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황실의 순방 (2)
새 학기를 맞이한 로열 아카데미·
등교 보류를 선언했던 학생들도 대부분 막바지에 출석함에 따라 어느 정도 운영이 가능한 수준까진 이르게 되었다·
현재까지 전 학기 대비 2/3 정도의 학생들이 복학을 완료했으며 이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상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어있는 한자리·
사태가 어떻든 상관없이 참으로 한결같은 어느 학생의 자리였다·
귀가는커녕 방학이 와도 꼼짝도 안 할 만큼 아카데미에 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정작 수업엔 죽어라 안 나타나는
그 자리를 못내 바라보는 아린으로선 참 희한할 따름이었다·
금일 예정된 수업이 모두 끝난 순간 아린은 곧장 일어나 자신의 기숙사가 있는 로열관으로 향했다·
더불어 빈자리의 주인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
로열관 정문에 도착한 아린은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아린 선배?”
루나브였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아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수업 끝나신 모양이네요?”
“그 그렇지· 근데 로열관엔 어쩐 일이야?”
아직 이유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대충 알 것만 같았다·
“시안 선배 만나러 왔어요·”
“호 혹시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선배 얼굴 보고 싶어서?”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썹을 움직이는 모습에 아린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더 웃긴 건 주위엔 그녀를 지켜야 하는 수호 기사들이 한 명도 안 보였다는 것이다·
“설마 혼자 왔어?”
“네· 전부 따돌리고 왔죠· 선배랑 만나는데 굳이 제 학회원들을 데리고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 수밖에 없는 소녀였다·
“선배도 시안 선배 보러 오신 거예요?”
“어? 뭐 그 그렇지! 시안이 또 수업에 안 나왔길래 그냥 한 번 찾아가 볼까 해서····”
“부럽네요· 저도 아린 선배처럼 시안 선배 근처에 살면 좋을 텐데····”
루나브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듯 보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래봤자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걸····”
두 소녀는 결국 발을 맞추고 들어가 시안의 방 앞에 이르렀다·
-똑똑
선명한 울림에도 불구하고 안에선 소식이 없었다·
“이상하네? 보통은 브라이언이라도 나와 줬는데?”
열 번 정도 찾아가면 그중 아홉 번은 브라이언이 반겨줬었다·
이번에도 딱히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오늘은 방 자체에 사람이 없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다 싶어 한 번 더 두들기려던 순간
“거기 지금 빈방이야· 아무도 없어·”
등 뒤에서 걸쭉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꺄악!”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아린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뭐야? 왜 비명을 질러! 사람 창문에서 떨어트릴 일 있어?”
그 역시 덩달아 놀라 소리쳤다·
“왜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야!?”
“왜? 난 지극히 평범한 복근 운동 중이었는데?!”
“세상에 어느 누가 난간에 매달려서 복근 운동을 해?”
“···?”
루나브는 지금 자신이 정상적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거구의 남성 한 명이 복도 창문 너머로 박쥐처럼 몸을 거꾸로 내밀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군가요· 저 사람?”
일단 첫눈에 봤을 때 학생이란 생각은 안 들었다·
“너도 이름은 들어봤을 거야· 세트 샤하르칸이라고····”
“모래의 왕자요?”
스파니아의 왕국의 1왕자·
입학 때부터 최고 수준의 잠재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은 시안과 더불어 수업에 가장 안 나오는 문제 학생이었다·
“암튼 그 방엔 지금 아무도 없어· 시안 그놈이 단기 휴학 신청했다더라·”
아린과 루나브로선 뜬금없을 소식이었다·
“단기 휴학? 이렇게 갑자기? 이유는?”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냐?”
그 또한 시안의 부재에 실망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대련이나 할까 싶어 한걸음에 달려왔더니만 팔자 좋게 놀러나 가고· 나도 이참에 휴학이나 할까?”
허나 시안과 다르게 더 이상 수업을 빠지면 정학 이상의 처분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이 그의 현 상황이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갑자기····”
갑작스런 소식에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덩달아 서운한 마음마저 피어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식솔들까지 데리고 사라진 걸까?
아직 서로의 마음이 완전히 공유하진 못했다는 것이 아린으로선 참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조금 섭섭하네요·”
그건 루나브도 마찬가지였다·
* * *
디오네 황제는 평소 순방을 나설 때 그리 많은 호위 병력을 대동하지 않았다·
수도 수지만 사실 그 병력들 중 황제와 직접 힘을 겨루어 이길만한 기사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제 혼자서 호위 병력 모두를 지킬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황제의 힘은 강력했다·
하지만 자식들은 달랐다·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곤 하나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기에
황제 없는 순방엔 평소보다 더 많은 병력들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경계문으로 마차가 도착하고 황실의 일원인 3황자와 4황자 모습을 드러냈다·
“하 이 더러운 전선의 공기를 다시 맡게 될 줄이야· 감회 참 새롭네·”
“체통을 지켜라 네로비앙· 우린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네네~ 알고 있습니다요·”
다소 태평스러운 4황자 네로비앙 달리 3황자 파비앙의 얼굴엔 결연함이 가득했다·
그들 또한 일전에 황제와 함께 전선 순방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칙칙한 분위기에 형제는 혀를 내둘렀다·
곧 그들의 뒤로 또 다른 황실의 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습니까 누님? 처음으로 전선 지역에 발을 내딛으신 소감은요?”
