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황제의 순방 (3)
상황은 비교적 일찍 종료되었다·
출현한 마수는 ‘빅 스네일’로
서쪽 황폐한 숲 일대에 서식하는 거대한 달팽이형의 중급 마수였다·
이들은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녹이고 오염시킬 수 있는 고농도의 산성액을 분비하는데 방치할 경우 주위에 심한 악취를 살포할 우려가 있어 초기 진압이 매우 중요한 놈들이었다·
이에 베르트 공작의 지휘 아래 정화작전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빅 스네일을 성공적으로 소탕함과 더불어 오염의 확산도 막아낼 수 있었다·
황군이 지원 병력으로 추가된 덕에 더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군·”
디오네 황제는 소탈하게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마수들도 토벌하였으니 이제 그만 후방으로 가시지요· 폐하·”
“재촉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네· 그러고 보니 황녀는 잘 대피했는가?”
뒤늦게나마 생각난 딸의 안위·
그래도 별 문제없이 후방으로 대피했음을 기사들이 알려주었다·
“다행이군· 바로 가도록 하지·”
불 속성 마법사들이 사체를 처리하는 동안 황제는 황녀가 기다리고 있는 후방으로 향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바마마·”
후방 캠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린 황녀가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다행히 별문제 없이 조용히 기다렸던 모양이다·
“···!”
얌전히 고개를 들던 황녀의 눈이 나와 마주치고 말았다·
전보다 더 강렬해진 경멸의 눈빛·
이건 뭐 친목은커녕 악감정만 쌓여버렸군·
아버지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지만 썩은 동아줄을 잡을 바에야 차라리 이편이 나을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전선의 태양은 어느덧 서쪽 어귀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만 벨리아스로 돌아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영지 내 관리인들에게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전언을 보내놨습니다·”
아버지는 이만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당사자는 원치 않는 듯 보였다·
“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내친김에 이곳 후방캠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하지·”
“하 하오나 폐하· 아무리 그래도····”
“굳이 여기서까지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고 싶진 않네· 나 역시 비상상황에선 한 명의 기사로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네와 나눌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비록 경계문 근처 후방캠프라 해도 이곳 또한 명백히 전선이었다·
황제가 전선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니 위험은 말할 것도 없으며 전례조차 없던 일이다·
허나 황제로부터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아버지는 바로 황실의 거처를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거처가 지어지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는 아린 황녀·
황제는 그렇다 치고 저 황녀도 여기서 잔다는 건가?
뭐 내 알바는 아니지·
황제의 순방이 끝난 시점에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황녀와의 만남도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지·
나는 별다른 보고 없이 진영캠프로 향하는 기사들과 함께 자연스레 복귀하였다·
* * *
“윌리어스 자네와 이렇게 술잔을 나누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군·”
전선에서의 음주는 명백히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길시 엄한 군법으로 다스려지지만 법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록 술잔에 술이 따라져있다곤 하나 공작은 아직 한 잔도 비우지 않고 있었다·
“시안이라고 했나? 자네 아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어엿하더군·”
황제의 진심어린 칭찬에도 공작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배울게 많은 아이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배울게 많다라···”
황제는 거하게 술잔을 비웠으며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로 물었다·
“저 아이도 가문의 의지를 잇겠다고 하던가···?”
공작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저 두고 볼 뿐이지요· 스스로가 원한다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황제는 소탈하게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그래 자네도 대륙의 수호자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버지이지 않은가? 부모로서 자식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한풀이나 할 것 같던 황제의 낯빛은 곧 무겁게 변해갔으며 자연스레 분위기 또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또 한 번 술잔을 비워낸 황제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제국 곳곳에서 몇몇 귀족들을 상대로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 특정세력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말이지····”
“공통점은 있는 겁니까?”
“공통점? 있지· 살해된 귀족들이 모두 하나 같이 죄악을 일삼았던 부패관리들이었다는 거야· 게다가 발견된 시체들은 죄다 끔찍하게 토막 나있었고····”
“···!”
공작의 눈빛이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어떤 놈들의 짓인지 바로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설마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이····”
“아직은 심증뿐이라네· 허나 황성 내에선 이미 그들의 짓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지· 애초에 그놈들 말고선 누가 그런 짓들을 하겠는가?”
이른바 귀족사냥·
세상에 이런 미친 짓을 감행할 집단은 한 곳 뿐이었다·
“허면 어서 조사단을 편성하여· 놈들에 대한 추적을 개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적? 뭐 그래야지· 어쨌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놈들인데 당연히 그래야겠지····”
허나 황제의 관심은 정작 다른 곳에 있어 보였다·
술잔을 굴리는 모습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었다·
“자네가 봤을 때 5황녀의 위치는 어떤 것 같나?”
다소 뜬금없는 언급이었다·
“사 사실상 황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지 않습니까? 받쳐주는 세력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받쳐줄 세력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어디에 이용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
공작은 황제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아린 황녀를 그놈들과 연관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겁니까?”
