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변화의 바람 (4)
해가 지면 달이 뜬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렇게 달이 뜨면 나는 마실을 나간다·
이 역시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해온 나만의 루틴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기분이 뒤숭숭하다·
뭐 때문인지는 안다·
낮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다만 왜인지는 모르겠다·
당연하겠지만 난 사람의 웃는 얼굴보다 일그러지고 질색한 얼굴을 더 많이 봐왔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 절망에 젖어 들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추악한 얼굴을 말이다·
허나 낮에 봤던 황녀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절망이 아닌 슬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련한 자신을 두고 한없이 슬퍼하고 있는
나로선 굉장히 낯선 얼굴이었다·
[얼굴이 어지간히 울상이네? 하긴 여자를 울려놓고 얼굴 펴고 있으면 그거만큼 쓰레기인 남자도 없지!]
“안 울렸는데?”
이건 정확히 따져야 한다·
난 어디까지나 울릴 뻔한 거지 울리진 않았다·
[그게 더 나쁜 거야! 울릴 거면 시원하게 울려야지 왜 속으로 꽁꽁 묵혀서 아파하게 만드니? 어휴 이건 진짜 내 주인이지만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늘 그렇듯 케이람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한다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내 잘못인가?
뭔가 크게 잘못한 건 없는데 이상하게 죄를 지은 것만 같다·
평소에 나라면 분명 내 알 바 아니라며 일말의 신경조차 안 쓸 텐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아린 황녀의 울상인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 봤던 그 삐쩍 마른 놈은 네 원수의 꼬붕인 거야?]
“그런 셈이지·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 악마 자식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야·”
우리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못 푸는 이유가 뭘까?
지극히 간단하다·
몰라서 그런 거다·
하물며 사람도 마찬가지지·
속히 훤히 보이는 인간들은 그만큼 상대하기 쉽다·
반대로 유추하기 힘들고 파악하기 어려울수록 맞서기 난해한 것이다·
보리스 그놈이 딱 그런 경우지·
분명 뒤가 어둡고 속에서 구린 냄새가 난다는 건 알지만 정확히 뭔지는 몰라 더 어려운 진면인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
사실 지금 와서 죽이라면 못 죽일 것도 없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내 복수에 더 도움 될 테니까·
허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에쉘과 마찬가지로 익히지도 않은 고기를 먹어봐야 내 입맛만 잡치기에
그 또한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천천히 익힌 뒤 절정에 오른 순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가 왜 아카데미에 왔는지부터 확인해봐야겠지·
그래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난 지금 여긴 왜 온 걸까?
“하압!”
당찬 기합 소리가 밤하늘을 찌르는 이곳·
체력단련장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단련에 매진하는 브라이언이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곳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에 견주는 또 한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다·
팔과 다리 위로 탄탄하게 솟아오른 근육
절제된 자세와 정확한 움직임까지·
불과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정말 비약적인 상승을 이루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뭐 원래 사람은 목표가 생겼을 때 가지고 있던 잠재능력이 빛을 발한다고 했다·
아린 황녀의 수호라는 궁극의 목표가 생긴 이상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을 이어나가겠지·
아마 장담하건대 전생의 대륙 제일 검 보다 훨씬 이상의 경지를 이룩하지 않을까 싶다·
“···!”
레시무스가 나를 발견하고선 동작을 멈췄다·
“신경 쓰지 마· 하던 거 계속해·”
차마 그럴 순 없었는지 급히 내게 달려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낮에 시안님께 저지른 무례는 이 자리에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건데 왜 네가 사과해?”
황녀의 몸에 손을 댄 건대 솔직히 그 자리에서 칼로 베여도 할 말 없지·그녀로선 최선의 행동을 한 것이다·
“넌 이 시간에 항상 나오는 거야?”
“예· 황녀님께서 잠드시고 나면 항상 나와서 개인 단련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뭐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거니 상관은 없고
내가 이곳을 온 이유는 레시무스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온 것이다·
“무슨 할 말 있으신가요?”
내 속을 꿰뚫어 봤는지 그녀가 먼저 물었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물었다·
“아린 황녀님 황성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녀의 눈이 일순간 동그랗게 뜨였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혹시 여쭤 봐도 될까요?”
“아니 뭐 그냥 평소랑 다르게 낯빛이 안 좋아 보였다고나 할까? 암튼 좀 어두워 보이셔서····”
살다 살다 진짜 별걸 다 묻는군·
그래도 찝찝함에 휩싸여 내 기분만 잡칠 바에는 속 시원하게 물어 푸는 게 낫다고 본다·
잠시 고민하던 레시무스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안님께선 황성 연회에 왜 오셨던 거죠?”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야 황녀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으니까····”
“근데 왜 황녀님을 만나 뵙지 않으신 거죠?”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기분 또 오랜만이군·
“전 황녀님과 시안님껜 정말 어떤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만큼 큰 은혜를 입었어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 이 아카데미에서 온전히 살아있지도 못했겠죠·”
그녀의 눈빛이 결의엔 찬 강인한 눈으로 바뀌었다·
“두 분으로부터 구원받은 목숨 전 언제든 두 분께 바칠 각오가 돼있어요· 물론 시안님께선 필요 없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녀님만큼은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지켜드리고 싶어요· 그게 제가 황녀님 곁에 있는 이유고요·”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지 않나?”
