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6장 악연의 끈은 질기게 이어진다 (1)
옥계의 분위기는 상상외로 흉흉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몇 명 보이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임수광이 일행을 이끌고 향한 곳은 청월장(靑月莊)이라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패권회가 지부 대신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청월장의 총관이란 자가 수하들을 대동하고 일행을 마중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염 총관 운중천의 무인들은?”
“아직 도착 전입니다·”
“음! 이들에게 숙소를 안내해 주게·”
임수광이 염 총관에게 진무원과 곽문정을 가리켰다· 그러자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게 움직이기 편합니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당기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곳에서 실종된 숙부를 찾아왔습니다· 장원에 머물다 보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임수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남의 집에 손님으로 온 자일수록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하다못해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허락을 맡아야 할 테니까·
“숙부를 찾을 단서는 있는가?”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곳에서 실종되었다는 것밖에는·”
“음! 쉽지 않겠군· 부디 무사히 숙부를 찾길 빌겠네· 혹시 패권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염 총관에게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진무원이 포권을 취한 후 걸음을 옮겼다· 곽문정도 임수광 등에게 포권을 취한 후 급히 진무원을 따랐다·
당미려가 멀어지는 진무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진무원은 곽문정과 함께 옥계 거리를 거닐었다·
“형 따로 갈 곳은 정한 거예요?”
“아니·”
“그럼 차라리 청월장에 머무는 것이 낫지 않았나요? 패권회에서도 도움을 준다고 하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편이다· 그리고 나는 패권회를 크게 믿지 않는다·”
“····”
진무원의 단호한 대답에 곽문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에 진무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거라· 어차피 강호에서는 타인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기에 하는 말이니까·”
“예!”
“문정아 네가 백룡상단을 따라 이곳에 왔다면 어느 객잔을 숙소로 택할 것 같으냐?”
“백룡상단이라면 대규모 인원이 항상 움직이니 자연 제일 큰 객잔을 찾겠지요· 물론 마구간 시설도 잘되어 있어야 하고 별채도 따로 있으면 더 좋지요·”
“그럼 주위에 그런 객잔이 있는지 찾아보자·”
“아! 거기서부터 추적하려는 거군요?”
그제야 곽문정이 진무원의 진의를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다· 아무리 신비롭게 실종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인원이 사라졌으면 반드시 흔적이 남을 것이다·”
“옥계가 곤명처럼 넓은 곳은 아니니 백룡상단이 머물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겠군요?”
“그럴 것이다·”
“그건 제게 맡겨두세요· 아무래도 그런 경험은 제가 더 많으니까요·”
“믿겠다·”
“헤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곽문정은 금세 어디론가 뛰어갔다· 한 식경을 기다리자 그가 다시 헐레벌떡 나타났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그렇게 큰 객잔은 대진객잔 한 곳밖에 없다고 하네요·”
“대진객잔?”
“예! 옥계에 오는 큰 상단 같은 경우는 무조건 그곳에서 잔다고 하더라구요·”
그것으로 행선지가 결정됐다· 두 사람은 대진객잔으로 향했다·
대진객잔은 옥계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 층으로 된 목조 건물이 허름하긴 했지만 워낙 규모가 커서 어지간한 상단이 와도 다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진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널따란 객잔 내부는 한가하기 그지없었고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점소이만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곽문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요·”
“예? 예! 어서 옵셔·”
깜짝 놀란 점소이가 번쩍 눈을 뜨고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방 있느냐?”
“예? 보다시피 남는 게 방입니다요· 흐흐!”
점소이가 휑한 객잔 내부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의 과장된 행동이 두 사람을 웃게 했다·
“그렇구나· 아주 파리가 터전을 잡았구나·”
“여섯 달 전부터 이 모양입니다요· 아마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객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냐?”
“말도 마십시오· 아주 손님이 딱 끊겼습니다· 워낙 흉흉한 소문도 많이 돌고 해서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구나·”
진무원과 곽문정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가 재빨리 주전자와 물잔을 내놓으며 물었다·
“며칠이나 머무실 생각입니까?”
“일단 사나흘 정도 생각하고 있다· 더 늘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제일 좋은 방을 드릴게요· 흐흐!”
점소이가 능글맞게 웃었다·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식사도 하셔야죠?”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프구나· 자신 있는 음식으로 몇 가지 내오거라· 술도 있으면 가져오고·”
“헤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점소이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의자에 앉아 옥계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수려한 풍경 때문에 평소 시인묵객이 많이 찾아오던 거리에는 검은 그림자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곽문정이 입을 열었다·
“백룡상단과 철기당도 이곳으로 올까요?”
