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레메아 골짜기 (3)
“키이익····”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데스 웜은 땅속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포만감을 느끼고 귀환한 것은 아니었다·
지면 아래로 계속해서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
원을 그리듯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데스 웜·
나를 다시 한 번 낚아채기 위해 각을 보고 있다·
당황한 것도 한 번이면 족하지·
쉽게 먹혀줄 생각은 씨알도 없을뿐더러 각조차 온전히 내줄 생각이 없다·
싸늘해지는 등 뒤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녀석의 속도·
방향이 파악된 순간 재빨리 몸을 회전시킨 다음 높이 날아올랐다·
-쾅!
쩍 하고 벌려진 녀석의 입이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안엔 혀로 추정되는 다수의 돌기들이 흉측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우 간만에 봐서 그런지 더럽게 적응 안 되네·
더 보고 있다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아무래도 조금 다듬어줄 필요가 있겠어·
-쐐액!
검을 고쳐 잡은 뒤 공중에서 두 번의 검격을 날렸다·
교차된 검선이 검기로 발현되면서 녀석의 입속으로 투하되었다·
“꾸에엑!”
피하지 못한 데스 웜의 혀가 속수무책으로 절단되었다·
놈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머지않아 다시 땅속으로 숨어버렸다·
진동이 이어지는 걸로 보아 도망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단 조우한 건 그렇다 쳐도 저놈은 여기 왜 나타난 거지?
이곳은 아직 레메아 골짜기 초입으로 기사들의 주둔지와도 매우 가까운 곳이다·
햇빛도 싫어해 그늘진 곳 아니면 미동조차 않는 놈이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쟤 너 땜에 온 거란 건 알고 있지?]
케이람은 거기에 뜬금없이 나를 지목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로선 바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내가 뭘 했다고?”
[뭘 하긴? 네가 이 부근에 살던 잡것들 피 빨아 먹던 건 잊었냐? 저 지렁이는 가뜩이나 냄새도 기가 막히게 맡는 놈이라고····]
뜬금없이 웬 냄새?
내 몸에서 뭐 고기 굽는 냄새라도 난다는 말인가?
[전혀 모르겠단 얼굴이네? 지금 네 상태를 말해줄까? 고약한 마수와 깨끗한 인간의 피가 잘 버무려진 특식 같은 존재야·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별미라고나 할까?]
“···?”
순간적으로 멍해진 사고를 바로하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마수들의 피를 섭취한 것이 오히려 마수들에겐 잘 버무려진 특식이 되게 했다?
그 말은 즉 내가 놈들의 피를 취할수록 결국엔 더 좋은 먹잇감으로 진화한다는 거잖아?
“그럼 쟨 지금 날 먹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가령 재뿐만이 아닐걸? 머지않아 마계의 내로라하는 다른 마수들도 득달같이 달려들 거라고! 왜? 굳이 찾아다닐 수고도 덜고 좋지 않겠어?]
그녀는 오히려 잘된 일 아니냐며 실실 웃고 있었다·
확실히 전생을 돌이켜보면 마수들의 살덩이를 먹을수록 놈들이 더 꼬이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듯 결국 마수들끼리도 서로를 사냥감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나 역시 최근에 마수들의 피를 섭취하면서 그들의 흔적이 내 몸으로 퍼졌고 결국 똑같은 사냥감으로 인지되었던 걸로 보인다·
어쩐지 아까 헬하운드들 부터 이상하다 싶더라니····
“용케 지금까지 말 안하고 있었군·”
[훗! 내가 누구 좋으라고?]
하기야 친절히 알려줬다면 내 애검이 아니겠지·
-쿠구구궁
데스 웜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도망쳐봐야 주둔지까지 쳐들어올게 뻔하고 천상 저놈을 여기서 죽이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네·
[쉽게 가자 주인아· 저 놈 상대로 칼질해봐야 소용없는 거 알잖아?]
