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6장 악연의 끈은 질기게 이어진다 (2)
설화가 칭얼거리는 듯한 느낌에 진무원이 눈을 떴다· 그러자 설화를 잡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청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무원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내력을 한번 휘돌리고 나서야 자신의 혈맥에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몽혼약인 백일몽이었다·
그림자 내력이 몸 안에 들어온 백일몽을 둘러싸서 효과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찍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방심했군·”
점소이의 넉살에 넘어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강호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방심을 했단 말인가? 진무원은 자신이 안이했음을 인정했다·
청인의 눈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설화의 요기에 흘린 건가?”
설화는 요검이었다· 설화는 오직 진무원만을 주인으로 인정할 뿐 그 어떤 이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화의 요기는 단순히 내공이 고강하다고 해서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진무원은 잠시 청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청인의 손에서 설화를 떼어놓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저런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기력이 다해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청인을 풀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설화에 홀린 것이 맞는다면 설화를 통해서 심문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판단을 내리자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진무원이 청인에게 다가갔다·
“당신의 이름은?”
“처 청인·”
청인의 대답에 진무원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소속은?”
“비월·”
“비월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
“비월은 흑월의 주요 감시 대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비밀 조직이다· 천(天) 지(地) 인(人) 세 등급으로 나눠져 있고 천 자 등급에 속한 비월일수록 감시 능력이 뛰어나다·”
“당신의 등급은 어떻게 됩니까?”
“천자조에 속해 있다·”
청인은 무의식 상태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술술 털어놓았다·
‘매월령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매월령은 흑월의 사천지부장이었다· 그녀는 흑월이 강호 초출에게 오히려 더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진무원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일어날 후폭풍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청인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던 진무원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곤명에서 사람이 찢겨 죽었습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그건····”
설화에 홀린 와중에도 청인이 말하길 망설였다· 그만큼 중요한 정보라는 증거였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얼마 전부터 미쳐 날뛰는 자들이 곤명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분명 평범한 사람들이고 특별히 미칠 이유도 없었는데 갑자기 광증이 발작했다· 그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는데 힘이 몇 배나 강해졌으며 부모형제도 알아보지 못하고 찢어 죽였다·”
“보통 사람이 미쳐 날뛴다는 겁니까?”
“이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운중천과 패권회에서는 그 이유가 독일지도 모른다고 보고 당가의 무인을 초빙했다·”
진무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독이라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살포했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 운남에서 상인들을 납치해 간 자들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들에 대해 알아낸 것은 있습니까?”
“현재 흑월 내에서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아직은 알아낸 게 없다는 뜻이군요?”
“그··· 렇다·”
“음!”
진무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후 청인에게 물었다· 청인은 그의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설화에 홀린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갑자기 청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설화에 홀린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필시 뇌가 망가지고 말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진무원은 그의 손에서 설화를 빼앗았다· 그러자 청인의 발작이 잦아들더니 크게 숨을 토해냈다·
“커억! 허억!”
한참을 거친 숨을 토해내던 청인이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왜?”
그는 설화에 홀려서 진무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설화를 잡기 전까지의 상황뿐이었다·
고개를 들자 진무원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뿔싸! 들통 났구나!’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서 일한 자의 직감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잠깐 사이 진무원에게 들통 나고 만 것이다·
청인은 잠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대로 도주할까? 기습을 하면 쓰러뜨릴 수 있을까?’
그 순간 진무원의 비수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청인이라고 했나요?”
“헉! 그걸 어떻게?”
청인이 눈을 부릅떴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그의 본명이 청인이라는 사실은 오직 흑월주와 매월령밖에 모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분명 저 요상한 검을 잡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 확인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서늘하기 그지없는 진무원의 눈동자가 보였다· 진무원의 눈을 보는 순간 전신의 힘이란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떤 사술을 썼기에····”
“사술? 당신에게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은 나에게 몽혼약을 복용시키지 않았습니까?”
“그건····”
진무원의 한마디가 청인의 말문을 콱 틀어막았다·
‘백일몽은 일단 복용하면 해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절대 깨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깨어난 거지?’
