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응보 (3)
사방에 흩뿌려진 피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진 사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광경에 일부 기사들은 눈을 돌렸다·
이것이 정녕 사람이 한 짓이란 말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
허나 때로는 직접 듣거나 겪지 않아도 죽은 이가 겪었을 무지막지한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기도 한다·
“····”
에쉘은 허탈한 눈으로 시체 옆에 놓인 장검을 집었다·
눈마저 멀게 할 정도의 광채를 발했던 상급 기사의 검은 시뻘건 핏물에 적셔져 그 빛을 모두 잃고 말았다·
<세실리아 리엔>
검자루엔 새겨진 이름이 시체의 주인을 가늠케 했다·
그 흉포한 상급 마수조차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유능한 기사가 이런 참혹한 시체로 발견 되다니·
“하····”
심란한 마음에 에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생에 있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감이 온몸을 잠식하는 기분·
더 불쾌한 것은 이 굴욕감을 선사한 주인이 누군지 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허나 그 추악한 눈빛만큼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살인귀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기에
그 살벌했던 기억은 아직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체는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공작님께는 제가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처리를 떠넘긴 에쉘은 그대로 몸을 돌려 현장을 벗어났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정면에서 한 남자가 달려왔다·
그의 심복인 켈린이었다·
그는 말없이 에쉘에게 서신 한 장을 건넸다·
“뭡니까?”
“엘리스님이 남기신 편지입니다·”
엘리스라는 말에 그의 눈이 번뜩 뜨였다·
“벨리아스를 떠나기 전 자택에 있는 시녀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에쉘님께 전해달라고····”
에쉘은 일 초의 망설임 없이 편지를 뜯어냈으며 내용을 읽는 동안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해갔다·
“····”
에쉘은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꽈악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에 켈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 혹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에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빛의 기사를 그만두겠답니다·”
“···!”
크게 놀란 켈린은 바로 이유를 물었다·
“가 갑자기 말입니까?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 자기가 감당하기는 부족한 자리라고 하더군요 좀 더 수행의 시간을 가지려 하니 아버지껜 대신 전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 자못 절제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보고 마음을 접으랍니다····”
못내 어이가 없었는지 참았던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 무슨 마음을 말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마음을 접으라는군요· 경위야 어찌 됐든 상관없이 자신은 그저 우리 형제들 모두가 웃으며 살기를 바란답니다· 이 못난 오라비를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씨가 너무 기특해서 참을 수가 없군요·”
허나 말과는 다르게 감정에 격분한 그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엘리스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 그것이 일단은 황성으로 향한 것 같긴 한데····”
켈린은 말하기를 다소 주저했다·
“벨리아스를 떠난 이후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예상과 달리 크게 반응하진 않았다·
입을 다문 에쉘은 한동안 말이 없었으며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아카데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켈린의 동공이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따로 연락 온 건 없었습니까?”
고개를 든 켈린은 태연하게 말했다·
“없었습니다·”
이에 에쉘은 눈을 찡그리며 굉장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세요·”
고개를 숙인 켈린은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에쉘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었다·
“킥킥···!”
빛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앞날에 언제부턴가 안개가 낀 기분·
너무 화가 나고 불쾌해 미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입에선 웃음이 튀어나왔다·
“초면은 아닐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허나 결코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은 스쳐 지나간 인생에서 분명히 경험한 적 있는 익숙한 위화감이었다·
“크하하하!”
이윽고 환희가 섞이지 않은 격양된 웃음소리가 붉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기괴하여 마치 희열을 느끼는 악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켈린은
-화르륵
손에 들고 있던 서신 하나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종이 한쪽엔 로열 아카데미의 문장과 함께 보리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에쉘에게 보여주지 않은 서신이었다·
“조심하시옵소서· 시안님····”
켈린은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용케 참았네? 못 참고 난도질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그러길 바랐던 건 아니고?”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니? 누가 들으면 내가 살생에 미친 못된 마검인 줄 알겠다?]
자기 입으로 저런 말 하면 찔리지도 않나?
“사람이 사람으로 있으려면 자제를 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지 않고 달려들면 본능에 충실한 짐승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어머 기특해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달려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 주인 많이 컸네?]
어이가 없어 차마 대꾸할 말도 안 나왔다·
[그래서 네 누나는 이대로 보낼 생각이니? 더 지켜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났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전적으로 누나에게 맡겨야지· 옳은 길을 제시했을 때 누구보다도 잘 달려갈 사람이 바로 우리 누나니까·”
일종의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지·
뭐 솔직히 어떤 오지를 가더라도 나보다 잘살 사람이 바로 누나라 본다·
그냥 맘 놓고 있다 보면 또 편지 오겠지 뭐·
[····]
뭔가 더 할 말이 남아있기라도 한 걸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케이람은 급기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할 말 있어?”
그녀는 눈은 다시금 슬그머니 나에게 향했다·
[너무 안심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잠시 풀어졌던 근육이 바싹 조여졌다·
[인생이란 건 말이야 자고로 굉장히 굴곡진 거거든·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조언하는 거야?”