나를 유혹하고 있군·
마수들의 표피는 기본적으로 금속에 준하는 강도를 가지고 있다·
오거 같은 중급마수까지야 힘으로 뚫을 수 있지만 웜 같은 상급 마수들부턴 인간의 무력이 통하지 않는다·
안의 촉수정도야 줄기 자르듯 베어낸다지만 본체를 감싸고 있는 외피를 뚫으려면 적어도 검에 충분한 마나를 둘러야 한다·
문제는 그 수준이 못해도 7성급 이상의 마력은 돼야 한다는 것·
뭐 그렇다고 못한다는 말은 아니지·
애초에 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의 마검을 가지고 있으니····
“솔직히 그래주긴 싫은데 이번엔 당했다 치고 너한테 어울려 줄게·”
[어머? 생각보다 쿨한면도 있네? 그래 남자는 원래 시원시원해야 여자가 잘 따라준다고~]
“말이나 못하면····”
애초에 내가 케이람을 일찌감치 꺼내온 이유는 뭐였을까?
간단하다·
그녀의 힘을 쓰기 위해서다·
허나 지금까지의 난 마검으로서 그녀의 힘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힌 못한 거지·
검술? 마법? 가끔씩 쓰던 비기?
솔직히 검이 아닌 나뭇가지 하나로도 다할 수 있다·
획 하고 휘두르면 억 하고 죽는 잡것들을 상대로 무슨 마검의 힘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케이람도 사실 만족하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암만 변태 마검이라며 질색해도 케이람은 명백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신의 무구다·
신을 왜 신이라 부르겠는가?
인간의 경지로선 범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리 부르는 것이다·
100년 남짓한 수명을 가진 인간이 평생을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경계·
이 마검은 인간으로서의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물론 조건과 대가가 붙기 마련이지만····
“암무 9식: 마검 발현!”
주문과 함께 미소를 짓던 케이람이 안개 형태로 변했다·
점차 사그라들던 그녀의 육신은 머지않아 내 몸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후!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감촉이야? 기분이 어떠니 주인아?]
케이람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리에서 청명하게 울려 퍼진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류가 급박해지며 전신에서 열이 솟구쳤다·
기분이 어떠냐고?
“죽을 만큼 끝내준다 아주!”
마검 발현·
케이람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 내 몸을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다·
지금 내 육체는 그녀의 영혼으로 잠식된 상태·
까딱 정신을 잃었다간 이 변태 마검한테 정신을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
[무리하지 마 주인아!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 편히 가지라고~]
내가 네년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조금이라도 정신줄을 놨다간 내 영혼을 바로 갈아치울 것이다·
고작 마수 하나 처리하겠다고 나도 별짓을 다하는 군·
“후····”
하늘을 올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쁘기만 한건 아니란 말이지·
온 세상을 다 때려 부술 것만 같은 이 넘치는 광기·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설사 신이라 해도 두려울 게 없는 기분!
그래 지고하신 분들의 힘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한 번 놀아 보자 케이람!”
케이람의 격한 환호성이 머리를 뜨겁게 울리고 있다·
-쿠구궁!
데스 웜의 움직이는 소리가 또 한 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바짝 경계해있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한없이 여유로운 마음이다·
놈이 코앞으로 다가오기 까지 내 몸은 요지부동 자세를 유지했다·
정확히 두 발 아래로 10미터·
데스 웜의 쩍하고 벌려진 입이 빠르게 치솟고 있다·
언제였더라?
스쳐지나간 인생에서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불현 듯 세상살이가 허무해져 죽고 싶어질 땐 꽃을 한 송이 꺾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라고·
한 잎 한 잎 떼어낼 때마다 내 몸에 붙어있는 근심과 걱정을 떼어낸다 생각하면 어느새 빈줄기만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란다·
그것이 설사 앙상해보일지언정 스스로를 망치게 하는 우환을 달고 살면서 까지 아름답게 보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잎들을 바람에 날려버리면 어느새 희망만 남게 된 온전한 자신만이 남아있을 거라는데····
같잖은 소리라 생각하는가?