진무원은 초절정고수 두 명 이상을 잠재우고도 남을 양을 복용했다· 그 정도라면 해약을 복용하고 깨어나도 반나절 이상을 혼미한 상태로 누워 있어야 될 정도이다·
겨우 한 모금 마신 곽문정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깊은 수마에 빠져 있는데 대부분 복용한 진무원이 어떻게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지 도대체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 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진무원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청인의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변했다·
분명히 무언가 주절거린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을 쇠막대기로 휘저은 듯한 느낌이다·
“크윽!”
“그만 가보세요· 당신이 준 정보 잘 사용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 잠깐· 이대로 가라고?”
“어차피 서로 간에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잖습니까?”
“으아악! 미치겠네!”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청인의 모습을 보며 진무원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일 중 하나가 술에 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를 때다·
스릉!
갑자기 청인이 품속에서 기형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잔뜩 휘어진 검신에는 은은한 푸른 기가 감돌고 있었다· 청인의 독문 무기인 현월비(玄月匕)였다·
청인이 속한 비월은 정보 수집 조직이지 무력을 사용하는 조직은 아니다· 때문에 은신술과 첩보술 잠입술 역용술같이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필요한 잡기를 우선으로 익힌다· 하지만 그것도 인(人) 자 조에 속한 이들 이야기였다·
지자조와 천자조에 속한 이들은 자신과 흑월을 보호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다· 특히 천자조에 속한 이들은 강호의 절정고수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
청인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가득하다·
진무원이 특급 감시 대상이라지만 흑월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를 죽여서라도 반드시 흑월의 비밀을 지켜야 했다·
역수로 쥔 청인의 현월비에 검기가 맺혔다·
“놈! 각오해라! 감히 흑월의 비밀에 접근하려는 죄는 오직 죽음으로만 용서받을 수 있다!”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비월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청인의 얼굴에 스산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진무원을 향해 현월비를 겨눴다·
곽문정이 몸을 뒤척이다가 찬 기운에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조그만 자기병을 들고 서 있는 진무원이 보였다·
“형?”
“일어났느냐? 몸은 좀 어떠하냐?”
“예? 괜찮긴 한데 대체····”
곽문정이 주위를 둘러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멀쩡한 객잔에서 잠을 잤는데 깨어나 보니 벽 한쪽이 부서져서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고 바닥에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널브러져서 끙끙거리고 있다·
남자의 눈과 뺨에는 시커먼 멍이 들어 있고 코피가 입술까지 적시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자는 또 뭐고?”
처참하게 부서진 방 안이 큰 싸움이 있었단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무원이 설명해 주었다·
“넌 백일몽이라는 몽혼약에 취해 있었다· 일단 한번 복용하면 해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깨어나기 힘들다고 하더구나·”
“그럼 저자가?”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일 때 청인이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크윽! 제기랄! 비월은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 차라리 날 죽여라!”
무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는 것은 좀 전에 확실히 깨달았다· 비 오는 날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늘씬하게 얻어터졌으니까·
반항? 그것도 무력이 어느 정도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도 강했지만 진무원은 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어디서 이런 괴물이····’
이제껏 수많은 무인을 감시했지만 진무원 같은 무인은 처음이다·
진무원은 설화를 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청인은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을 만큼 얻어터졌다· 그의 독문 무기인 현월비는 진무원의 괴상한 손가락질 한 번에 폭발했고 현월은 그야말로 곤죽이 되고 말았다·
“날 죽여라 이 악마야!”
“굳이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흑월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이 당신이 정보를 유출한 것을 알면 그냥 둘까요?”
“흥!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그전에 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비밀을 지키지 못한 비월은 살 가치가 없으니까· 내게서 어떤 정보를 빼냈는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청인의 독한 모습에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굳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필요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흑월은 나에 대한 정보를 원하지만 나는 흑월에 대한 정보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운남성에서 일어나는 일의 배후에 존재하는 자에 관한 정보뿐·”
청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제야 진무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온 것이다·
“그럼?”
“서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때까지 한시적인 동맹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