“그렇겠지· 결국 실종된 곳에서 추적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대신 그들은 패권회와 의견을 조율해야 하니까 우리보다 조금 늦지 않을까 싶구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면 여러 가지를 조율하게 되고 또 많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움직임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때문에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철기당 백룡상단 패권회 운중천 그리고 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까요?”
“글쎄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일이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거지·”
“에휴!”
곽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쉽게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이름들의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진무원이 곁에 없었다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진무원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금단엽·’
단 한 번의 만남에 불과했지만 그의 얼굴이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그만한 남자가 그리는 큰 그림이란 어떤 것일까?’
진무원은 금단엽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적었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금단엽의 머리가 무척이나 비상하다는 것과 고절한 음공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이다·
그런 남자가 남군위라는 초절정의 무인과 함께 그리는 그림이 결코 평범할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일단은 황숙을 구하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하자·’
다른 모든 것은 그 후의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 진무원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황철이었다· 그를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진무원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쯤 점소이가 쟁반 가득 음식을 내왔다·
“헤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잉어찜이 식탁 가운데를 차지하고 그 옆으로 몇 개의 음식이 더 놓였다· 향이 그윽한 것이 제법 맛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점소이가 내놓은 것은 붉은 종이로 밀봉한 조그만 항아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대진객잔의 명물인 벽로주입니다· 주인어른께서 손수 담근 술입니다·”
점소이의 장담처럼 밀봉된 항아리에서는 제법 향긋한 주향이 흘러나왔다·
“좋은 술 같구나·”
“일단 맛을 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무원이 밀봉을 뜯었다· 그러자 주향이 더욱 진해졌다·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고 한잔을 따라 단숨에 마셨다·
“좋구나·”
식도를 울리는 짜릿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곽문정이 눈을 빛냈다· 그 의미를 모를 진무원이 아니었다·
“한잔 마셔볼 테냐?”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그래도 주신다면 딱 한 잔만 마실게요· 헤헤!”
약간은 망설이는 듯했지만 거부하지 않는 곽문정이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곽문정에게 술을 따라줬다· 그러자 곽문정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곽문정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호상단을 따라다니면서 한두 잔씩 얻어 마신 경험이 있었다· 강호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칼을 들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면 그 순간부터 한 명의 무인으로 대해주니까·
곽문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유달리 달짝지근한 것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헤헤! 맛있네요·”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럼 식사들 맛있게 하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점소이가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점소이의 장담처럼 음식은 맛있었고 벽로주는 일품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방으로 올라갔다· 먼 길을 와서인지 이상하게 피곤이 밀려왔다· 두 사람은 침상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슬쩍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대진객잔의 점소이였다· 그가 잠이 든 진무원과 곽문정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곯아떨어졌군· 백일몽(百日夢)의 효과는 역시 탁월하단 말이야· 흐흐!”
그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인 채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점소이는 진무원과 곽문정이 먹은 술에 아주 강력한 백일몽이라는 몽혼약을 탔다· 효과는 늦게 나타나지만 일단 잠이 들면 해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절대 깨어나지 않는 약이었다· 이름처럼 백 일 동안 꿈을 꾸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강력한 효과를 자랑했다· 또한 독이 아니었기에 내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감지하기 힘들었다·
점소이의 진정한 정체는 청인이었다· 이제까지 멀찍이 떨어져 진무원을 관찰만 했던 그가 드디어 점소이로 분해 접근한 것이다·
청인은 진무원이 확실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 그의 짐을 조심스럽게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요상하단 말이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으니·”
그동안 청인은 진무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면밀히 관찰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공 노수 신분 내력 나이까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흑월의 가공할 정보력으로 알아낸 것은 겨우 단 하나 진무원이 지인을 찾기 위해 백룡상단과 함께한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청인은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진무원의 짐을 뒤져서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찾아내기로 한 것이다·
청인은 진무원의 짐을 조심스럽게 뒤졌다· 하지만 찾아낸 것이라곤 당미려가 준 옥패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청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젠장! 무슨 놈의 인간이····”
도대체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진무원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설화에 꽂혔다·
“저건?”
일단 한번 시선이 꽂히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상하게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청인이 자신도 모르게 설화에 손을 가져갔다·
“크헉!”
설화에 손이 닿는 순간 청인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