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불안 (1)
“몸은 괜찮으세요?”
“간만에 푹 자서 그런지 개운하다 못해 날아갈 정도야! 이 컨디션이라면 시안이랑 붙어도 이길 수 있겠는데?”
그간의 걱정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세트의 무모한 발언에 루나브는 정색으로 화답했다·
“농담이야 농담! 뭔 말을 못 하겠네····”
세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거친 모래바람을 헤치며 뒤늦은 귀환길에 오른 루나브와 세트·
분명 떠날 땐 셋이었지만 올 때는 둘이 되어버린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 물어보실 거예요?”
“내가 뭐 물어볼 자격이나 있겠냐? 너희 학회 일이야 네가 원해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나란 놈은 일이 벌어졌는데 팔자 좋게 잠이나 자고 있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부끄러워· 애초에 걔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편히 귀환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세트는 어물쩍 입맛을 다시며 솔직한 심정을 표했다·
“대충 보자면 시안한텐 우리가 모르는 어떤 뒷세력이 있는 거잖아? 가지고 있는 힘도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선 거고?”
“그런 셈이죠····”
그 범주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가 문제였다·
“그럼 된 거지 뭘 더 캐묻겠어? 원래 남자는 애인도 모를 비밀이 한두 개쯤은 있는 법이야· 라이벌로서 그런 건 존중해줘야 한다고!”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쿨하게 넘기는 모습에 호감이라도 느낀 걸까?
루나브는 평소와 다른 약간의 존중이 담긴 눈빛으로 세트를 바라보았다·
“역시 내 라이벌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나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쑥쑥 자라나지 않겠어? 좋아!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이전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가혹한 수련에 돌입해야겠군! 도와줄 거지 후배님?”
“혼자 하세요·”
패기로운 제안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는 무신경한 답변이었다·
단순한 남자라 다행이지만 너무 단순해서 문제라는 생각이 대뜸 확 밀려온 루나브였다·
그렇게 이틀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출발했을 때와 비슷한 새벽쯤에 이르러서야 둘은 루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엥?”
성문 쪽을 본 세트는 이내 눈을 의심했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두 배는 늘어난 기사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뭐야? 기사들이 뭐 이리 많아졌어? 이거 몰래 들어가긴 글렀는데?”
“그럼 그냥 들어가죠 뭐·”
별고 아니라는 듯 루나브는 성큼성큼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세트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지켜봤다·
“신원 확인을··· 엥?”
근엄한 목소리로 신원 확인을 하려는 것도 잠시 어디서 본 듯한 낯설지 않은 얼굴에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 루나브 레인리버님?”
그녀는 둘째 치고 덩치 자체가 신원 확인인 세트까지 등장하니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카데미 학생분들께서 이 시간에 여긴 왜···?”
“체험 학습을 마치고 방금 돌아오는 길이에요·”
“체험 학습 말입니까? 저희는 들은 게 없습니다만····”
“그럴 거예요· 승인 없이 몰래 갔다 온 활동이거든요· 가자마자 징계 처리 받으려고요·”
잠시 성문 주위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이 일단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죠·”
“고마워요· 피곤하게 선창 같은 건 안 하셔도 돼요·”
루나브는 뭐 하고 있냐는 듯 세트를 보며 어서 오라는 손짓을 날렸다·
이를 지켜보던 세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가서 막무가내 소리를 밥 먹듯 들어왔던 자신이지만
이 후배님한테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고·
“근데 경비병들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아 그게 돌아가시면 듣게 되시겠지만 최근 아카데미 안에서 살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었습니다·”
“살인 사건이요?”
두 남녀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예· 뿐만 아니라 조만간 제국의 귀빈들께서 방문하신다는 공문이 내려진 터라····”
“왔습니다!”
그 순간 대로변 쪽에서 한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경비병들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제국 황실 일가가 방금 서쪽 성문을 통과했습니다!”
* * *
졸업생들이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다·
옛 추억도 돌이킬 겸 휴식의 목적으로 찾아오거나
혹은 형제 지인 등 아카데미에 다니는 재학생들을 격려하려고 찾아오거나·
사실 아카데미 자체가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해있다 보니 이마저도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일반 귀족이 아닌 황실의 일원이 그것도 세 명씩이나 한꺼번에 찾아온 경우는 아카데미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아카데미의 맑은 공기를 맡으니 참 좋네요· 여러분들도 그렇죠?”
“예· 잊고 있던 추억의 향수 같네요····”
그녀에게 맞춰주려는 듯 어색하게 웃는 네로비앙과 달리 파비앙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린은 로열관에 있을 겁니다· 얼른 가시죠·”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는 기색이 다분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급하게 갈 필요 뭐 있나요? 이왕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나온 거 천천히 즐기다 가면 되죠····”
루웬의 거리를 황홀하듯 바라보는 비올렛과 달리 파비앙과 네로비앙의 얼굴은 그야말로 구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체 자신들을 얼마나 고문시킬 작정으로 이런 곳까지 데려온 건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다·
황실 일가의 방문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막내 아린이었다·
“우시프 제국의 황녀 아린 세벨러스· 언니와 오라버님들을 뵙습니다!”
