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구원의 존재 (2)
[너 치유마법은 언제 배웠냐?]
흐르는 빗물에 손을 닦고 있던 내게 케이람이 물었다·
“그냥 겸사겸사 익혀놨어·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하는 법이니까·”
이 짓거리를 하다 보면 언제 어디서 죽음의 그림자가 내 몸을 덮칠지 모르게 된다·
팔다리에 칼이 박히고 등짝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일은 암살자에게 있어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런 와중에 홀로 상처를 움켜쥐면서 나를 치료해줄 치유사를 기다리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누군가의 몸에 칼을 꽂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반대로 내 몸에 칼이 꽂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에 따른 대처 수단 또한 당연히 갖춰놔야겠지·
[가만 보면 참 안 어울리는 재주도 많단 말이야?]
비아냥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서· 친애해마지않는 네 누나 앞에서 얼굴까지 깐 마당에 이제 어쩔 생각이야?]
“나도 몰라·”
[···?]
케이람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니? 그 대책 없는 대답은?]
“결국 새로이 변할 누나의 미래도 누나가 정해야만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누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아무래도 단시간에 극복하긴 힘들겠지·
그나마 우리 누나이기에 저러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지금 누나는 현 상황에 대해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있겠지·
이 상황에 직면한 자신이 과연 무얼 해야 하는지·
이내 마음을 굳히기라도 한 듯 누나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연스레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전에 내게 말했지· 베르트 가의 자제로서 가문의 이념을 잇고 싶다고····”
“네· 그랬죠·”
“지금도 그러니?”
여기까지 와서도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누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문의 이념을 잇고 싶다고 결심한 이유는 별게 아니었어·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게 나일 거라 생각했고· 나여야만 하기에 나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어왔었어·”
알고 있다·
지금 누나가 입고 있는 빛의 기사단 갑옷이 누나의 그런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니·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무의미해졌단 생각이 드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어째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도 봤지? 세실리아가 날 찌른 거····”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세실리아는 단순하게 날 지켜주는 기사 그 이상의 존재였어· 빛의 기사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을 가장 잘 이해해주었고 조언도 아끼지 않고 해주었지· 때로는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누나는 숨을 삼키며 또다시 울컥해지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야· 이유고 자시고를 떠나서 세실리아는 그냥 처음부터 내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그저 순수하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야·”
평생을 믿고 의지해왔던 자로부터 당하는 배신·
이로 인한 충격은 그냥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처참하다·
그 감정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화는··· 안 나시는 겁니까?”
“화? 글쎄 화가 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어리석었을 뿐인데····”
나는 생각한다·
무지(無知)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무지함으로부터 비롯된 신뢰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생각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누나는 잘못이 없다·
허나 지금 누나는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곁에 있어 주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있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무지한 신뢰가 오늘날의 결과를 야기한 것이라고·
“시안 넌 가문에 대해 아니 에쉘 오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당황한 나머지 바로 말을 잇진 못했다·
“난 그날 황성에서 분명히 봤어· 사실상 얼마 본적도 없을 에쉘 오빠를 넌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었지· 마치 누구도 모를 그의 속내를 안다는 것처럼····”
이래서 우리 누나가 참 대단하단 거다·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챈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욘 없겠지·
하지만
“언젠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 악마의 진면을 알게 됨으로써 누나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만큼
적당한 시기가 오면 누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그렇구나····”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거 하나만은 말해주지 않을래?”
누나의 멍했던 눈빛으로부터 다시금 생기가 돋았다·
“지금의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시안 너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그 부분에 대해선 바로 답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누나가 돼서 동생에게 의지하려 한다니 조금은 부끄럽네····”
누나는 평소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시안· 너무 혼자 모든 걸 짊어질 필요는 없어· 내 곁에 네가 남아 주었듯 너 또한 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줄 테니까·”
기분이 조금 묘했다·
나의 희생을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을 누군가와 달리 누나는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으며 또 미안해했다·
만약 전생의 누나가 죽지 않고 계속 내 곁에 있어 주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바로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결국 지금이 중요한 거겠지·
누나의 저 미소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나의 의무일 것이다·
-스슥
수풀 너머 저 먼발치로부터 기사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누나의 안위를 확인하러 온 수색대일 것이다·
돌아 가봐야 딱히 좋을 일은 없겠지만 누나의 눈을 봤을 때 딴 길로 빠질 것 같진 않았다·
“돌아가실 겁니까?”
