅 위에서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가람 학회의 수장님께서 보였다·
그는 흥미와 의심이 뒤섞인 복합적인 시선을 보이며 말했다·
“네놈과는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구나·”
적어도 이번 생에선 처음이지·
“내가 네놈을 알고 있듯 네놈도 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단순히 어느 정도가 아닌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그 담대한 가면 속에 가려진 추악한 진면까지도····
“긴말 않겠다· 나를 따라와라·”
이 말은 예상 못 했다·
“어차피 이 제국에서 네놈이 등 붙이고 있을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와라· 과거의 일은 묻지 않겠다· 가람 학회 수장의 이름을 걸고 너에게 맹세하도록 하지·”
이 영감님께서 아직 노망날 시기는 아닌 거로 아는데?
“착각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너에게 거부권은 없다· 단지 선택만 있을 뿐· 내 제의를 받아들여 순순히 따라갈지 아니면 내 힘에 굴복해 강제로 끌려가게 될지 말이다·”
그나마 선의를 베푸는 중이라며 아량을 떠는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오히려 너에겐 고맙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이유야 어찌 됐든 넌 아우람 학회의 어두운 손길로부터 내 손녀를 두 번이나 구해줬으니 말이다·”
점점 듣는 것 자체가 거북해지는 와중에 결국 결정타를 날렸다·
나는 아무런 말이나 행동 없이 그저 담담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전자를 선택하진 않을 모양이구나·”
말없이 전달한 내 의중을 알아챈 듯 그가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렸다·
“조금 전 네 마력을 보아하니 이미 어둠 속성 경지의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는 걸 느꼈다· 그러니 네가 가진 모든 힘을 한 번 이끌어 보거라· 나 리겐스 레인리버가 네놈의 힘을 직접 평가해주겠다·”
확실히 대륙에 몇 없는 9성급 대현자의 마력은 흐름부터 다르다·
등급이란 것이 단순한 숫자놀음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아주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지·
마주하는 것조차 몸에서 옅은 떨림이 일게 할 정도다·
“부디 내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흥해줬으면 좋겠구나· 어둠 속성이라는 게 그리 흔한 것은 아니···!”
-풀썩
“커헉!”
주절주절 떠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선 주저앉았다·
나 또한 조금 당황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니
“···!”
곧 어딘지 모를 곳으로부터 굉장히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늦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왠지 모르게 애정이 한가득 느껴지는 무심한 목소리와 함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