아린은 형제들을 향해 바로 인사를 올렸다·
“반가워요 아린!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많이 걱정했었는데 건강해 보여서 참 다행이에요·”
비올렛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파비앙과 네로비앙도 마지못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 먼 아카데미까진 무슨 일로···?”
“일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꽤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래서 다 같이 아린을 위로해주자는 마음으로 찾아왔답니다!”
“저 저를 말인가요?”
아린으로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파비앙과 네로비앙에게 향했으며 그들의 불편하다 못해 불안해하는 반응을 본 순간 비올렛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깨달았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그럼 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남매에게도 익숙할 로열관의 방·
검 교서 등 가지런히 정돈된 교보재들과 학업 증진을 위해 빌려온 도서들을 보며 비올렛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우등생의 방은 다르네요· 제가 다 본받고 싶을 정도인데요?”
“비 비올렛 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린은 겸손한 어투로 답했다·
“못 본 사이 무척 성장해버린 동생을 보니 언니로서 참 뿌듯할 따름이네요·”
아린으로선 지금 상황이 매우 얼떨떨했다·
자신이 알던 비올렛 황녀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형제는커녕 국정 운영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던 그녀가 이런 어색한 칭찬을 남발하며 자신을 띄워주고 있다니·
기분 탓잍 수 있지만 절대 호의적인 목적으로 찾아오진 않았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린의 약혼자도 이 기숙사에 산다 했죠? 시안 베르트라고 했던가요?”
시안이 언급된 순간 싸늘한 불안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예· 그렇습니다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한번 보고 싶네요· 듣자 하니 아린과는 입학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린이 보기엔 어떤가요? 좋은 남자인 것 같던가요?”
“그 그게····”
아린으로선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말할 게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 말을 해도 되는 건지에 대한 고민이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만남을 원하신다면 저희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대뜸 불편한 얼굴로 서 있던 파비앙이 그를 데려오겠다며 자청했다·
“사전 약속 없는 만남에 상대방을 멋대로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아린의 약혼자이기 전에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이신데 저희가 가는 게 맞지 않겠어요?”
정말 시안의 방에 가려는 듯 비올렛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마 시안은 지금 방에 없을 거예요! 주말이면 방에 있기보단 수호 기사랑 같이 단련을 해서····”
“그런가요? 그럼 방에 가서 기다려야겠네요· 급한 것도 없으니 천천히 기다리도록 해요·”
기다리는 게 문제가 아닌 시안의 방에 가는 것이 문제였다·
그 혼자만 있다면 또 모를까 그녀의 방엔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다른 존재까지 있지 않은가?
아린으로선 이들을 절대 시안에 방에 데려가선 안 됐다·
“그 시안이 자기 방에 찾아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해서 아마 가면 불쾌해할 거예요!”
그런 아린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비올렛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차라리 제가 가서 얘기를 전하는 게····”
“아린·”
“네?”
“많이 컸네요? 내 말에 토를 달 줄도 알고····”
미소가 만연했던 비올렛의 얼굴이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허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래의 미소를 드러내니 그 모습을 지켜본 아린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에 잠식되어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
이를 지켜보던 파비앙과 네로비앙도 말없이 식은땀만 흘렀다·
그렇게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순간
“시안 베르트님께서 찾아왔습니다····”
예기치 못한 누군가의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시 시안이 왔다고요?”
굳어있던 아린의 입의 다시금 열리며 동시에 비올렛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머지않아 그들의 앞에 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 베르트· 제국의 고귀하신 황녀님과 황자님들을 뵙습니다·”
황실 일가를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긴장은커녕 무감각한 시선으로 인사를 올린 시안·
“오 오랜만이구나· 시안 베르트· 아니 시안 공····”
그나마 안면이라도 있어 어색하게 맞이해주는 황자들과 달리 비올렛 황녀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 어서 와요 시안 공! 직접 찾아 가려 했었는데 먼저 와주어서 참 고맙네요·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곧 어색한 표정을 풀고 방의 주인인 것 마냥 황급히 그를 맞이하니 시안은 자연스레 아린의 옆에 앉았다·
아직 어리둥절한 마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아린은 곁눈질로 조심스레 시안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덤덤하면서도 무신경한 모습·
그 익숙한 모습에 안심이라도 한 것일까?
아린은 속에서 차오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가 주말의 일과를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뭘 하고 있었나요?”
“수호 기사와 검술 단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 그럼 아린의 예상이 딱 들어맞은 거네요? 서로가 뭘 할지 벌써부터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새삼 부러워지는데요?”
낯간지러운 칭찬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한결같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시안 공도 알다시피 일전에 있던 불미스러운 일로 아린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걸 시안 공이 옆에서 잘 위로해줬으면 좋겠네요· 저희도 오늘 그럴 목적으로 왔거든요·”
불미스러운 일을 언급하자 황자 형제의 미간이 심히 찌푸려졌다·
아린 또한 심기가 편하진 않았다·
언니로서 동생의 약혼자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일지언정 속뜻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상황인 만큼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위로 말입니까?”
이에 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녀의 말이 무척이나 하찮다는 듯이·
그 미소를 본 비올렛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굉장히 역한 기분을 느꼈다·
왜 피어오르는지 모를 강한 불안감과 함께
“병 주고 약 주러 오셨습니까?”
시안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