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드러나는 진실 (2)
-꾸깃
두 눈을 부릅뜨며 손에 들린 서신을 거칠게 구기는 쿤델·
이제는 뭐 놀랍긴커녕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액실리움에 나타난 데빌 드래곤을 홀로 처치한 의문의 괴인·
이건 두말할 것 없이 며칠 전 아카데미를 스스로 그만둔 어느 당돌한 소년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수십 년을 살아온 늙은이의 감이 계속해서 그가 범인이라며 확신을 던져주고 있을 뿐·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과한 존재감을 드러내다니·
쿤델로선 머리가 매우 복잡할 지경이었다·
-벌컥
그런 와중 대뜸 총장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거칠게 열려 버렸다·
방의 주인이 출입을 허가하지도 않았건만 자기 집 거실마냥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 남성·
어쭙잖은 평민 차림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으나 쿤델은 이미 그의 정체를 파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어쩐 일이냐 루이넬?”
우시프 제국의 1황자 루이넬 세벨러스였다·
“너무 대놓고 그런 표정을 짓진 말아주시죠· 아무리 외할아버님이라 한들 지금 제 정신 상태가 그런 불쾌함을 받아줄 만큼 온전하지 않습니다·”
입고 있던 망토를 한쪽으로 투박하게 던진 루이넬은 바로 책상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저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오랜 시간 안 뺐을 터이니 황성에서 못다 한 대화를 지금 나눠주시죠·”
마치 본인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건방진 모습에도 총장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담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황성엔 저를 털러 오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이미 아바마마께 제가 여태껏 해온 뒷일들을 다 털어놓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스스로 뒷일이라고 칭할 만큼 당당하지도 못한 일인걸 알기는 한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자의 얼굴은 결코 잘못을 인지하거나 죄를 뉘우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으며 근거 없는 당당함만 가득했다·
“압니다· 외할아버님 입장에서 제가 한 모든 일이 다 윤리와 법칙에 어긋난 비상식적인 일로 보이시겠죠· 허나 이건 절대로 저 혼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외할아버님께서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황제에 오르면 퀴젤 가의 위신도 더욱····”
“난 너에게 붉게 물들어진 피의 황좌에 오르라고 한 적 없다·”
쿤델은 루이넬의 열변을 한 마디로 딱 잘라 일축했다·
“연륜이란 게 참 이럴 때 보면 미련하다 못해 어리석게 보이는군요····”
존경심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정녕 외할아버님께선 평화로운 황위 계승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제 아바마마가 어떻게 황좌에 오르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릴 적 보았던 아바마마의 형제자매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소식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
“비올렛을 비롯한 파비앙과 네로비앙 하다못해 껍데기에 불과한 아린 그년까지! 그들이 절대 황좌를 탐하지 않을 거라고 외할아버님께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황실의 정세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께서 어찌 그런 미련한 말을 하시냔 말입니다!!”
루이넬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자신의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쿤델은 그런 루이넬을 반쯤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황위에 오른 네놈이 정녕 대륙의 평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의 목소리 또한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황제가 지켜야 할 건 황좌가 아닌 국가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겠답시고 모두를 배척하는 네놈이 과연 제국을 넘어 대륙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이제는 의심을 넘어 불신마저 생기는구나!”
“황제의 자리가 안정될수록 제국과 대륙의 평화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애초에 저 외에 황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초라한 돌멩이를 닦는다 해서 원석이 되는 것도 아닌 마당에!”
루이넬은 물러서는 기색 없이 따박따박 말을 이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사람의 가치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다· 하물며 오색의 빛을 뿜는 보석이 흙먼지에 가려져 돌처럼 보였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걸 지금 말이라고···!”
-똑똑
고조된 분위기에서 심상찮은 대화가 오고 가던 와중 문 쪽에서 차분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총장은 바로 출입을 허가했다·
-끼익
루이넬과 다르게 나긋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소녀·
그녀를 발견한 루이넬은 바로 쌍심지를 키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오해하지 마라· 애초에 네놈이 오기 전부터 있었던 선약이다·”
소녀 또한 루이넬의 얼굴을 보고선 적잖이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허나 오래가진 않았으며 곧 총장을 향해 조신하게 고개를 숙였다·
“로열 아카데미 3학년 아린 세벨러스· 총장님과의 면담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금일 총장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던 우시프 제국의 5황녀 아린 세벨러스였다·
“루이넬 오라버님· 기별도 없이 아카데미엔 무슨 일로····”
“네년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가라· 지금 네년의 같잖은 면담보다 더욱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으니····”
루이넬은 아린의 선약을 가볍게 무시하며 적반하장식으로 그녀에게 나갈 것을 지시했다·
“이런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고서 어찌 황제가 되겠다는 것이냐? 나가야 할 사람은 아린이 아니라 너다 루이넬· 더 할 말도 없을 것 같으니 그만 내 방에서 나가라····”
-쾅!
마침내 폭발해버린 루이넬이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쿤델을 무슨 원수처럼 쏘아보던 것도 잠시 대뜸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아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많이 컸구나 아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줄도 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동물이라 했습니다· 언제까지고 오라버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순 없죠····”
그녀가 기세에 눌리지 않는 당돌한 대답으로 맞받아치니 당황한 루이넬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오라버님께서 절 탐탁지 않아 하시는 거 압니다· 하지만 동생된 도리로서 오라버님께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껍데기 같은 존재가 될 순 없겠지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위협이란 게 때로는 사람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고 부족한 저라도 오라버니를 긴장하게 할 작은 위협의 존재가 된다면 그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야말로 오라버님께서 절 인정하셨다는 가장 큰 증거가 될 테니까요”
루이넬은 물론 잠자코 듣고 있던 쿤델까지 입을 벌리게 만들 참으로 당찬 발언이었다·
“하!”