“하지만 제가 아무리 옆에 있어 드린다 해도 황녀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응어리를 풀어드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풀어드리지 못한다면 그 응어리들은 썩히고 고일 수밖에 없겠죠· 그에 대한 아픔은 황녀님께 그대로 갈 테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녀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말했다·
“시안님께서 그 응어리를 풀어주실 순 없으신가요?”
순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연회 사건이 있었던 그 날 밤· 아린 황녀님의 방으로 루이넬 황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1황자가?”
레시무스는 루이넬 황자로부터 아린 황녀가 들었던 모욕적인 언행들을 전부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별로 놀랍진 않았다·
지극히 1황자스러웠기에
모든 일에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데다 절대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은 안 하지·
결국 황자와 에쉘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상관없이 아린 황녀는 원치 않는 불행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열세 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일이지·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시안님과 아린 황녀님이 전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이미 들었어요· 황녀님은 황제라는 커다란 꿈을 꾸기에 앞서 시안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을 성장시키려 하시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가고 계세요·”
안다·
실제로 근 2년간 보여주었던 아린 황녀의 성장은 나조차도 놀라게 만들었으니·
입학 이후로 모든 과목에서 단 한 번도 S등급을 놓치지 않은 명실상부 우수 학생·
일각에선 신의 아이라 불렸던 엘리스 누나와 비교할 만큼 아카데미에서 매우 고평가 받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결과물들은 철저히 노력에 기반 되었다는 거?
엘리스 누나가 노력을 안했다는 게 아니다·
누나는 항상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항상 자신이 가진 모든 포텐셜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이 워낙 엄청났기에 그 노력이 묻혔을 뿐이지·
하지만 아린 황녀는 다르다·
그녀는 엘리스 누나만큼 압도적인 재능을 보유하지 않았다·
그 부족한 재능을 커버하기 위해 그녀는 뼈를 깎는 노력을 감행했다·
그러니 황성에서는 몰라도 이곳 아카데미에서만큼은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
거기서 내가 뭘 더 해줘야 해?
‘아주 잘하고 계세요’라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누누이 말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길만 제시해줄 뿐 그 길로 이끌어주진 않는다·
설사 그 길에 놓인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해도 손을 내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나라고 독촉은 해줄지언정 절대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주진 않을 것이다·
왜냐고?
난 구원자가 아니니까·
내가 뭔 짓을 하든 간에 결국 나란 존재의 본질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레시무스를 보며 말했다·
“황녀라는 직책은 무겁다는 말론 부족할 만큼 막중해· 그 누구도 들어줄 수 없어· 나 역시 마찬가지고····”
아린 황녀는 앞으로 더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껏 쌓인 응어리 또한 앞으로 더 무거워지겠지·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온전히 그녀가 지고 나가야 할 짐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덜어줄 수는 있겠지·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이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레시무스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머지않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안님은 참 알 수 없는 분이네요····”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누가 나를 알겠는가?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대련장에서 나왔다·
* * *
아카데미 동쪽 교관들의 개인 연구실이 모여 있는 연구관·
시리카 당주를 비롯한 모든 교직원들의 숙소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지만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적지 않게 보인다·
별 무리 없이 잠입하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슨 부엉이들도 아니고? 쟤들은 뭐 잠도 없다니?]
오늘만큼은 그녀의 말에 동감하고 싶다·
아마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밝아서까지 불이 안 꺼질 방도 있을 것 같은데
불 켜진 방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잠입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들킬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아직 모든 교관들이 모이지 않는 지금 상황이야말로 연구관에 잠입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인데····
“···?”
쟨 뭐지?
[다람쥐 한 마리가 숨어있네?]
연구실 정문으로 불과 10m·
천적을 피한 다람쥐마냥 나무 뒤에 꼭 붙어있는 어느 소녀 한 명이 보였다·
스산한 밤바람에 살랑살랑 휘날리는 하늘빛 꼬랑지·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로선 언제 봐도 반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당돌한 꼬맹이·
루나브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터벅터벅 그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염없이 연구실 정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니?”
무심한 질문에 돌아온 것은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오셨어요· 선배?”
마치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
어이가 없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덤덤하다 못해 무안할 만큼의 낙관적인 눈빛·
어쩐지 지난번과 비교했을 때 더 독해진 느낌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