“가야지· 내게 직면한 문제는 내가 스스로 해결하는 게 옳을 테니까· 그래야 네 얼굴도 당당히 볼 수 있지 않겠니?”
솔직한 생각으론 가지 말라며 말리고 싶지만
그래도 누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려 한다·
단념하고 다시 가면을 쓰려는 순간 누나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젠간 네 마음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해주렴· 이 누나는 언제가 되든 상관없이 그 날만을 기다릴 테니까····”
“멀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수십 년을 묵혀왔던 마음속의 과오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 * *
마냥 여리고 귀엽기만 했던 동생의 낯선 모습은 엘리스에게 강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시안이 맞기는 한 것일까?
허나 아직 손에 남아있는 촉감은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했으니 엘리스선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두고자 했다·
이윽고 수풀 속에서 소수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에 엘리스님!?”
갑옷 한쪽에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황군 기사들이었다·
“무사하셨군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네· 뭐 일단은요····”
세실리아에게 당한 상처는 이미 시안에 의해 치유가 완료된 상태였다·
주변에 널브러진 마수의 사체를 본 일부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마수들을··· 혼자 상대하신 겁니까?”
물론 아니었지만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순 없다·
다소 의심은 살 수 있겠으나 시안의 존재를 발설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한 엘리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무튼 이렇게라도 먼저 엘리스님을 발견하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하늘이 도우는지도 모르겠군요·”
황군 기사의 반응치곤 조금 지나친 반응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이에 의구심이 생긴 엘리스가 경계하며 물었다·
“혹여 엘리스님께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반드시 먼저 접촉해서 이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누 누가 말인가요?”
빛의 기사도 아닌 황군의 기사가 자신에게 말을 전한다고 하니 엘리스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쿤델 총장님입니다!”
하지만 그 당사자의 이름을 들은 순간 엘리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나머지 기사들은 사주를 경계하며 혹여나 찾아올 다른 기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어주십시오· 엘리스님····”
기사는 절제된 어조로 지시받았던 모든 말들을 그녀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 * *
무심한 걸음으로 복도를 누비던 에쉘은 이윽고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 앞은 황군의 기사들이 철통경계 중이었다·
누가 봐도 출입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허나 에쉘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비올렛 황녀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이에 기사들은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단호하게 거절했겠지만 그는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 에쉘이었다·
이내 눈치를 보던 기사가 길을 내자 에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다소 수척해진 얼굴의 2황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에쉘 공· 차마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네요·”
황녀의 자책에도 불구하고 에쉘은 말이 없었다·
“절 질책하러 오셨나요? 그럼 마음껏 하세요· 전 지금 당신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는다 해도 반박할 자격이 없을 테니까요·”
“···황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2황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전 황녀의 자격도 없어요· 마수가 출몰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도망을····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친 꼴이라니· 베르트 공작님의 얼굴은 또 어떻게 봐야 할지····”
황녀가 순방 도중 마법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무서워서·
마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겁이 났고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전이 마법을 써서 도망을 가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좌표설정을 잘 못 하게 되었고 결국 후방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이 그녀의 변명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설명이 아닌 변명·
에쉘은 지금 황녀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이 결코 사실이 아닐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그런 저를 위해····”
“충분합니다·”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는지 에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기사 엘리스에 대한 황녀님의 마음 앓이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 이상 슬퍼하실 필욘 없습니다·”
이에 황녀가 발끈하며 일어섰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시나요? 엘리스는 에쉘 공의 동생이잖아요! 동생이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어쩜 그렇게 덤덤할 수 있죠?”
허나 에쉘의 표정은 끝까지 확고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엘리스로 인해 이 이상 슬퍼하실 필욘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요?”
“조금 전 후방캠프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순간 황녀의 동공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엘리스가 살아있다더군요·”
“···!”
차마 웃지도 찡그릴 수도 없던 황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기묘하게 굳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