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7장 하늘을 꿈꾸는 자에겐 피도 눈물도 사치다 (2)
암시장은 단어 그대로 은밀하게 열리는 시장이었다· 시중에 떳떳하게 풀 수 없는 물건이 많이 풀리기 때문에 열리는 시간도 장소도 제멋대로였다· 그 때문에 미리 정보를 알지 않는 이상 일반인이 암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옥계에 암시장이 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성도인 곤명과 가깝기에 굳이 암시장을 찾지 않아도 대부분의 물건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인들의 왕래가 끊기면서 대부분의 물건이 품귀 현상을 빚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열린 암시장은 상인들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상인들은 물건의 출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워낙 갑작스럽게 열렸다가 순식간에 파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암시장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밤이 깊은 시각 현무로 공터에 한 무리의 사람이 십여 대의 마차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공터 한쪽에 마차에 실린 짐을 쌓기 시작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짐이 모두 쌓였을 때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상인들이 하나둘씩 공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공터에 쌓인 짐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질 좋은 비단을 비롯해 도자기 약재 무기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 대부분이 운남성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암시장을 연 자들은 별말이 없었다· 자신들끼리 가끔씩 귀엣말로 대화를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상인들이 공터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이제부터 진정한 흥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시장을 연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물건을 모두 확인하셨을 거요· 모두 하자 없는 물건이오· 가격은 저번과 동일하오· 사실 분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남자의 말에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한 명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인들 중 유독 왜소해 보이는 상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하자가 없는 물건이겠지요? 혹여 문제가 생기면····”
“거리끼면 안 사면 그만이오· 사려는 분은 많으니까·”
“말해주기 곤란한가 보군요·”
상인의 질문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몸에서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소·”
“그래도 그 정도는 대답해 줘도 무방하지 않나요? 우리도 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인데·”
“거리끼면 안 사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거리끼기는 한 모양이군요· 역시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서 얻은 물건이 아니군요·”
순간 남자의 몸에서 살기가 확 풍겨 나왔다· 상인을 노려보는 남자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네놈은 누구냐?”
“그건 제가 오히려 물어보고 싶은 말이군요· 당신은 누군가요?”
남자의 살기에도 상인은 오히려 생글생글 웃었다·
“너 평범한 상인이 아니구나·”
“당신도 평범한 상인이 아닌 것 같군요·”
상인은 남자의 압도적인 기세와 살기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런 상인의 태도가 남자의 심기를 자극했다·
우두머리 남자 주위로 다른 남자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들의 몸에서도 남자 못지않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 다른 상인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한발 두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왜소한 상인은 여전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스릉!
남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상인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까지 낀 채 재밌다는 듯이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상한 낌새를 느낀 우두머리 남자가 외쳤다·
“모두 죽이고 판을 접어라!”
“옛!”
남자들이 대답과 함께 상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악!”
“살려줘!”
상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지만 남자들은 악착같이 상인들을 쫓아 기어이 죽였다· 비명이 터지고 피가 난무하면서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자신으로 인해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졌는데도 우두머리를 도발한 상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쉬악!
“죽어랏!”
상인을 향해 우두머리 남자의 검이 날아왔다· 순간 상인이 손을 들어 검을 막았다·
캉!
분명 맨손으로 막은 것 같았는데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검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반진력(反進力)에 우두머리 남자가 흠칫했다·
“너?”
그 순간 상인이 큭큭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얇은 막이 벗겨지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태양을 보지 못한 듯 창백한 피부와 유달리 붉은 입술 그리고 독사처럼 차갑게 빛나는 눈매가 유난히 인상적인 남자였다·
“인피면구?”
우두머리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인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인피면구에 감춰진 본모습 때문이었다·
인피면구를 벗은 남자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꼬리를 잡았군· 쥐새끼들·”
“너는 누구냐?”
“율경천·”
“설마 설풍대?”