황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위와는 매우 먼 위치·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
지금이야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어림도 없겠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현재 제국의 정세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런 움직임이 진짜로 있다면 현 황후 측 세력인 ‘네펠리스’ 후작가일 확률이 컸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래도 내가 온전히 버티고 있는 한 큰 문제는 없을 걸세·”
황제는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허나 이에 대해 황제가 얼마나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지 공작은 모르지 않았다·
“내 자네한테 황제가 아닌 친우로서 부탁하나만 하겠네·”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자네 보다 먼저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아이를 조용히 빼주게나· 황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냥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살아줬음 좋겠어·”
현 황제의 사후 뒤 예고되는 거센 피바람·
황제는 그런 피바람 속에서 그 어린 황녀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딸이 평화롭게 살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작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참 황제 짓도 할게 못 돼· 맘 같아서야 그 시꺼먼 놈들이 황성에 있는 머저리 놈들을 모조리 다 죽였으면 좋겠어·”
황제는 취기가 조금 오른 듯 과한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공작 또한 여러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 시기에 그들은 왜 나타난 것일까?
신들 사이에서도 신으로 임명받지 못한 자·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대륙 제일의 살수 집단 미스트·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외줄타기 같던 대륙 정세에 큰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이 결코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미스트····”
공작은 술잔 속 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날 밤 골짜기에서 마주하였던 정체불명의 형상이 선명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 * *
해가 지는 가 싶더니 어디선가 먹구름이 몰려왔다·
-후두두둑
이윽고 검은 하늘에 굵은 장대비가 대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
연이어 들리는 무지막지한 천둥소리·
남들이라면 이불 속에 파묻혀 나오는 것조차 꺼리겠지만 지금 내 몸은 매우 근질거리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게 다예요?”
이야기를 들은 에밀리가 한심 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가 더 필요해?”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황녀님이잖아요! 평생 한 번 뵐까 말까한 황녀님 에스코트를 겨우 그런 식으로 끝내신 거냐고요?”
누가 들으면 데이트라도 한 줄 알겠네·
고작 순방 도는 거 호위 좀 한 게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고?
“도련님 진짜 무심하신 거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시면 안 돼요! 황녀님도 여자인데 세심하게 달래드렸어야죠!”
세심한 거 좋아하네·
여기가 무슨 놀이터도 아니고 그딴 거 챙겨 주길 원하면 예쁘게 차려입고 꽃밭이나 가라지·
“자고로 여자는 겉은 단단해보여도 속은 매우 여려서 부드럽게 대해주지 않으면 상처받아요! 도련님 자꾸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하시면 나중에 결혼 못 하실 걸요?”
결혼 상담까지 해주고 아주 충직한 시녀 납셨다·
어디 사는 변태 마검을 떠올리게 하는 매우 뜻 깊은 조언이네·
더 듣다간 내 귀에서 피만 날라·
안 그래도 나갈지 말지 적잖이 고민하던 차에 우리 친애하는 시녀님께서 결정을 내려주셨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설마 오늘도 운동 나가시려고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난리를 친지 하루밖에 안 지난 시점이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을 놓칠 순 없었다·
비가 오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생물들이 있듯 이곳 역시 비오는 날에만 나타나는 마수들이 있다·
빗물에 젖은 땅이 습지가 되면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질척한 마수들이 등장하는데 또 그놈들의 피 맛을 안 볼 수가 없단 말이지·
생긴 건 다른 마수들보다 조금 더 꺼림칙할 진 몰라도 다 몸에 좋은 것들이니 가려선 안 될 것이다·
“운동은 하루라도 안하면 흐름이 끊기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옷을 갈아입은 뒤 기둥에 걸린 흑색 우의를 몸에 둘렀다·
케이람까지 품속에 넣으며 그대로 막사 문을 나서려는 순간·
-저벅저벅
뜬금없이 낯선 발소리가 들린다·
방향으로 보나 울림으로 보나 분명 본 막사로 오는 발걸음이었다·
뭐지? 이 시간에 기사들이 순찰 올 리도 없는데?
청각을 곤두세워 소리에 더 집중해 보니 발걸음이 한 명이 아닌 다수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제일 선두로 오는 걸음에 더 감각을 기울여 보았다·
익숙하진 않아도 낯익은 감각·
조신하면서도 당당한 느낌·
기사보다는 귀족·
어른이 아닌 애·
남자가 아닌 여자·
분명 멀지않은 시간 속에서 접해본 적이 있는 발걸음·
“···!”
그 정체불명의 걸음이 막사 앞에 이르고 나서야 난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열리는 천막·
황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붉은 색의 브로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난데없는 밤손님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내 차림새를 살펴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어디 가는 거야···?”
분명 후방캠프에 있어야 할 아린 황녀였다·
“누가 오셨···?”
낯선 이의 방문에 에밀리도 고개를 내밀었다·
황녀의 얼굴을 알 리 없는 그녀였지만 황녀의 가슴에 달린 증표를 확인한 순간 아연실색한 얼굴로 변모하고 말았다·
“화 황녀니이이임!?”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괴성·
설상가상으로 품 안에서 검은 안개마저 피어올랐다·
[좋은 아침 주인아~]
아침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음? 우리 주인 왜 이렇게 굳어버렸어?]
이리저리 기지개를 피던 그녀는 말없이 가만있는 내 몸을 꾹꾹 찔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문 앞에 자리하고 있는 황녀를 발견한 순간 무척 의외라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주인아 너 이런 취향이었니?]
들을 가치가 없는 소리는 무시가 답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여기로 오면 널 만날 수 있다 해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응· 혹시 바쁘지 않으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대화 요청에 살짝 어이가 없었다·
밖을 보니 다수의 수호기사들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이거 갑자기 보는 눈이 급 많아진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운동하겠다고 이탈해버리면 의심만 받겠지·
오늘은 밤운동을 조금 늦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들어오세요 황녀님·”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