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구원의 존재 (1)
전선의 공기는 언제 맡아도 참 더럽다·
사람이란 게 원래 한 장소에 오래 살다 보면 적응이란 걸 하는 법인데 여기는 1년을 살았던 간만에 찾아왔던 상관없이 그냥 역겹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찾아왔다·
이 개 같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컹!”
저 지능 딸린 강아지들도 참 여전하다·
마음 같아선 전부 머리통을 잘라다가 하나하나 피 맛 좀 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을 것이다·
검을 고쳐 잡은 뒤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서걱
하급 마수를 상대로 거창한 검식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편안하게 이어진 동작에 헬하운드의 목들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분리된 사체 속에서 익숙한 피 냄새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진하게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헬하운드의 냄새는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못 해도 상급 마수의 핏자국들이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2황녀는 대체 이딴 걸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겠군·
뭐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지·
일단은 뒤를 돌아보았다·
“···!”
조금 전까지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누나가 복부의 상처를 움켜쥔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놨기에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상황에선 누가 나타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성 연회 이후 대략 두 달 만의 재회·
솔직히 감흥을 말하자면
매우 처참하다·
물론 내가 아닌 누나가·
저게 정녕 살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란 말인가?
헬하운드가 목을 뜯기 위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게 뭘 의미하겠는가?
삶을 포기한 것이다·
쓰라린 배신감에 복수심을 불태웠었던 나와 다르게 그녀는 돌아갈 곳이 없음을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늘 말하지만 누나는 강한 여자다·
그걸 스스로도 알기에 그녀는 본인이 가진 강함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항상 지켜주고자 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지·
문제는 그런 누나를 정작 지켜주려 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전생에서 그리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겠지·
하물며 이번 생이라고 뭔가 달라진 게 있었을까?
그녀가 크란츠로부터 두들겨 맞던 나를 구해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차례다·
“멈춰! 가까이 다가오지 마!”
허나 내 마음을 알아줄 리 없는 누나가 내게 검을 내세우며 경계했다·
“당신··· 나랑 본 적 있지?”
뭐 본 적은 있지·
엄연히 따지면 우린 초면이 아니니까·
“틀림없어! 당신은 분명 몇 달 전 황성에서 봤던 자야! 당신도 나를 봤을 테고!”
바뀐 동생의 모습까지 또렷이 기억해줬으니 참 고마울 따름이다·
“당신도 날··· 죽이러 온 거야?”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실까?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그럴 일은 없을 텐데·
하····
기분 참 더럽네·
난 지금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광경을 보고 있다·
저 곱디 고운 얼굴에 슬픔과 좌절이 덕지덕지 붙은 꼴이라니·
손가락으로 찌르면 쌓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전생의 누나는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죽었다는 거잖아?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복수고 뭐고 그냥 돌아가면 싹 다 죽일까?
“크르르····”
살벌한 하울링과 함께 등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또 다른 마수·
느낌을 보아하니 꽤 보기 드문 손님께서 행차하신 모양이다·
나는 덤덤하게 시선을 돌렸다·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듯 간담을 서늘케 하는 갈기·
이미 어디선가 식사를 하고 왔는지 입가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저 마수가 나타났다는 건 한동안 이 일대가 굉장히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인데····
우리를 다음 먹잇감으로 인식했는지 녀석은 입술을 양쪽으로 크게 벌리며 혀를 적시고 있었다·
* * *
레메아 골짜기의 상급 마수 ‘레드 울프’
인간이고 마수고 상관없이 살아 있는 생물이면 전부 먹이로 인식하여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고 알려진 포식자·
고작 인간 두 명이 상대할 수 있는 마수가 아니었다·
이에 엘리스는 지금 자신의 팔과 다리가 미칠 듯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복부의 상처 때문도 있지만 처음으로 마주하는 상급 마수의 위용에 몸이 절로 반응한 것만 같았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자신의 목은 어느 순간 저 마수의 입속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마주하는 것조차 살이 떨릴 만큼 살벌한 기세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며 거구의 마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러다 대뜸 몸을 돌려 쥐고 있던 검을 마수를 향해 겨누었다·
‘설마 상대하려는 거야? 저 마수를?’
상급 마수의 표피는 하급 마수의 표피와는 차원이 다른 강도를 지니고 있다·
어중간한 마나로 들이댔다간 오히려 본인의 뼈가 아작날 수도 있는 데다 레드 울프 같은 마수는 그런 일격이 들어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최소 상급 기사 3명은 있어야 가능성 있는 마수를 혼자서 상대하려 한다니·
엘리스로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기이잉
그러거나 말거나 가면의 남자는 손에 발현시킨 마나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검으로 전승시켰다·
-서걱!
