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드러나는 진실 (1)
우시프 제국 북부도시 액실리움에 데빌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마수가 출몰했단 보고가 전해진 지 정확히 반나절 후·
황성에서 파견된 지원군이 마침내 도착했지만 상황은 이미 한참 전에 종료된 상태였다·
사체는커녕 불탄 흔적밖에 남지 않은 현장·
지원군으로선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현장에 작은 의구심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사상자도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매우 적은 상황·
갤라스 영주는 자신의 철두철미한 지휘 덕에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현장에 있던 기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 대처는커녕 데빌 드래곤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며 뭘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공포에 질려있었던 것이 현실·
허나 그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나온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수를 처리한 장본인에 관한 것·
워낙 먼 거리였던데다 검은 망토를 둘러쓰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 성인보단 소년 쪽에 가까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또한 혼자만이 아닌 마치 그의 분신처럼 보이는 기묘한 존재들이 거리 곳곳에 자리를 잡으며 혹여나 있을 2차 피해를 막아주었다고 했는데 일부는 그들에 대해 구원의 존재라 칭하기까지 했다·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냐?”
보고서를 읽던 루이넬 황자는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 그것이 저도 받은 보고서를 그대로 전해드린 터라····”
시종으로선 뭐라 설명할 말이 없었다·
다른 건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칠 수 있다·
허나 데빌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거물급 마수를 고작 인간 한 명이 처리했다는 말은 허황되다 못해 기가 막힐 수준이었다·
“그 망할년에게 온 신경을 부어도 모자랄 판에 이건 또 무슨····”
루이넬은 이를 아득 갈며 보고서를 구겼다·
흘러가는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마치 세상이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에 눈치를 보던 시종이 또 하나의 서신을 건넸다·
“이 이건 갤라스 영주가 개인적으로 보낸 것입니다만····”
“개인적으로 보냈다고?”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황자님께서 단독으로 확인하시면 좋겠다는 말까지 덧붙여 왔습니다· 뭔가 공식적인 보고론 전하지 못한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듯합니다만····”
루이넬은 시종의 손에 들린 서신을 잽싸게 가로챘다·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순식간에 봉투를 뜯어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초반에 적힌 내용은 별것 없었다·
황실에 대한 찬양을 비롯해 현 사태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일종의 하소연 같은 내용·
루이넬은 당장이라도 구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내며 읽었다·
“제 제가 이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또 하나 전해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만····”
“무엇이냐?”
“죽었다고 합니다· 갤라스 영주가····”
루이넬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시종을 약 10초간 쳐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본인의 방에서 몸이 수십 조각으로 찢긴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타살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직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어이없는 마음에 또 한 번 헛웃음을 내다가도 황자의 시선은 다시 서신으로 향했다·
서신의 맨 아래·
한눈에 봐도 굉장히 다급하게 쓴 흔적이 보이는 부분·
“···?”
내용 자체는 확신 없는 추측에 불과했으나 황자의 시선을 끌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도시에 마수가 나타나기 바로 직전 자신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있었는데 그 암살자가 마수를 처리한 장본인으로 추측되며 확신은 없지만 일전에 황성 연회에 갔을 때 보았던 누군가를 굉장히 닮았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아들이자 최근 아린 황녀의 약혼자가 되었던 시····
-똑똑
적막을 깨는 두드림과 함께 루이넬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단순한 노크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 누구인지 알아챈 듯 루이넬은 벌떡 일어나 급히 문으로 달려 나갔다·
-벌컥
다급히 문을 열어젖힌 루이넬은 이내 전율을 느낀 듯 환희에 사로잡힌 미소를 지었다·
“에쉘!”
그토록 고대하고 갈망했던 자신의 친우가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님····”
에쉘은 이전과 같은 온화한 눈웃음으로 루이넬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이냐? 왜 내 부름엔 답하지 않은 거지? 너 없는 동안 내가 느낀 불안과 고통을 설명하자면 아마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루이넬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려는 듯 쉴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럴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비올렛을 죽일 계책을 세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년이 우리를··· 내 말 듣고 있는 것이냐 에쉘?”
황자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에쉘은 변함없는 미소만 유지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루이넬은 급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자신이 알고 지내왔던 그가 맞는 것 같긴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
황제 외엔 위라는 것이 없이 살아왔던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짓눌리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마치 인간이 아닌 지고한 신적 존재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다급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짧지 않은 정적의 시간이 흐른 뒤 에쉘이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짙게 드리워진 어둠이라 한들 작게 밝혀진 빛을 가릴 순 없는 법· 저희는 그 빛을 따라 나아가면 되니까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루이넬의 두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가시죠· 진리의 길이 이어진 곳으로····”
“어 어딜 말이냐?”
“로열 아카데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도 뜬금없는 장소·
황자로선 별로 달갑지 않을 그곳엔 왜 가자는 건지 이유를 물으려는 찰나
“···!”
루이넬은 보았다·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려 했던 그 순간
금발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어느 고귀한 여인의 형상이 에쉘이 뒤로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버린 것을····
* * *
“데빌 드래곤이요?”