[뭐 그렇다면 그런 거지·]
무려 2회차 인생을 살고 있는 내게 인생에 대한 조언이라····
이런 친절한 마검이 또 어디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녀가 괜히 이런 말을 꺼내진 않았을 거란 생각에 절로 경각심이 돋았다·
[혹시 모르지 않겠니? 지금 이 땅 어딘가에서 네가 박차고 달려가야 할 곳이 또 있을지 말이야····]
언젠가 이 성질 괴팍한 신의 무구를 이어받을 또 하나의 계승자가 나타난다면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를 조심하라고·
혹여 그 미소 안에서 조언이랍시고 나만 모르는 것 같은 찝찝한 말이 튀어나온다면
그때는 조심이 아닌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건 필시 나에게 또 다른 일이 생길 것이란 일종의 경고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지금 절대 웃을 수가 없었다·
* * *
전선의 소식이 가장 먼저 전달된 곳은 황성이 아닌 아카데미 총장실이었다·
비올렛 황녀의 실종 해프닝·
상급 마수를 홀로 처치하고 복귀한 엘리스·
빛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세실리아의 의문스러운 죽음까지·
하나하나가 제국의 큰 소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엄청난 소식들이었지만 보고서를 읽는 쿤델 총장의 얼굴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저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듯·
입가엔 작은 떨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똑똑
그런 와중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퍼졌다·
“들어오게·”
미리 약속된 손님이 찾아왔는지 총장은 출입을 허가했다·
“절 부르셨다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번 학기에 새로 부임한 학술교관 보리스 르헬름이었다·
“앉게·”
총장은 자리에 앉을 것을 지시했으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했다·
“부임하고 보름 정도 지났는데 뭐 생활하는 데 있어 불편한 건 없는가?”
“총장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잘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다른 교직원들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있고요·”
보리스는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솔직히 어릴 때부터 오만함을 먹고 자란 귀족들이 모여 있는 만큼 텃세가 없다면 거짓말이야· 허나 자네의 얼굴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고 있단 생각은 안 드는군· 참 다행이라 봄세·”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에 쿤델 총장은 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내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게 하나 있지·”
“무엇을 말입니까?”
“대답하기에 앞서 하나 묻지· 자네 여긴 왜 왔는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보리스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뭘 어렵게 생각하나? 당연히 자네의 주인이 보내서 왔겠지· 내가 있는 이 로열 아카데미에서 교관으로 일해 달라고 말이야· 한데 정말로 그게 다인가?”
“저의 개인적인 연유를··· 알고 싶으신 거로군요·”
당황하던 것도 잠시 보리스는 다시금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총장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어떤 사람을 찾고자 왔습니다·”
“사람?”
총장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번쩍였다·
“예· 저와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를 이곳에 보내신 주군께서 꼭 찾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뭐 내 딱히 누구인지까지 물을 자격은 없겠다만 그래도 함 물어보지· 그 사람을 찾았나?”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찾기는커녕 아직 단서조차 잡지 못했죠·”
“허허· 그건 거짓말이로군· 자네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지 않은데? 뭔가 의심 가는 친구는 있는 모양이군·”
순간 말문이 막힌 보리스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크하하!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게· 이 늙은이의 보잘 것 없는 추측이니 말이야·”
총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반응하니 보리스 또한 멋쩍게 웃어 보였다·
“내 한 가지만 말해주겠네· 자고로 사람을 알려 할 땐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뒷모습을 조심해야 할 거야·”
“뒷모습 말입니까?”
“그래 설령 앞모습은 웃고 있을지언정 그 뒤에는 자네를 위한 꽃을 숨겨두었을지 아님 칼을 숨겨두었을지 모르니깐 말이야·”
보리스는 그 말이 왠지 조언이 아닌 경고처럼 느껴졌다·
“총장님의 말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면담이 끝나고
총장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온 보리스는 이내 정문에서 낯익은 여인과 마주쳤다·
“총장실에서 오시나 봐요?”
교관 시리카였다·
“예· 쿤델 총장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좋은 말씀이란 말에 그녀는 놀란 반응을 보였다·
“좋은 말씀이요? 조언 같은 걸 쉽게 하실 분이 아닐 텐데 아무래도 보리스 교관님을 매우 좋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겠네요· 사실 속으론 절 어찌 생각하고 계실지 굉장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려워하실 것 없어요· 그냥 보리스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되니까· 워낙 눈치가 빠르신 분이다 보니 거짓말하면 금방 들키게 되거든요·”
시리카는 보리스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시리카님께선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네? 갑자기 왜요?”
난데없는 칭찬에 그녀는 당황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카님께서도 지금 감추고 계신 게 있지 않습니까?”
“···!”
시리카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여자의 비밀을 언급하시는 건 좋지 않아요· 보리스 교관님 생각보다 짓궂으신데요?”
“하하·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보리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넘겼다·
“그럼 전 이만 개인 연구가 있어서····”
“네· 나중에 봬요· 보리스 교관님·”
사담을 마친 시리카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가 본관을 완전히 나간 것이 기척으로 확인된 순간
“····”
시리카의 눈은 살기 가득한 차가운 눈으로 변해버렸다·
“명을 재촉하네?”
그녀가 들고 있던 교본 속 고이 숨겨져 있던 작은 칼날에서 일순간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