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해와 안개 (3)
격동하는 심장과 급박해지는 혈류·
아린은 현재 이유 모를 어색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이것은 본인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하염없이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
그 전날 자신의 손이 시안으로부터 잡혔을 때 느낀 감정과 동일했다·
마치 그때의 감정이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에 아린은 알 수 있었다·
시안은 지금 매우 분개해 있다는 것을·
“제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오고 말았군요· 혹 운동 중에 방해를 한 건 아닌지요?”
보리스 교관은 어제와 같은 넉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던 그녀를 대신해 곁에 있던 시안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막 끝난 참입니다·”
가면을 바꿔 쓰기라도 한 듯 시안의 얼굴은 한순간 평범하게 변해버렸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안 학생과 꼭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어서 말이죠·”
언뜻 평범한 사제 간의 대화일 수도 있겠으나 아린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죠·”
허나 거절할 거란 예상과 다르게 시안은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 연구실로 가실까요? 혹여 괜찮다면 아린 학생도 같이 동행해주시죠?”
“네? 아 전 그게····”
흠칫 놀란 아린이 뭐라 답해야할지 급 고민에 휩싸였다·
그녀를 대신해 답을 한 것은 시안이었다·
“황녀님께선 아직 정해진 운동량을 완수하지 못하셨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린은 구보에 이어 근력운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걸 시안이 알고 말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동행을 시안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안타깝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네···· 다음에 꼭 시간을 내겠습니다·”
아린의 시선이 다시 시안에게 향했다·
시안은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눈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황녀님·”
“그 그래 시안! 나중에 보자····”
얼떨결에 인사를 하던 것도 잠시
-스윽
이내 시안이 아린의 한 손을 슬그머니 붙잡은 뒤 귀에다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곧장 방으로 가세요····”
“···?”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여지도 없이 시안은 곧 보리스 교관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불과 반나절 전에 방문했던 그의 연구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방의 온기 연구 물품들의 배치 심지어 책상에 펴져 있는 역사서까지·
애매한 시선 처리는 의심을 줄 수 있기에 두리번거림 없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
보리스는 여타 교관들과 마찬가지로 방문 학생을 위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아직 들인 물건이 없어 대접할 게 이것밖에 없군요·”
어디서나 볼법한 흔한 차였다·
뭔가 불순한 내용물은··· 없어 보였다·
“일단 시안 학생과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맞은편 자리에 앉은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묵혀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순간 역류하듯 치솟았다·
허나 내색하진 않을 것이다·
저놈이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니·
“새벽에 루나브 학생이 찾아왔었습니다·”
“···!”
저 말엔 차마 반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대뜸 자신의 잘못을 불더군요· 한밤중에 나를 만나기 위해 연구관에 찾아왔답니다· 혼자서 말이죠····”
혼자?
나를 빼고 말했단 건가?
대충 의도는 알 것 같았다·
혹여 흔적이 남을 것을 우려해 스스로를 먼저 판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하지만 제가 부재해있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고 이에 해선 안 되지만 무단침입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그러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이 역사서를 봤다 했습니다·”
나와 루나브가 보았던 그 역사서였다·
“정작 중요한 건 이 역사서가 아니었죠· 그녀가 흥미를 가지고 봤던 건 바로 맨 뒷장에 있던 이 낙서였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뒷장을 펴내 내게 그 낙서를 보여주었다·
이 역시 어제 보았던 것과 동일했다·
“시안 학생은 혹시 이 낙서가 뭘 의미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정확히 4초 만에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힌트를 드리지요· 이 중심에 있는 커다란 것은 태양입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해를 의미하죠· 그럼 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구름이나 바람 정도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긴 하나 굳이 발설하고 싶진 않았다·
이에 보리스가 의미 불명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것은 안개입니다·”
루나브가 말한 것과 똑같은 답이었다·
“해와 안개는 일반적으로 공존하지 않습니다· 안개가 있는 곳에서 해가 보이지 않고 해가 보이는 곳에 안개가 있진 않죠· 해는 우리 곁에 항상 있습니다· 어딜 가든 같은 자리에 떠 있죠· 하지만 안개는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보리스는 펜을 하나 꺼내 그려진 낙서에 덧칠을 시작했다·
“불멸의 존재와도 같은 해에게 안개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순 없죠· 이 티끌만도 안개가 우리의 눈을 가려버리면 어찌 될까요?”