“예·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긴 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합니다· 이미 흔적도 없이 전부 소실된 터라····”
액실리움 사태가 발생한 지 나흘이 지난 시점·
워낙 사건이 사건이었는지라 소식은 대륙 전역에 퍼져 멀리 떨어진 로열 아카데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소문으론 검은 망토를 두른 한 남성이 그 데빌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마수를 혼자 처치했다곤 하는데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지금 학회에서도 그쪽에 대한 소식을 여러모로 알아보는 중이라 합니다·”
“····”
이야기를 들은 루나브는 충격에 휩싸인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죠· 대륙의 내로라 하는 상급 기사들도 당해내기 힘든 거물급 마수를 고작 인간 한 명이 쓰러트리다니· 아마 소문이 좀 과장된 모양입니다·”
라멜라는 허황된 소문일 거라 일축했지만 루나브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사람·
확신은 없어도 그 남성이 왠지 시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 그 데빌 드래곤을 처리했다는 사람····”
-벌컥
질문을 이어나가려는 것도 잠시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한 학회원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루나브님!”
“무슨 일인가요?”
노크도 없이 들어온 무례를 차마 추궁할 여지도 없을 만큼 학회원의 얼굴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한 상태였다·
“학회장님께서 지금 루웬에 오셨다 합니다!”
“···!”
루나브는 물론 라멜라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굉장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학회장님께서 왜 갑자기?”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전 기별도 없이 루웬을 직접 방문하신 적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덩달아 분주해진 다른 학회원들과 다르게 루나브의 얼굴은 금세 태연하게 변했다·
마치 올 것이 왔음을 인지한 사람처럼·
그러곤 얼마 안 가 아카데미에 입성한 학회장이 노블관 앞까지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마중 나갈 생각이 전혀 없는지 덤덤히 방에 틀어 앉아 하던 독서를 재개했다·
잠시 후 그녀의 방에 들어선 가람 마법 학회의 수장 리겐스 레인리버·
라멜라를 비롯한 학회원들 전부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 학회장님 기별도 없이 아카데미엔 어쩐 일로···?”
그들을 말없이 내려보던 리겐스는 이내 격양된 어조로 조용히 읊조렸다·
“전부 나가 있어라·”
그 말을 들은 라멜라는 바로 깨달았다·
전부 나가 있으란 말에 루나브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거란 걸·
이전에도 둘 사이에 자주 충돌이 있긴 했으나 오늘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심상치 않았다·
루나브를 바라보는 학회장의 눈빛은 결코 손녀를 바라보는 온화한 시선이 아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향해 전격 마법을 날릴 수 있을 사람처럼 눈가엔 이유 모를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잠시 후 방에 있던 학회원들 모두가 자리를 떠나니 루나브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부탁드린 건 다 해결하고 오신 거겠죠?”
아우람 학회에 관련된 일을 말한 것이었다·
리겐스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화를 꾹꾹 눌러 담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학회장이 아닌 네 할아버지로서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해라· ”
“뭐에 대해서 말인가요?”
“시안 베르트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그제야 불신이 담긴 그윽한 시선으로 리겐스를 바라보았다·
“노델리에 시안 베르트가 있었다는 걸 왜 말하지 않은 것이냐?”
“말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괜히 말해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좋을 일이 없다?”
간신히 제어하고 있던 화가 조금씩 그의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소년이 우리 학회에 끼친 막대한 피해를 벌써 잊은 것이냐?”
“어차피 다 근거 없는 추측 아니었던가요? 뭐 하나 제대로 확인된 사실이 없었던 거로 아는데···?”
“루나브!!!”
마침내 폭발한 리겐스가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아우람 학회의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얘기했더라면 네가 납치를 당할 일도 그들이 학회 내에서 계속 세력을 키울 일도 없었을 것을 넌 어찌하여 계속 방관한 것이냐! 넌 장차 우리 학회를 이끌어갈 미래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대체 넌 학회를 위해 무엇을···!”
“학회의 미래요?”
미래라는 말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비소를 지었다·
“제가 왜 학회를 위해 살아야 하나요? 학회는 제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뭐라?”
“제가 학회에 있지 않았더라면 납치될 일도 없었을 테고 저를 납치하겠답시고 아우람 학회가 세력을 키우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요? 결국 학회라는 존재는 제게 좋은 일은커녕 나쁜 일만 갖다줬는데· 이런 학회를 위한답시고 제가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리겐스의 얼굴이 돌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20년을 같이 살아도 신뢰가 안 생기는 게 사람 관계라고· 맞는 말인 것 같아요·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전 학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실험체였을 뿐· 애초에 저희 사이에 정이라는 건 있지도 않았잖아요?”
“그래· 너에게 있어 중요한 건 학회가 아닌 그 시안 베르트란 소년이냐?”
“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네 뜻은 잘 알았다· 이 모든 것은 네 자초한 일· 뒤늦게 후회하지 마라 루나브····”
무언가 결심을 굳힌 리겐스는 바로 마나를 발현함과 더불어 주변에 제한 결계를 생성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에요· 다만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 9성급 대현자이자 가람 학회의 수장인 리겐스 레인리버의 손녀잖아요? 아마 며칠 요양 좀 하셔야 할 거예요·”
루나브의 눈은 끝까지 의연했다·
고작 사람 두 명이 자리하고 있는 협소한 방안에서는 도시 하나는 가뿐히 날려버릴 정도의 거대한 마력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