어이가 없어진 듯 몇 차례 헛웃음을 반복하던 루이넬은 이내 허리를 숙이며 아린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 그럼 오라버니된 도리로서 내게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조언을 해줘야겠구나·”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천천히 얼굴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급기야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죽고 싶은 거냐?”
간담이 서늘해지는 살벌한 협박에 아린은 몸을 움찔했다·
“아바마마께서 좀 챙기신다 해서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이래서 근본 없는 핏줄은 안 된다는 거지· 조금만 쥐여주면 뭐라도 된 줄 알고 이리저리 나대버리니····”
루이넬의 눈엔 분노를 넘어선 살기로 가득했다·
“착각하지 마라· 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널 목 졸라 죽일 수 있는 위치다· 아무도 널 지켜주지 않아· 곁에 붙어봤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을 의미 없는 껍데기 같은 널····”
“제 몸은 제가 지킵니다!”
아린은 진심이 담긴 매서운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그 누구도 절 지켜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전 제국의 황녀! 황녀가 되어 자기 몸 하나 지킬 그릇이 못 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요·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 그것이 제가 황녀로서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차분하지만 담대하게·
듣는이로 하여금 진짜 그녀가 맞는지 의구심이 피어오를 정도로
아린은 자신의 굳은 결의를 하나도 빠짐없이 루이넬에게 전했다·
기세에 눌려버린 루이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국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두 황실 일원의 기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똑똑
다시금 문 너머로부터 선명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소 어지러웠던 마음을 한 번에 진정시키는 부드러운 목소리·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야말로 매혹적인 미성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당황한 쿤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잠시 후 총장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금발의 한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쿤델 총장님·”
사람으로 태어나 저 미소를 마주하고서 어찌 화를 낼 수 있을까?
평화의 사절이 방문하기라도 한 듯 금방이라도 불붙을 것 같던 방의 분위기가 한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린의 시선 또한 좀처럼 남성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에 에쉘님?”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이자 얼마 전까지 그녀의 약혼자였던 시안 베르트의 친형·
에쉘 베르트가 총장실에 방문하였다·
“너 너까지 여긴 어쩐 일이냐?”
“중요한 사실을 전해드릴 게 있어· 황자님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
“예· 때마침 아린 황녀님께서도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황녀님을 모셔오려던 참이었습니다·”
“저 저를 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자신을 찾았다고 하니 아린으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께 해드릴 말은 빛의 루멘델님께 맹세코 조금의 거짓도 없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난데 없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대뜸 신에 대한 맹세까지 감행하는 다소 얼떨떨한 상황·
허나 아침의 햇살과도 같았던 그의 싱그러운 미소는 곧 새벽의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어졌으며 방의 분위기 또한 함께 변화시켰다·
“대 대체 무엇을 말하겠다는 것이냐?”
이에 간신히 입을 연 쿤델이 의문을 표하며 물으니
“제 동생 시안에 관한 것입니다····”
에쉘은 환희와 슬픔이 반씩 뒤섞인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 * *
“후우 후우····”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리겐스·
대현자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 이토록 땀을 흘리며 고전하던 것이 얼마 만이던가?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손녀에게·
“그 힘을 학회에 써줄 수는 없었던 거냐?”
복잡한 심경을 담아 질문을 내뱉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루나브·
처절하게 내쉬는 숨소리만이 아득하게 퍼질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된 이상 이 상황을 더 지속할 필요는 없을 터·
리겐스는 생성했던 제한 결계를 해제한 뒤 그대로 방을 나갔다·
그러곤 잠시 후·
“루나브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멜라와 학회원들이 루나브를 부르며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브님! 정신 차리십쇼!”
가련한 숨소리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고 기절한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손녀에게 이런 짓까지····”
놓인 상황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리겐스 학회장이 그녀에게 정신 붕괴 마법(Mental Breakdown)을 시전한 것이다·
상대의 단단한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자백을 유도해내는 정신계 상위 마법·
강도가 심할 경우 자칫 정신적 불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 무시무시한 마법을 자신의 손녀에게 행한 것이다·
아무리 공적인 일을 중요시하는 학회장이라 한들 피를 나눈 혈육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일단 그녀부터 챙기자는 마음에 빠르게 회복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됐어요· 라멜라····”
깨어난 루나브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만류했다·
“저 정신이 드신겁니까 루나브님?”
“들었으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귀 울리니까 그만 소리 지르세요·”
라멜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러기도 잠시
곧 폭우와도 같은 잔소리가 이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모한 짓을 하신 겁니까? 오죽하면 학회장님께서 이 정도로 힘을 쓰셨겠습니까?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잔소리는 나중에 한꺼번에 들을게요· 지금은 아무 말 말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말입니까?”
난데없는 부탁이란 말에 라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나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라멜라밖에 없어서 그래요····”
라멜라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생전 남에게 의지 한 번 하지 않던 그녀가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낯설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모습에 라멜라는 자신의 마음이 자연스레 루나브에게 쏠리고 있음을 느꼈다·
“말씀하십시오· 루나브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