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불안 (3)
로열관에서 허겁지겁 나온 황실 일가는 그대로 도망치듯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아직 총장과의 만남 등 다른 일정도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다 상관없어지기라도 한듯 그 누구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 일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지고해 마지않는 황실 일가가 겨우 공작가의 어린 자제한테 모욕을 당하다니요? 이런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네로비앙이 비올렛에게 따지듯 말했다·
이에 보다 못한 파비앙이 그를 보며 소리쳤다·
“조용히 해라 네로비앙! 이게 다 네놈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더냐?”
“뭐 뭐야? 왜 갑자기 나한테···?”
-꽈악
급기야 파비앙은 네로비앙의 옷깃을 붙잡으며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그걸 그놈이 어떻게···?”
사실을 들은 네로비앙은 아연실색하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분명 흔적을 전부 지웠다고 생각했건만 대체 그 사실이 어디서 퍼졌길래 당사자의 귀에 들어갔단 말인가?
시안이 알아버린 이상 그것이 아린이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그리고 그 사실이 만약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그때는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펼쳐질 게 뻔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린도 분명 형제간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이해해줄 거예요·”
“누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아린과의 만남도 끝났으니 이제 황성으로 돌아갈까요? 약속을 지켜주었으니 저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선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을 종료시킨 비올렛은 그만 황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두 황자들로선 떠날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답답할 노릇이었다·
호시탐탐 황좌의 기회를 엿보는 자신들이 눈엣가시로 여겨도 안 이상할 판에
이런 거대한 약점을 쥐고서도 그냥 넘어가 주겠다니·
형제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 마차에 오른 비올렛은 눈을 감고선 그대로 상념에 잠겼다·
인간의 가장 오랜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미지에 대한 공포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했다·
검에 베였을 때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검에 베이기 전 그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저들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자신들의 약점을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그 소년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을 테지·
‘틀림없어·’
세실리아의 목이 눈앞에 나뒹굴었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 눈· 그 웃음· 그 살기·
몸 안에 새겨진 각인처럼 절대 잊을 수 없던 흔적·
죽을 때까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모습·
‘틀림없다고!’
살면서 공포와 두려움이란 것을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그 감정을 선사해준 남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굴욕을 선사해준 남자·
지금 이 순간 비올렛은 확신할 수 있었다·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이자 아린의 약혼자인 시안 베르트가
‘그놈이야!’
자신과 에쉘이 찾던 바로 그 암살자라고·
* * *
아티팩트 전령구·
마력이 담긴 마법 오브를 통해 공간적으로 떨어진 서로의 말을 전달하게 해주는 일종의 통신장치다·
최근 학회에서 본격적인 상용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리겐스 학회장이 그녀에게도 하나 지급하긴 했으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나서야 이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루나브였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이해 못 하셨다면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드릴 순 있어요· 필요하신가요?”
리겐스의 거센 되물음에도 루나브는 늘 그렇듯 무덤덤한 어조로 답할 뿐이었다·
그녀는 학회인들과 약속한 대로 노델리에서 있었던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리겐스에게 전했다·
물론 시안에 대한 사실은 전부 배제했으며 미스트에 대한 것도 근처를 지나갔던 용병들이 도와줬다고 조리있게 둘러댔다·
설사 시안에 대한 건 뺏다 하더라도 가람 학회 안의 꽤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단 사실과 그들이 한 번 더 루나브를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리겐스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다·
“최근 마서에 관한 정보를 학회 측에 요구했다고 들었다·”
“네 맞아요·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노델리에 간 거였고요·”
“너답지 않구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한 것이냐?”
“애초에 저답다는 게 있긴 했었나요?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어요· 굳이 학회에 알려서 도움을 받고 싶다기보단 혼자 조용히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전령구 너머에서 리겐스의 불편한 신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다는 속마음이 엿보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복귀하는 학회인들에게 자료 하나를 보냈어요· 시간상 곧 도착하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자료 말이냐?”
“지금 가람 학회 안에 숨어있는 아우람 학회인들의 명단이요·”
“···!”
눈에 보이진 않아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리겐스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아마 대부분은 들어가 있을 거예요· 이번 학기 끝나고 제가 돌아갈 때까지 싹 다 정리 좀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러시라고 드리는 거니까·”
“그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 서야···!”
“그럼 방학 때 뵐게요· 할아버지·”
용건을 마친 루나브는 매정하게 통신을 종료시켰다·
이를 뒤에서 전부 지켜본 라멜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물었다·
“사 사실입니까?”
“뭐가요?”
“지금 루나브님께서 리겐스님께서 전하신 이야기들 말입니다· 그게 다 사실이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학회에서 라멜라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학회 일에···?”
“바람보다는 안개라 해야겠죠·”
루나브의 눈빛이 순간 단호하게 빛났다·
“예?”
“아니에요· 그보다····”
-쾅쾅쾅!
