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구원의 존재 (3)
마수들이 득실대는 골짜기 한복판에서 이제 막 기사의 자격을 얻은 여기사 한 명이 그것도 상급 마수까지 대면한 상황에서 아무 일 없이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믿을까?
적어도 전선의 기사들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라며 일축할 것이다·
허나 숙련된 베테랑 기사들은 물론 전선의 땅을 처음 밟아봤을 황군의 기사들까지
거짓말 같은 지금의 상황을 차마 온전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엘리스는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상태로 앞에 선 공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에 베르트 공작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랑스럽구나 엘리스!”
사라진 황녀를 무사히 후방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악명 높은 상급 마수를 홀로 처치한 뒤 당당하게 전선으로 귀환했다니
공작으로선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엘리스의 용맹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내면에서 차오른 당혹스러움에 세실리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같은 떨림이 일어났으며 심장에선 사정없는 방망이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저리 멀쩡한 거야?’
팔이나 다리에 어쩌다 그어질 법한 생채기가 아니었다·
무려 장기가 인접해 있는 복부에 칼을 찌르지 않았던가?
깊게 찌른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움직임 자체가 불가능할 일격이었다·
심지어 핏자국 또한 저리 선명하게 남아있거늘·
하다못해 걷는 것부터 매우 부자연스러워야 할 터였다·
허나 엘리스는 그런 일 자체가 없었다는 것 마냥 너무나도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엘리스의 시선이 마침내 세실리아와 마주쳤다·
세실리아는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이 속에서 가득 울려 퍼지고 있던 그 순간
“···!”
그녀가 웃었다·
이 세상 어떤 꽃을 갖다 대어도 비유가 성립되지 못할 아름다운 미소·
세실리아로선 항상 봐왔을 익숙한 미소였다·
하지만
“····”
세실리아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기쁨이나 긍정에서 비롯된 미소가 아니었음을 알기에
저 미소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 알기 전까진 지금의 두려움이 해소되지 못할 것만 같았다·
* * *
“····”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무심히 버려두고 왔던 엘리스의 귀환·
이를 알게 된 비올렛 황녀의 얼굴엔 더이상 가식적인 슬픔도 거짓된 기쁨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녀님· 세실리아입니다·”
황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입을 열었다·
“엘리스는 어쩌고 있던가요?”
예상과 다르게 여유로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무런 말도 없습니다····”
이에 기가 찬 듯 비올렛 황녀는 헛웃음을 내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뭔가 이득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없습니다·”
세실리아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난처한 느낌이 가득했다·
막말로 지금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냐에 따라 그녀들의 처지가 한순간 역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엘리스는 귀환 후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믿었던 기사로부터 배신당하고 원치 않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로선 이해되지 않을 행동이었다·
“듣기론 레드 울프라고 하는 상급 마수도 혼자 처치했다고 하던데···· 엘리스 양의 무력이 그 정도로 뛰어났던 건가요?”
솔직한 심정으로 세실리아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젖먹이 시절을 지나 베르트 가를 수호하는 기사로서 엘리스를 지키는 검이 된 지 자그마치 10년이다·
그 10년의 시간 동안 세실리아는 엘리스의 곁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그녀에 대해선 가족보다 더 잘 아는 사이임을 서로가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엘리스의 능력?
천재를 넘어 신의 아이 소리를 들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사실이다·
시간이 충분히 지난다면 그녀는 이 대륙에서 위는 존재하지 않을 제일의 기사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만개하기 전의 꽃과 같은 상태·
상처까지 입은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상급 마수를 처치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엘리스는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상태로·
혹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닐까?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방안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밌네요·”
세실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분명 답답하다 못해 막막할 상황 같은데 어째서 전 웃음이 나는 걸까요?”
가식적이거나 감춰진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희열이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알았지만 엘리스 양은 누구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어요· 저처럼 꾸며진 모습이 아닌 거짓 하나 없는 본연의 모습이었죠· 그건 곁에 있었던 세실리아가 더 잘 알지 않나요?”
세실리아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입을 다물고 있진 않겠죠· 아니면 아직 때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겠고요· 그게 아니라면····”
“···!”
대뜸 문밖에서 느껴진 익숙한 기운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희를 확인해보고 싶은 걸 수도 있겠죠·”
-끼익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실리아로선 현재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을 기사···
“빛의 기사단 소속 중급 기사 엘리스 베르트· 비올렛 황녀님을 뵙습니다·”
엘리스였다·
“어서 와요· 엘리스· 본의 아니게 먼저 오게 해버렸네요?”