그런 뜬구름 잡는 말도 누군가에겐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건 그때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내가 스스로 창조했던 비기 중 하나·
세상의 하찮은 것들을 모두 떨쳐내고 그 중심에 홀로 떳떳이 서있을 나라는 빈줄기가 될 지어니····
“무검(霧劍): 흩날리는 8개의 꽃잎·”
검식을 시전하자 케이람에서 어두운 빛이 일었다·
들어 올린 검을 천천히 그러나 세상이 봤을 땐 무지막지한 속도로
도합 8번 검격이 공간을 베어 가르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쾅!
마침내 지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스 웜·
허나 그가 맞닥트린 것은 나의 육체가 아닌 허공에 장식된 8개의 검선이었다·
-콰지지직
검선과 접하게 된 데스 웜의 육신이 사과 쪼개지듯 갈라지고 있다·
설사 이 마수의 피부가 최상급 강철보다 단단하다 한들 지고한 마검의 검기까지 당해낼 순 없었다·
정확히 8등분·
마치 바람을 맞은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리듯 갈라진 데스 웜의 육체가 여덟 방향으로 흩날렸다·
-후두둑
꽃잎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붉은 혈우가 쏟아졌다·
공허한 밤하늘을 진하게 물들일 아름다운 광경·
몸 안의 혈기가 파도처럼 격동하고 있다·
그 기운에 정신을 맡기고 오랫동안 심취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어 보였다·
저 멀리 기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기에····
* * *
-쿵! 쿵!
멀지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렸다·
방향상 레메아 골짜기 초입 부근이었다·
상황을 인지한 기사들은 즉시 해당 장소로 향했다·
땅을 밟을수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점점 더 커져가는 여파·
일부 상급기사들은 진동의 여파만으로도 어떤 마수의 짓인지 유추가 가능했다·
물론 정확한 진위는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해야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 할 수 있었다·
결코 중하급 수준의 마수는 아니라는 것을····
이와 더불어 주변에서 무언가 태웠던 냄새가 풍겨왔다·
흡사 마계 생물들을 불태웠을 때 나는 냄새와 유사했지만 지금은 별 신경 쓸 사안이 아니었는지 대부분 인지는 하면서도 넘어가고 있었다·
이어진 숲길이 끊기고 척박한 골짜기 지대가 나타났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어두운 암지였지만 곳곳에 흩뿌려진 마수들의 시체와 핏자국들만큼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마 인간이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게 도륙 난 마수의 시체들·
자기들끼리 싸우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한 의문도 잠시
기사들의 앞으로 정체불명의 형상이 아른 거렸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어두운 시야 탓에 제대로 된 확인이 불가능했다·
이에 기사 중 한명이 마법을 시전 했다·
“인도의 빛!”
어둠에 뒤덮였던 골짜기 일대가 환히 밝아졌다·
“···?”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의문의 존재·
허나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주변은 개미 집 구멍까지 보일 정도로 환히 밝아졌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눈앞의 존재를 온전히 인지하지 못했다·
의문의 형상은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채 스스로를 완벽히 감추고 있었으며 기사들로 하여금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질적인 기분을 전하고 있었다·
쉽사리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부정적인 느낌·
모두가 주저하고 있던 차 보고를 받은 베르트 공작이 뒤늦게 합류했다·
“···!”
공작의 눈은 기사들과 달랐다·
기사들이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접한 시선이었다면 베르트 공작은 마치 알고 있던 옛 기억의 무언가를 다시 조우한 듯한 시선이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왜 존재하는 지도 모를 인간이면서 인간의 본성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들을····
“미 미스트···?”
눈을 의심한 공작은 급히 정신을 일깨우고 다시 한 번 정면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 의문의 형상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