“어이! 후배님 안에 있지?”
곰이 두드리는 것 같은 묵직한 울림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챈 루나브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저 바보 선배는 왜 또····”
“나 나가볼까요?”
“아니요· 제가 나갈게요·”
사실상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그녀의 방에 찾아온 첫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나름 그 첫 주역이 다른 사람이길 내심 바랬지만 딱히 그여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루나브는 편안히 문을 열었다·
“아 드디어 나왔네! 큰일 났어! 큰일!”
“왜요? 시안 선배가 대련 안 해준다 하던가요?”
“그것도 큰일··· 아니지! 그게 아니라!”
세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두꺼운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게 긁어댔다·
“시안 그놈이 자퇴서를 냈대!”
“···!”
무심했던 그녀의 눈이 순간 찢어질 듯 크게 번뜩였다·
* * *
탁상에 올린 봉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총장이 이내 격양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냐?”
“보시는 그대롭니다· 이미 행정실에도 하나 제출하고 왔습니다·”
굳이 뜯어서 확인해볼 필요 없도록 봉투에 큼지막이 써놓기까지 했건만
가기 전에 안경이라도 하나 선물해 드려야 하나?
자퇴서·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기 위한 나의 의사를 적어놓은 것이다·
“네놈이 지난 2년 동안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벌여왔음에도 난 네놈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느냐?”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네놈의 그 수상쩍고도 은밀한 모습을 두고두고 지켜보며 파헤치려 한 것이 가장 컸다· 근데 그걸 파헤치긴커녕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지· 최근의 일을 포함해서····”
나는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한데 그 수상함이란 그 수상함은 다 남겨놓고선 이제 와 떠나겠다고? 지금의 네 신분을 보장해주는 아카데미를 떠나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
“그걸 총장님께 말씀드릴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
내 단호하면서도 무심한 대답에 총장은 질린다는 듯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이거라도 말해 보거라· 내가 이대로 널 보낸다면 네놈이 이 대륙에 이름을 날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겠느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는 차마 바로 답하지 못했다·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아닌가 보구나· 그럼 난 네놈을 더더욱 보낼 수 없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구름 속의 번개 같은 널 이대로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지금의 이 자퇴서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총장님의 의사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전 근시일 내에 이 아카데미를 떠날 겁니다·”
“····”
내 확고한 의사를 더 이상 꺾을 수 없음을 확인했는지 총장은 말이 없었다·
“언제 말이냐?”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그 아이 때문이냐?”
나나가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아예 없진 않습니다·”
사실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무방하지·
“내가 네놈에 대한 걸 세상에 퍼트린다면 어쩔 것이냐?”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조금 구차하시네요· 제자의 밝은 앞날을 응원해주셔도 모자랄 판에 그런 훼방을 굳이 하셔야겠습니까?”
“잘도 제자라는 말을 입에 담는구나·”
그래도 당신에게 배운 것들이 없지 않아 있어서 말이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네놈이 지금 그 문을 나가는 이상 다시 나를 볼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선의인지 악의인지 모를 그의 마지막 경고가 들려왔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부디 이곳에 오래오래 계십시오·”
악담으로 들렸는지 총장의 미간이 골짜기마냥 찌푸려졌다·
이제는 다시 오를 일 없는 본관의 계단을 내려오며 1층에 이른 순간 익숙한 두 얼굴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맞이했다고 하기엔 보는 시선이 영 매끄럽진 않았지만·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루나브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자퇴서 내셨다면서요· 사실이에요?”
소문 참 빠르네·
딱히 숨길 것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물어봐도 돼요?”
“별거 없어· 그냥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서 그래·”
애초에 내가 아카데미에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학생이라는 신분의 가림막을 통해 내 진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허나 그 가림막이 이제 제구실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겠지·
그게 다다·
“····”
루나브는 아무런 말 없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은 많지만 할 수는 없다는 고뇌의 흔적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선배는 참 끝까지 제멋대로네요·”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더 제멋대로 굴고 싶은 걸 애써 참는 중이란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뭐 이런 기분도 이젠 끝이겠지·
더 이상 이 당돌한 후배님과 부딪힐 일도 없을 것이다·
“어이! 시안 베르트! 날 두고 멋대로 떠나면 어쩌자는 거냐!”
이번엔 세트 녀석이 다가와 쌍심지를 잔뜩 켠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 약속 잊지 않았겠지? 노델리로 안내만 해주면 나랑 싸워주겠다던 그 약속 말이다! 설마 잊었다고 하면 곤란···!”
“해줄게·”
벙찔 정도로 빠른 답변에 세트 녀석은 바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 지금 뭐라고?”
“해준다고· 아카데미 안에선 곤란하니까· 있다 밤에 루웬 밖으로 나와·”
벙찐 얼굴이 환호로 바뀌는 데엔 한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