우두머리 남자 윤문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하얀 전포를 거친 이십여 명의 남자가 암시장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풍대(雪風隊)·
패권회주 조천우의 직속 무력 조직이다· 세상에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일을 주로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오직 조천우와 엽평만이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설풍대 개개인은 절정 이상의 고수들로 이뤄져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춰왔기에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설풍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잔혹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 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설풍대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율경천은 설풍대를 이끄는 대주였다·
지난 오 년간 설풍대를 이끌고 수많은 공적을 쌓은 철혈의 무인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악귀대주(惡鬼隊主)라고 불렀다·
윤문천도 무력에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상대가 율경천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가 괜히 악귀대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길!”
윤문천이 욕설과 함께 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율경천은 가만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팟!
율경천이 전포를 펄럭이며 윤문천을 향해 쇄도했다· 뒤로 아무리 빨리 물러나도 앞으로 달려드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율경천은 순식간에 윤문천을 따라잡았다·
“큭!”
윤문천이 검을 휘둘러 율경천의 목을 노렸다·
파라락!
독사처럼 파고드는 검날을 보면서도 율경천은 전혀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윤문천의 검신을 덥석 잡았다·
그가 끼고 있는 장갑은 천잠사로 만들진 것으로 어지간한 도검의 공격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기물이었다·
율경천이 손에 힘을 주자 윤문천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
“제길!”
윤문천이 동강난 검을 버리고 주먹으로 공격하려 했지만 율경천의 움직임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윤문천이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율경천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쾅!
“컥!”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윤문천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윤문천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용없을 거야· 공선장(空線掌)에 격중되면 근육이 따로 놀아 얼마간 힘을 쓰지 못해·”
율경천이 윤문천을 비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장내는 조용해져 있었다· 설풍대가 암시장을 연 남자들을 거의 제압한 것이다·
역시 설풍대라는 탄사가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제압당한 남자들이 피를 토하며 픽픽 쓰러졌다·
“독약이다! 놈들의 아혈을 제압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설풍대의 무인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독약을 삼킨 남자들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채 절명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지독한 극독이었다·
‘설마?’
율경천이 급히 윤문천을 바라보았다·
피잉!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야공에 울려 퍼졌다· 율경천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간발의 차이로 화살 한 대가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 바닥에 박혔다·
“누구냐?”
겨우 화살을 피한 율경천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 들었다· 그 순간 세 대의 화살이 더 날아왔다·
카카캉!
율경천은 도를 휘둘러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하지만 율경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감히!”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윤문천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누군가가 그를 구출해간 것이다·
율경천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도주할 수 있을 성싶으냐?”
율경천이 어두운 길거리로 몸을 날리자 설풍대가 그 뒤를 따랐다· 한밤중에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설풍대가 빠져나간 암시장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암시장에 물건을 사러 왔던 상인 대부분은 싸움에 휘말려 죽거나 큰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있고 암시장을 열었던 남자들도 모조리 죽어 있어서 거대한 무덤을 연상케 했다·
“후아! 지독하군· 완전히 도살장이 따로 없군·”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삐쩍 마른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와 함께 들어오는 이는 진무원과 곽문정이었다· 곽문정이 질렸다는 눈빛으로 이십 대 후반의 남자를 바라봤다·
‘도대체 하루에 얼굴이 몇 번이나 바뀌는 거야?’
삐쩍 마른 남자는 바로 청인이었다· 그의 새롭게 바뀐 얼굴에 곽문정은 도통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침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수라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암시장을 연 남자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설풍대는 상인들의 안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암시장을 연 남자에게 죽은 상인보다 설풍대에게 죽은 상인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청인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한발 늦은 것 같은데·”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정보를 얻는 게 늦어 이 지경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철시를 주워 들었다·
“적귀병단·”
진무원은 이미 두 번이나 철시를 사용하는 자들과 조우한 적이 있기에 단숨에 알아보았다·
“적귀병단?”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문을 표한 것은 청인이었다·
“어이 이봐?”
그 순간 진무원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청인과 곽문정이 급히 따랐다·
“이런 제기랄! 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