황녀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엘리스의 얼굴은 마치 감정 없는 사람마냥 돌처럼 굳어있었다·
“할 말이 무척 많아 보이네요? 어려워 말고 하세요· 들어는 드릴 테니까····”
태연하다 못해 당당한 태도였다·
이에 엘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역으로 묻겠습니다· 황녀님이야말로 제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황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엘리스의 눈빛은 여전히 굳건했다·
“딱히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앞서 말했듯 전 살기 위한 몸부림을 했을 뿐이니까·”
그 말은 즉 그 상황에선 엘리스가 죽어야지만 황녀가 살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사실 할 말도 없어요· 전 한치의 의심없이 당신이 죽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있던 할 말까지 잃게 만드는 뻔뻔함에 엘리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스도 참 대단하네요· 가장 쓰라리다는 배신의 칼을 맞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 돌아오다니 그 강인한 정신만큼은 정말 본받고 싶어요·”
“····”
“그래서 엘리스는 지금 왜 입을 다물고 있죠? 지금이라도 입을 연다면 저와 세실리아가 무척 곤란해질 텐데 말이에요· 혹시··· 망설이고 있는 건가요?”
감정에 동요된 엘리스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를 의식한 황녀는 더욱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전 엘리스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어요· 달리 말하면 엘리스에겐 어떠한 잘못도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생각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황녀의 손길은 어느새 엘리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신은 그저 대륙을 수호하고 제국을 지키는 기사로서 저를 구원했을 뿐이라고····”
구원·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긴 했으나 결국 묻으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글도 못 읽는 머저리도 아니고서야 저 말을 듣고 과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그렇군요····”
줄곧 굳어있던 엘리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황녀님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제 한 몸 희생하여 황녀님을 살릴 수 있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은 없겠지요· 황녀님을 원망하진 않겠습니다·”
이에 황녀의 얼굴이 역으로 굳어버렸다·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황녀님 덕에 제가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슬그머니 고개를 올린 엘리스의 얼굴엔 거짓 없는 진심의 환희가 서려 있었다·
“제 임무는 전선 순방이 이어지는 동안 황실 일가를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황실의 순방이 갑작스레 종료된 지금 제가 황녀님 곁에 있어드릴 필요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황녀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엘리스는 한쪽 팔을 가슴에 얹으며 황녀를 향한 기사의 맹세를 올렸다·
“그럼 황성으로 조심히 돌아가시길····”
그 말을 끝으로 엘리스는 몸을 돌렸다·
이에 자연스레 옆에 있던 세실리아와 시선을 부딪쳤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순 없었는지 둘은 자연스레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
이내 세실리아는 또다시 보고 말았다·
결코 긍정에서 비롯될 리 없는 그녀의 미소를·
엘리스는 그 미소를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황녀와 세실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새삼 여유로웠던 조금 전과 다르게 황녀의 얼굴엔 언짢음이 가득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세실리아로선 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기사에게 있어 망설임은 죄악과도 같기에
언제 필지 모르는 미련의 싹은 사전에 잘라야 할 것이다·
“엘리스 베르트를··· 이번에야말로 죽이겠습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샌가 검 자루에게 향해있었다·
* * *
딱히 이유라 할 것도 없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녀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세실리아는 지금 너무나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보았던 그 미소·
고작 미소 하나로 사람의 감정을 이리 격분하게 할 수 있을까?
화를 내는 것도 그렇다고 용서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의미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에 와선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을 향해 지었던 엘리스의 미소엔 필시
연민이 담겨있었다·
이를 인지한 세실리아의 감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지금의 감정·
이 감정을 해소하려면 그녀를 죽이는 것이 답이라 생각했다·
황실 호위 임무가 끝난 시점에서 엘리스는 기사단 본부가 있는 황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세실리아는 차분한 마음으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성문 안쪽에서 짐을 챙기고 나온 엘리스가 보였다·
동행인은커녕 짐꾼조차 없는 완벽한 혼자였다·
이에 기척을 지우고 그녀의 뒤를 따르려는 순간
“···!”
세실리아는 느꼈다·
한껏 벅차오른 자신의 심장을 차갑게 조여 오는 엄청난 양의 살기를·
이는 시야에 있는 엘리스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 붉은 나뭇잎이 무성한 수풀 속·
마치 자신을 이쪽으로 오라며 부르는 것 같았다·
세실리아는 본래의 목적은 잠시 망각한 채 자신을 부르는 미지의 살기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피를 흩뿌린 듯 한 붉은 적음(赤陰)이 다소 반감을 일으키게 하는 낯선 공간·
그곳에 발을 들인 세실리아는 이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살기의 주인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 만일까?
인간은 한 번도 접하지 않은 미지의 존재를 봤을 때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마수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거늘·
그녀는 상급 기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있는 가면의 존재로부터·
“····”
가면 안으로부터 전해지는 추악한 살기에 호흡마저 불편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