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해와 안개 (1)
“암만 그래도 야밤에 누군지 모를 사람이 네 뒤에서 나타났는데 어떻게 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 거지?”
그녀의 직선을 그리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전에 납치당한 것 땜엔 그러시는진 모르겠지만 절 무슨 생각 없는 미련 곰퉁이처럼 보고 계시네요?”
부정은 못 할 것 같아 그냥 침묵했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한 거로 보셨다면 큰 착각이에요· 애초에 선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건 정확히 20m 전부터 알아챘으니까요·”
“하 뭘 근거로?”
“냄새로요·”
“냄새?”
“선배 몸에서 나는 특유의 채취 같은 게 있어요· 코를 파묻고 싶을 만큼 좋은 냄새는 아니어도 마치 사람의 피로 향수를 만든 것 같은 그런 냄새라고나 할까요? 암튼 그 냄새 덕분에 선배가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순간 얼 척이 없다 못해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실험의 결과물 중 후각의 상승도 있는 건가?
“게다가 전 애초에 다른 사람의 접근을 그리 쉽게 허용하지도 않아요· 만약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제게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했더라면 그대로 마나 구체를 여러 개 생성해서 몸의 구멍이란 구멍엔 죄다 집어넣을 거예요· 안에서 지들끼리 터지라고····”
거 꼬맹이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네·
“네 보호자들이 너 여기 있는 건 알고?”
“당연히 모르죠· 알면 또 난리 나요· 나오기 전에 마법으로 제 환영을 만들어 두고 왔죠· 아마 그들 눈에는 침대에서 이불 묻고 자는 걸로 보일 거예요·”
음?
나도 모르게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가람 학회에서 보낸 마법사들이면 못해도 6~7성급일 텐데 그들의 감시망을 전부 뚫고 나왔다고?
“놀라실 거 없어요· 그나마 아카데미라서 감시가 덜 한 편이니까 선배 만나러 학회에서 탈출한 적도 있었는데요 뭐·”
그렇게 철두철미한 얘가 납치는 왜 당한 거냐고 물으려는 걸 애써 참아냈다·
더 해봐야 말만 길어질 것 같으니 그냥 이쯤에서 수긍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래서 우리 대단하신 후배님께선 이 야밤에 연구관엔 어인 일이시죠?”
“음 아무래도 선배랑 같은 목적이지 않을까요?”
“내가 무슨 목적으로 온 줄 알고?”
“새로 부임한 보리스 교관님을 조사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순간 등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처음 봤거든요· 선배가 그렇게 분노한 모습· 아린 선배를 지키려 했다기보단 그 보리스란 사람 자체를 굉장히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분명 그 사람에 대해 뒷조사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죠·”
이건 뭐랄까 처음부터 수를 읽혔다는 느낌?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미리 설치된 쥐덫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말은 즉 넌 내가 여기 올 거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뭐 그런 셈이죠· 사실 넘겨짚은 거라 확신은 안 들었어요· 근데 와주셨네요?”
자기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것에 의기양양해진 듯 그녀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 꼬맹이랑은 말을 섞어봐야 내 입장만 난처해질 거란 걸·
새삼 그녀의 하트 커브를 떼 준 것이 실수는 아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듯싶었다·
“뭐 개인적인 일인 것 같으시니까· 딱히 묻지는 않을게요· 어쨌든 지금은 제가 선배랑 한 뜻이 되어 움직인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얘가 또 말을 이상하게 하네?
“어이 후배님· 우리 선은 좀 긋지? 난 너랑 함께한다 한 적 없거든?”
그녀의 입술이 대뜸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기분 나쁨을 표현하던 것도 잠시 이내 쌍심지를 추어올리며 물었다·
“착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선배 전 잃을 게 없어요·”
음?
“다시 말하면 제가 지금 당장 선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소롭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목표가 맞으면 협심을 하는 게 기본적인 이치에요· 근데 선배는 그걸 안 하려 하시잖아요? 마치 자기는 원래부터 혼자 모든 걸 해왔다는 사람처럼····”
말을 하면 할수록 어째 입고 있는 옷이 하나씩 벗겨지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멀쩡히 진행하긴 그른 것 같군·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얼마든 지요·”
“넌 그 사람을 왜 조사하려는 거니?”
일단 루나브와 보리스 이 둘 사이에 특별한 접촉은 없던 걸로 안다·
설마하니 순수한 제자의 마음으로 선생님을 알고 싶다는 이런 거지 같은 생각으로 오진 않았겠지·
이 꼬맹이 성격상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했다·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호기심?”
“네· 그 보리스란 사람 마법 등급이 무려 8성이라던데 저로선 이름조차도 못 들어본 사람이에요· 르헬름이란 성도 처음 들어봤고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온 학회들 중 누구도 그 사람을 알진 못했어요·”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애초에 르헬름이란 성 자체가 남아있는 대륙의 기록들 중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
가람 학회의 관계자들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가장 의문스러웠던 건 그거예요· 8성급 마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내비치는 마나가 전혀 없었다는 거·”
그녀의 눈에선 의문을 비롯한 의심의 감정까지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 타인의 마력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
“뭐 제대로 된 건 신체적인 접촉까지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좀 새로웠어요· 그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선배 말고 또 처음이었거든요·”
뒷말이 좀 이상한데?