이번 순방의 총책임자인 2황녀 비올렛 세벨러스였다·
“····”
생기 한 점 없는 삭막한 공간이 낯설면서도 신기한 듯 그녀는 주변 풍경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이해를 못하겠네· 루이넬 형님은 대체 뭘 믿고 이번 순방을 비올렛 누님께 맡기신 거지? 마수들 보고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네·”
네로비앙의 다소 불순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파비앙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공감이라도 한 듯 그 또한 불신 가득한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딴 건 몰라도 왜 누님 쪽에만 저렇게 많은 병력들이 붙은 거지?”
똑같은 황실 일가인 자신들과 다르게 2황녀의 곁엔 더 많은 수호 기사들이 붙어있었다·
“듣자 하니 퀴젤 가에서 비올렛 누님을 위한 수호 기사들을 추가로 보냈답니다· 첫째 형님과는 다르게 언제 요절할지 모르는 핏줄이니 꽤 신경을 쓴 거겠죠·”
순방에 투입된 기사들의 모두 황군 소속이지만 그렇다고 출신마저 같은 건 아니었다·
비올렛 황녀의 수호 기사들은 대부분 외가 쪽에서 차출된 퀴젤 가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2황녀의 순방이 결정되자 퀴젤 가 쪽에서 갑작스레 파견되었으며 일각에선 가문의 실세이자 현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인 쿤델이 보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가 불편하진 않으신지요?”
그런 2황녀의 곁으로 중후한 미성을 가진 금발의 남성이 다가왔다·
“그냥 좀 새롭네요···· 저로선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곳이에요”
온실 속 화초와도 같은 그녀에겐 익숙지 않을 붉은 하늘·
비올렛은 불편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전선의 쓸쓸한 공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새삼 제 위치를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되네요· 아바마마와 오라버니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도록 이번 순방 책임지고 완수해야겠어요·”
황녀의 얼굴에서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이에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녀님의 원활한 순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올렛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고마워요· 에쉘 공····”
* * *
빛의 기사단으로부터 받은 엘리스의 첫 임무는 이러했다·
황실의 순방이 진행되는 동안 황실 일가를 수호할 것·
황군 기사들과 함께 혹여 있을 불미스런 일을 대비한 일종의 지원 임무였다·
임무 자체는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나 엘리스로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적은 것도 아닐뿐더러 황군의 호위 병력 또한 저리 많은데 굳이 지원군이 필요할까?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라면 그래도 설명은 되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에쉘 오빠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수행원이라는 신분으로 2황녀와 동행한 에쉘·
이전부터 접점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기에 굉장히 의외의 조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친분이 있던 1황자가 부탁이라도 한 것일까?
혼란에 겨운 엘리스와 달리 베르트 공작은 환희에 찬 얼굴로 황실 일가를 맞이해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이렇게나 장성해주시니 황제 폐하께서도 무척이나 든든하겠군요·”
“부족한 저희의 순방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비록 신분상 높은 위치에 있으나 황녀와 황자들은 대륙의 수호자이자 황제의 친우인 공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사실 지금 보이는 공작의 모습도 엘리스로선 이상할 따름이었다·
전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실력이 인증된 기사들 외엔 자식들조차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건만
황제도 없는 어린 자식들만의 순방을 저리 쉽게 허용해주다니 이는 평소의 공작답지 않았다
“엘리스님?”
그런 그녀의 곁으로 세실리아가 다가왔다·
“잠시 와주시겠습니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엘리스는 에쉘이 있는 쪽을 한 번 조심스레 쳐다본 뒤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짙은 흙먼지가 휘날리는 막사 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세실리아는 이내 엘리스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차마 반응을 안 할 수 없던 엘리스가 펄쩍 뛰며 되물었다·
“에쉘 오빠가 아버지께 직접 부탁한 일이었다고?!”
소리가 너무 컸는지 세실리아가 손가락을 세우며 만류했다·
“네· 자신이 수행원을 담당할 터이니 비올렛 황녀님의 순방을 베르트 공작님과 루이넬 황자님에게 직접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를 의식한 황후마마 측에서 파비앙 네로비앙 황자님들을 보낸 것이고요·”
“수행을 자청한 이유는?”
세실리아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것까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분명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을 텐데····”
엘리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너무 과한 신경을 쓰시는 건 아닌지···· 에쉘님과 친분이 있으신 1황자님께서 본인대신 부탁하신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세실리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엘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아····”
황성 연회 이후 에쉘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엘리스에게 이런 이유 모를 행보는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자극시키게 되었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 된 거 같긴 한데····”
그게 언제 어디서부터 꼬였는 질 모르니 엘리스로선 참담할 지경이었다·
‘넌 알고 있는 거니 시안?’
살기로 가득했던 막내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여기있었구나 엘리스····”
“···!”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엘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갑옷과 피부 사이로 쉴 새 없이 흐르는 땀방울·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듯한 기분이었다·
“에 에쉘 오라버니?”
방금 전까지 황녀의 곁에 있었던 에쉘이었다·
엘리스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불안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달리 에쉘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보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