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검은 피의 일족 (3)
매일 아침 7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분주한 액실리움 거리에 나타나 일을 시작한다·
단순 짐을 옮기는 간단한 일을 비롯해 치유 아티팩트 제작 등 인간의 힘으론 수행하기 힘든 난해한 일을 마법으로 해결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보수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보수는 전부 그날의 식량을 구매하는데 쓰이며 그렇게 구매한 식량은 모조리 슬럼가의 주민들에게 나눠준다·
이것이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보리스의 개인 일과·
나로선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의 믿지 못할 정보였다·
액실리움에 상주하고 있던 대원들조차 처음엔 그가 보리스였다는 걸 눈치 못 챘다고 한다·
뭐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도 얼굴만 같을 뿐 말투 성격 심지어 걸음걸이 같은 세부적인 요소까지 종합해봤을 때 도저히 내가 알던 보리스 르헬름이란 생각인 안 들 정도로 심한 거리감이 느껴지니까·
허나 아무리 겉모습을 숨겼다 해서 사람의 본성까지 숨길 순 없는 법이다·
저 거짓된 가면 너머로부터 선명하게 풍겨오는 마력의 냄새가 그 증거·
인재란 자고로 그 능력을 정확히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인재라 불린다는 말이 있다·
보리스가 이곳 슬럼가 출신이었다는 건 전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저주받은 검은 피의 일족이라 멸시당하며 사람 취급 자체를 거부당했던 것이 그의 치욕스런 과거·
허나 시간상으로 딱 2년 전 도시에 순방을 왔던 루이넬 황자가 그를 발견하고선 본인의 수하로 거두어들이며 빛을 보게 되고 이후엔 그 악마 자식의 눈에 들어오면서 가지고 있던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되었다·
끝내는 마법학회장이란 자리에까지 올라 제국의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했지·
놈이 이곳에서 무슨 삶을 살았고 이곳 주민들로부터 어떤 존재로 여겨왔는지에 대해선 사실 내 알 바 아니다·
특별히 알고 싶은 마음도 없지·
다만 지금 보는 것처럼 슬럼가의 주민들 대부분이 그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하고 있는 거로 보아 이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어렴풋이 추측할 순 있으리라 본다·
저 황홀경에 빠지다 못해 급기야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주민들의 얼굴을 보라·
정말 구원자라는 말이 제대로 어울리는군·
나로선 눈에 잔뜩 켠 쌍심지를 도저히 끌 수 없는 상황이지·
[다녀왔다 주인아·]
잠시 어딘가를 다녀온 케이람이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어땠어?”
[전혀~! 발톱에 때만큼도 안 느껴져· 단순히 어디 숨겼다 해서 이 정도까지 기운이 안 느껴지진 않아· 내가 장담하는데 이 슬럼가는 물론이고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성서 그놈은 없을 거야·]
성서 히스크레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성서의 주인인 보리스는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그렇다 해서 저놈이 내가 아는 보리스가 아니라는 걸 뜻하진 않는다·
지금도 욱신거리는 심장의 상흔이 녀석이 맞다고 계속해서 신호를 던져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자기 이름이 보리스 르헬름이라며 아예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하나·
저건 보리스의 원래 인격이 아니다·
아마도 본래의 인격이 아닌 마법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인격일 터·
일전에 내가 마법을 써서 에쉘의 종자였던 켈린의 인격을 바꾼 것처럼 그 또한 어떤 힘에 의해 새로이 창조된 인격이 몸을 대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문제는 누가 저 능구렁이의 인격을 바꾸었냐는 건데····
[거 누구 생각인진 몰라도 장난질 한번 참신하네·]
“너무 참신해서 속이 뒤집어질 정도지····”
[어쩌냐 주인아? 저 뭣도 모르는 껍데기 놈을 죽여 봐야 네 성에도 안 찰 거 같은데?]
차마 부정을 할 수 없어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내가 감히 단언하겠는데 내가 창조할 수 있는 ‘그림자의 인격’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대륙을 통 들어 다섯 사람도 채 안 될 것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원래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인격을 만든다는 건 기존에 있던 수천 개의 인격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마력이 방대하고 마법 등급이 높다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지·
경이로운 속성 수치를 보유한 나조차도 거의 전력을 쏟아부어야지 가능한 마법을 그저 지나가는 방랑 마법사가 우연히 해줬을 리도 없다·
“성서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겠지····”
특별히 다른 누군가를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
보리스는 스스로의 인격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게 바뀌어 버린 본인을 내가 마주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했는지도 모르지·
내가 아는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그래 그러긴 싫지만 내 기꺼이 인정은 하려 한다·
네놈의 그 발칙한 계획이 제대로 들어맞았다고·
지금의 난 저 바뀌어버린 보리스 르헬름을 죽일 마음이 없다·
껍데기만 같을 뿐 결국 자신이 여태 뭘 해왔는지 전혀 기억 못 하는 등신을 죽여 봤자 내 심장에 새겨진 원한의 상흔이 없어지지 않는다·
설사 죽였다 해서 녀석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인격이 함께 소멸된다는 확신도 없지 않은가?