“···해의 빛을 보지 못하겠죠·”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바로 그겁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해에게 있어 안개는 불필요한 존재일 수도 있을 겁니다·”
속에서 웃음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래 맞는 말이지·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저를 경계하시던 것 같습니다만 혹시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보리스는 미소를 유지한 채 또다시 물었다·
“애초에 전 처음 접하는 모든 이들을 경계합니다· 그게 교관님이라서 특별히 경계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뒷말은 거짓말이다·
“전 모시고 있는 주군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저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고 구원해주신 분이죠· 제게 있어 그분은 해로부터 뿜어지는 밝은 빛과도 같습니다·”
그 주인이 누구를 지칭하는진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전 이 로열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재학 중인 모든 학생들의 생기부를 검토했습니다· 왜일까요? 학생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물론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아카데미에 온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죠·”
내 반응이 궁금한 듯 그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덤덤한 시선을 유지했지만 사실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네놈이 이 시기에 이곳을 왜 찾아왔는지·
“바로 안개의 존재를 찾기 위해섭니다·”
“····”
또 한 번 정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으니까·
“···소설 쓰는 게 취미이십니까?”
잠시 후 허무맹랑한 말이라며 일축하니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름 진지하게 말해보았는데 시안 학생에겐 안 통했던 모양이군요·”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건 교관님의 의사는 잘 알았습니다· 결국 이 아카데미에 누군가를 찾으러 왔단 말이지 않습니까?”
“역시 시안 학생 눈치가 빠르군요·”
칭찬이라도 하려는 듯 박수를 쳤지만 내겐 역겨운 수작에 불과했다·
내가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가?
같잖다·
그러면서도 참 역겹다·
그가 섬기고 있다는 주인?
논할 가치도 없는 그 악마 새끼다·
저놈이 찾고 있다는 안개?
두말할 것 없이 나다·
허나 아직은 모를 테지 그러면서도 자기가 여기 온 이유를 내게 까발린 이유는 뭘까?
날 떠보는 거다·
나란 존재는 애초부터 범주 안에 있었고 이를 서서히 옥죄이면서 들춰내려는 것이다·
진짜 가소로워 미치겠네·
근데 이상하게 화는 안 난다·
역겹다 못해 가소로운 나머지 지금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전 이 아카데미에서 발이 넓지 않습니다· 친한 학우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사람 자체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가요? 별로 좋은 생활은 아닌 것 같군요· 듣자 하니 수업도 잘 안 나온다고····”
“어쭙잖은 충고하실 생각이라면 됐습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보리스는 말리지 않았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안 학생· 다음엔 수업 때 뵙도록 하죠·”
나는 일말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방을 나갔다·
* * *
시안이 나가고 홀로 남겨진 보리스·
그의 표정은 쉽사리 판단하기 난해할 정도로 굉장히 애매했다·
다만 입가에 남아있는 은은한 미소로 볼 때 딱히 나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딱딱한 돌처럼 굳어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웃고 있구나?”
그의 귓가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풀지 못한 난제를 마주하고 나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옵니다· 이를 풀었을 때의 즐거움이 기대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지만 지금 방안에 남겨진 이는 오직 보리스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직접 얘기해본 소감은 어떻더냐? 저 아이가 빛을 위협하는 안개의 존재 같더냐?”
“그것이 참 애매합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정말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속을 알 수가 없더군요· 참 흥미로운 학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리스는 시안에게 보여주었던 낙서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전 아직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 추악한 마검의 존재가 이런 아카데미에 숨어있다니 말이죠· 에쉘님은 대체 무엇을 보신 걸까요?”
이에 허공으로부터 낯선 웃음소리가 들렸다·
“킥킥! 마검의 주인은 딱 티가 나는 법이지· 항상 갈증에 목말라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찾기 힘들 수도 있을 거야·”
“뭔가 마검에 대해 아시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사실 마검의 소유주를 별로 중요하게 볼 필욘 없어·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마검에게 몸과 영혼을 먹혀버리거든 그게 마검의 본성이니까· 그렇게 여러 소유주의 힘을 흡수한 마검이야 말로 정말 무서운 존재지· 하지만····”
목소리 주인은 뭔가 재미난 일이라도 떠오른 듯 한참을 웃어댔다·
“지금의 마검은 뭔가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닐지도 모르겠어· 정말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
보리스로선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다·
허공으로부터 계속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의 흥미로운 호기심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