“···!”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첫 검격과 함께 도합 세 번의 검격이 연이어 펼쳐졌다·
-서걱! 서걱! 서걱!
엘리스는 물론 레드 울프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세 번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말의 신음조차 지르지 못한 채 레드 울프의 몸은 그렇게 수십 조각으로 찢겨 버렸다·
상급 마수치곤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가면의 남성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마수의 사체를 무덤덤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
남겨진 둘 사이에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나서지 못해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는 찰나
-후두둑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빗물에 점차 몸이 젖어갔지만 엘리스의 입술은 오히려 바짝바짝 말라갔다·
정황상 자신을 구해주러 온 것 같긴 한데 그 연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찾아온 이유는 둘째 치더라도 일단 가장 궁금했던 건·
“당신··· 대체 누구야?”
그의 정체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마냥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황성에서뿐만이 아닌 스쳐 간 인생의 어디선가 분명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낯설지 않음을 넘어 오히려 익숙함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
가면의 남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또한 고민 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지면에 붙어있던 남성의 발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벅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엘리스는 불안했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오히려 편안해지기까지 한 기분·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과연 정상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즉
저 가면의 존재는 필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존재일 거라 엘리스는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시금 남성을 응시한 순간
“···!”
엘리스의 심장이 또 한 번 격하게 요동쳤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체형 본적이 있는 걸음걸이·
본래 피를 공유한 가족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척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생판 모르는 타인으로부턴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본연의 기운이 말이다·
그 기운을 지금
엘리스는 눈앞의 남자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내디디면 껴안는 것조차 가능할 거리까지 온 순간 남성은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지극히 무덤덤한 그와 달리 엘리스의 전신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윽!”
순간적으로 느껴진 고통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가면의 남성이 그녀의 상처 부위를 만진 것이다·
-피잉
새하얀 치유의 빛이 나타나 엘리스의 상처 입은 복부를 감싸 안았다·
빛은 벌어진 살집 안으로 들어가 안을 메꾸기 시작했으며 이내 출혈이 멈추고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재생작업에 돌입하였다·
7성급 치유마법 ‘재생의 손길’
방금 전 레드 울프의 사지를 무자비하게 찢은 남자치곤 상당히 안 어울리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무색할 정도로 엘리스의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상처의 치유도 치유지만 엘리스는 코앞의 거리에서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느덧 경계가 풀린 그녀는 슬그머니 검을 내려놓았다·
치유를 마친 남성도 몸을 일으켜 다시금 엘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성인이라 하기엔 다소 애매할 정도의 작은 키·
오히려 엘리스가 머리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세차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앳된 소년의 모습·
엘리스는 본능에 이끌리듯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힘들게 억누르며 마침내 그녀의 손이 남성의 가면에 닿은 순간
“애써 확인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면의 남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여태껏 흔들렸던 엘리스의 손길이 뚝 멈춰버렸다·
동작을 멈춘 그녀를 대신해 남성은 스스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렸다·
“아····”
여러 감정이 담긴 탄식과 함께 엘리스의 새하얀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심하게 쏟아지는 빗물이 그녀의 울컥한 감정을 더욱 더 구슬프게 하였다·
“시안···이니?”
차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뱉어진 물음이었다·
이에 남성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 동생 얼굴도 까먹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을까?
설사 1000년을 동굴 안에 갇혀 아무도 못 본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생의 얼굴이거늘·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절망밖에 남지 않은 그녀에게 나타난 구원의 존재는 바로····
“갑옷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엘리스 누님·”
그녀의 막내 동생 시안이었다·
엘리스는 빗물에 흠뻑 젖은 자신의 손으로 시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왜 왜··· 여기 있는 거니?”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혹여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지 의심마저 피어올랐지만 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엘리스의 얼굴엔 점차 환희가 드리워졌다·
“지금은 누님을 구하러 왔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주시면···!”
시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엘리스가 와락 끌어안았다·
사실 막내가 왜 여기 있는지 따윈 그녀에게 별로 중요치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에게 살 이유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존재가 나타났다는 거·
그것 하나만으로 지금의 엘리스에겐 너무나도 큰 위안이 돼주었다·
“고마워 시안· 내게 나타나 줘서····”
시안의 망토 위로 빗물과 함께 엘리스의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