결국 내가 해야 할 건 보리스의 진짜 인격을 찾는 것·
더불어 성서가 있는 위치까지 알아내서 놈들에 대한 모든 걸 완전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주에게 큰소리치고 온 보람이 없지·
빛이 들지 않은 슬럼가에도 밤은 찾아오는 법·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의 그늘이 슬럼가를 드리우면서 구원자의 보금자리에 머물렀던 이들도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마 집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볼품없는 움막·
슬럼가의 다른 가옥들과 비교해도 훨씬 초라하면서도 쓸쓸함이 가득하다·
내게는 다 가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초라한 움막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장에 닿을 만큼 사방에 쌓인 책들·
어느 고고한 학자의 방을 연상케했다·
그 즐비한 책들 사이에서 처량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 사람·
“다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는 인기척만으로 나인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기다렸다?”
“예····”
“내가 뭘 할 줄 알고?”
“저를 죽이러 오신 것 아니십니까?”
낮에 그 난리를 피워놓고 아니라 하는 것도 우습지·
“내가 왜 널 죽이려는 진 알고?”
“모릅니다····”
기분 더럽다·
그토록 갈망했던 복수의 대상을 빼닮았지만 내면은 전혀 다른 존재·
정말 참신하다 싶을 정도로 역한 기분이다·
“염치없는 질문인 줄은 압니다만 그래도 묻겠습니다· 혹 제가 일전에 어떤 큰 잘못을 당신에게 저지른 겁니까?”
염치없다는 말로는 충족이 안 될 만큼 참으로 뻔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진심으로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리겠습니다·”
녀석은 급기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에 이르렀다·
“허나 정말 죄송스럽게도 제겐 당신에 대한 건 물론 지난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이 없다고?”
“예!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게는 심각한 기억 장애가 있어서····”
기억 장애라·
하기야 인격이 바뀌어 있는 동안엔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 자체를 못 하는 만큼 저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적어도 자신의 인격이 바뀌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제국의 황자님이신 루이넬 세벨러스님께서 액실리움의 순방을 오셨을 때입니다· 당시 전 이 낙후된 슬럼가로부터 지원을 요청하고자 황자님을 찾아갔었는데 정확히 황자님의 얼굴을 딱 뵈었던 시점에서 기억이 끊겼습니다· 그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 슬럼가로 돌아와 있었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무려 2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기억이 돌아온 시점은?”
“한 달이 조금 안 됐던 것 같습니다····”
루웬에서 놈을 놓쳤던 시점과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는다·
성서의 힘을 통해 도망친 이후부터 인격이 바뀌었다는 건가?
내가 알고 있던 녀석의 인격과 지금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인격·
이쯤 되니 과연 어느 쪽을 보고 놈의 진면이라 칭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이딴 걸 가지고 난 왜 혼란스러워 하는 거지?
더 이상 얼굴 맞대고 있는 것도 짜증난데 그냥 뒷일이고 뭐고 죽여 버려?
“저를 죽이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이 죄 없는 슬럼가의 주민들만은 건들이지 말아주십시오! 그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얼굴을 잔뜩 구기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저를 비롯한 이곳의 사람들은 존재 자체를 죄로 여겨지며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검은 피가 흐르는 저주받은 일족이라 불리면서 말이죠····”
그는 호소라도 하려는 듯 애절한 눈을 떠 보이며 슬픈 감정을 토해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단순히 얼굴도 모르는 이전 세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요!”
녀석의 목에 둘러진 하얀 붕대에 절로 시선이 갔다·
신마전쟁 이전의 구시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질러 신들의 분노를 사 이에 대한 죄악의 표식으로 몸의 검은 피가 흐르게 되었다는 일족·
검은 안개의 신을 추종해선 안 된다는 금기가 대륙에 뿌리내렸던 것처럼·
이들 역시 그저 존재 자체가 불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어쩌면 우리와 의도치 않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저 사람들도 결국 당신과 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이 행복하고 똑같이 슬퍼할 권리가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게 네놈의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똑같은 인간이라고?
과연 전생의 너희도 그리 생각했을까?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건너뛰며 너희를 위해 모든 걸 바친 동안에도 네놈들은 날 신뢰하지 않았다·
인간은커녕 쓰다 버릴 인형취급이나 하며 그저 음흉하게 지켜만 봤겠지·
네놈의 일족이 어떻건 몸에 무슨 피가 흐르든 내 알 바 아니다·
네놈은 그저 모든 걸 바치고 헌신해왔던 나란 존재의 등에 배신의 칼날을 꽂은 복수의 대상일 뿐·
같잖은 고민은 여기까지·
더는 미련하게 망설일 필요 없을 것 같다·
놈의 진짜 인격이 어디 있건 상관없이 더 이상은 네놈의 가증스런 면상을 마주하며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결심을 굳힌 나의 손이 서서히 케이람으로 향하던 순간
“보리스!”
움막 밖에서 어느 걸걸한 남성의 부름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보리스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갤라스님께서 네놈을 찾으신다! 지체할 여유는 없으니 속히 나오도록!”
인기척으로 봤을 땐 다섯 명 정도·
묵직한 쇳소리도 나는 걸로 봐선 슬럼가의 주민들이 아닌 액실리움 소속의 기사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누구? 갤라스?
“여 영주님께서 저를 왜?”
“가보면 알 것이다·”
기사들은 이유는 설명하지 않으며 그저 막무가내로 데려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다·
전생의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거나 혹은
전생의 내가 죽인 사람이었거나·
갤라스 에이번·
1황자 루이넬 세벨러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귀족이자 액실리움의 영주·
더불어 내가 처리했던 정화 작업 대상 중 하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