딴지를 걸까 싶다가도 어쨌든 의도는 알아냈으니 바로 포기했다·
오늘은 천상 이 꼬맹이를 대동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대화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연구관의 불빛 또한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다·
타이밍을 봤을 때 지금이 적기인 듯 보였다·
[야 주인아·]
발을 떼려는 차에 잠자코 있던 케이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차마 답은 할 수 없어 차분하게 시선만 돌렸다·
[들어갈 거면 난 여기 두고 가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소리치듯 속삭였다·
[저쪽 공기가 굉장히 불쾌해서 그래· 얌전히 있을 테니까· 대충 아무 데나 꽂아두고 갖다와·]
아예 돌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버리는 그녀였다·
의외였다·
의외인 걸 넘어 이건 케이람이 한 번도 안 하던 짓이었다·
“변덕도 작작 부려 케이람· 갑자기 난데없이 뭔····”
[두고 가라면 좀 두고 가·]
순간 시린 마검의 눈빛이 나의 감각을 저리게 만들었다·
마치 전생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섬뜩한 감각을 다시 접하는 것만 같았다·
“뭐해요 선배? 안 가요?”
그런 나를 루나브가 재촉했다·
주저할 시간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 모르게 속에서 슬그머니 케이람을 꺼내 나무 사이에 꽂아두었다·
[잘 다녀와 주인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속 편한 미소로 나를 배웅하였다·
“허튼 짓 하지 마라····”
당장의 할 수 있는 거라곤 통할지 모를 경고뿐이었다·
* * *
-우우웅
걷는 와중에도 신기해서 자꾸 발아래를 보게 된다·
발아래를 감싸고 있는 푸른색의 마나·
혹여나 퍼질 수 있는 발소리를 방지하기 위함인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참고로 내가 아닌 내 옆에 있는 이 꼬맹이가 걸어준 거다·
“이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할 수 있는 거죠· 우리 몸으로부터 생성된 마나를 굳이 검이나 아티팩트에만 넣을 필욘 없잖아요· 딱히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이 꼬맹이 굉장히 똑똑하다·
마법이란 것 자체를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잘 이용할 수 있는지 그 원리 자체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실리적인 것만 추구했던 기존 학회의 성향과는 뭔가 다르다고나 할까?
정작 그녀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이윽고 ‘보리스 르헬름’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방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일단 불은 꺼져있어서 사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에 문으로 귀를 갖다 대려는 순간
“···!”
나보다 한발 먼저 루나브가 귀를 대었다·
슬그머니 눈까지 감으며 문 너머의 기운을 확인해 보는 것도 잠시 그녀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바로 방문을 열었다·
-끼익
“사람은 없어 보이네요·”
“먼저 말이라도 한 다음에 문을 여는 게 어떻겠니?”
어차피 상관없지 않냐는 듯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뭔가를 기대하고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방안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다른 연구관들과 마찬가지로 연구 물품들과 서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수상한 마력의 움직임 같은 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개인 물품들을 안 들여놓기라도 한 걸까요? 어째 수상해 보이는 게 하나도 없네요·”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사실 이런 식으로 둘러본다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
시리카 당주의 방도 남들이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 연구실처럼 보일 테니·
새삼 책들 사이에 칼이라도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의미 없는 물건들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내 눈길은 책상 앞에 올려져 있는 한 권의 책으로 향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그 책의 겉면부터 확인해보았다·
“역사서인가요?”
어느샌가 따라붙은 루나브가 책의 제목을 보며 물었다·
내게도 꽤나 익숙한 대륙의 통합 역사서였다·
“이분 역사 담당 교관은 아니셨던 걸로 아는데?”
책이 펴진 채로 있는 걸 봐선 읽고 있던 도중 이곳을 나간 걸로 보였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읽고 있었을진 모르겠으나 아무 생각 없이 갖고 읽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혹시나 해서 책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이마저도 평범한 역사서였을 뿐 뭔가가 숨겨져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장시간 앉아 죽치고 확인해볼 만한 것도 아니었다·
암호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해야 할 것이다·
“···?”
그러던 와중 책 끝 장으로부터 뭔가 알 수 없는 그림을 발견하였다·
그림이라기보단 사실 낙서에 가까웠다·
흠·
대체 뭘 그린 거지?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커다란 태양이 하나 있고 그 주위에 구름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드리워져 있는 낙서였다·
식견 낮은 내 눈으로 보기엔 도저히 뭘 표현하려 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재밌는 낙서네요·”
반면 곁에서 같이 보던 루나브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가 재밌다는 건데?”
“딱 봐도 굉장히 흥미롭잖아요· 빛을 상징하는 태양 주위로 정체 모를 형상들이 몰려드는 것 같은 마치 이 태양을 잡아먹겠다는 분위기로 달려드는 듯한 느낌이에요·”
태양을 잡아먹으려 드는 정체 모를 형상들이라····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넌 이 형상들이 뭐로 보이는데?”
그녀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안개요·”
“···!”
순간 정수리에 돌덩이 하나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