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5장 기연(奇緣)과 악연(惡緣)은 연이어 찾아온다 (3)
진무원과 곽문정은 새벽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시간에 패권회의 무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이 얼마 없기에 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그야말로 금방이었다· 짐을 모두 싼 그들에게 임수광이 다가왔다·
“당 대협에게 들었네· 옥계에 함께 가기로 했다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임 대협에게 부담이 된다면 저희는 따로 가겠습니다·”
“아닐세! 내 여분의 말을 내어주지·”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어차피 남는 말인데· 이쪽으로 오게· 간단하게 아침이나 함께하지·”
“네!”
진무원과 곽문정은 임수광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선 패권회의 무인들이 간단하게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죽을 끓여놓은 상태였다·
이미 당기문 당미려는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죽 그릇을 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진 소협·”
“자리에 앉게·”
두 사람이 미소로 진무원과 곽문정을 맞았다·
임수광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건량을 불려서 끓인 건데 제법 먹을 만하다네· 우리는 먼 곳으로 떠날 때 항상 이렇게 식사를 해결하지·”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이군요·”
“북쪽에서도 우리는 늘···· 아닐세· 식기 전에 들게·”
임수광이 직접 죽을 한 그릇씩 떠서 진무원과 곽문정에게 건네주었다· 진무원이 살펴보니 단순히 마른 건량만 불린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몇 가지 곡물이 더 들어 있었다· 아마 건량을 만들 때 아예 곡물도 같이 넣은 모양이었다·
‘밀야와의 전쟁 때 지급된 건량이 이랬다고 했지· 나도 나중에 이렇게 건량을 준비해야겠구나·’
한입 떠보니 맛도 나쁘지 않았다· 진무원은 미소를 지으며 죽을 떠먹었다· 그에 곽문정도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당기문이 임수광에게 물었다·
“옥계엔 언제쯤 도착할 것 같은가?”
“늦어도 해지기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으음!”
“옥계에 저희 쪽 장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운중천의 무인들이 합류할 겁니다·”
“그때까지는 조금 쉴 수 있겠군·”
“예 아마 운중천 무인들이 합류하면 쉴 틈도 없을 겁니다·”
“알겠네·”
대답을 한 당기문이 죽을 한 그릇 더 떴다· 든든히 먹어둬서 체력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당미려가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 소협도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저는 이 정도가 좋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가요?”
“원래 배부르게 먹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가졌군· 배가 부르면 몸이 무뎌지기 마련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이는 바로 임수광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항상 조금씩 모자라게 먹어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충고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주제넘은 말을 했군· 자네 역시 벽을 넘어선 무인일진대· 그냥 한 귀로 흘려듣게·”
임수광은 말해놓고도 내심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결코 이렇게 남에게 무언가를 쉽게 충고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무언가가 그의 마음 속 빗장을 풀게 했다·
‘나는 저자에게서 그를 떠올리고 있는 건가? 단순히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임수광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어두워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무원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는 중이었다·
‘진무원·’
진무원 일행은 전지호(滇池湖)를 지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전지호의 모습에 진무원은 약간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차 창문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기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넓기로 따진다면 중원의 호수 중 여섯 번째라고 알려진 곳일세· 처음 보는 사람들은 바다라고 착각하기 일쑤지·”
“자연의 섭리는 정말 신비하군요· 어떻게 이런 고원 지대에 이렇게 넓은 호수가 생성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동감일세· 전지호야말로 운남의 젖줄이라 할 수 있지· 이 거대한 호수를 바탕으로 운남의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수평선 위로 떠오른 해가 전지호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물결에 부딪쳐 산란하는 눈부신 빛의 향연을 진무원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빛은 부서지고 흩어진다·
물결은 잠잠한 듯 보이지만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자연은 이처럼 순환하고 끝없이 이어지는구나· 빛이 아무리 강해도 이면은 존재하고 오히려 더 그늘이 지는 법· 인생사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평범한 깨달음이었지만 진무원에겐 그렇지 않았다· 진무원은 순간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단전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그림자 내공이 갑자기 요동치더니 쑥하고 빠져나와 전신을 치닫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그의 몸을 휘돌기 시작한 그림자 내공 때문에 진무원은 적잖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그림자 내공이 움직이는 대로 놔두었다·
투둑! 투둑!
혈관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진무원뿐이었다· 그림자 내공 스스로가 최적의 방식으로 운용될 수 있게 진무원의 혈맥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미세 혈도가 타동되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신경이 대뇌와 연결되었다· 동시에 진무원이 느낄 수 있는 전방위 감각의 영역이 몇 배가 더 확장됐다·
마치 봉사가 눈이 뜨이고 귀머거리가 귀가 번쩍 틘 느낌이다· 이제까지 미처 보지 못하던 광경들까지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기연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깨달음으로도 인간은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진무원은 새삼 깨달았다·
패권회의 무인들이 곁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진무원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들은 진무원이 평상시와 달라졌다는 사실도 알아보지 못했다·
진무원의 몸을 휘돌던 그림자 내공은 모든 변화가 끝나자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다시 단전의 이면으로 모여들었다· 그제야 진무원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휴!”
그의 숨결을 통해 몸 안에 쌓여 있던 탁기가 외부로 배출되었다·
“왜 그래요 형?”
그제야 곽문정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요?”
진무원과 그나마 오래 있던 곽문정만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진무원은 말고삐를 움켜쥔 채 전방위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자 이제껏 느낄 수 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역이 감각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눈 귀 피부로 전해진 정보는 그의 뇌에서 순식간에 조합되었다· 마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또 하나의 세상· 그것은 진무원의 뇌에 구현된 심상의 세계였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심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가 곧 그의 공간이고 간격(間隔)이란 사실을·
무공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고 벽을 수없이 뛰어넘다 보면 자신만의 간격이 생긴다· 외부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할 수 있고 자신의 기량을 십 할 발휘할 수 있는 공간·
높은 수준에 이른 고수일수록 자신만의 간격이 넓고 광활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싸움은 서로 간의 간격이 겹치는 곳에서 벌어진다·
간격이 넓다고 해서 항상 절대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유리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진일보였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공이 상승한 것은 그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진무원의 곁으로 임수광이 다가왔다· 자신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 아닌가 살짝 긴장했지만 임수광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옥계에 거의 다 왔네·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하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당 대협 근처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게·”
“예!”
임수광은 이번엔 부하들에게 다가가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부하들이 마차를 중심으로 넓게 흩어져서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면서도 절도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내심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그들은 꽤나 고련을 한 모양이구나· 하긴 그는 항상 부하들을 혹독하게 수련시켰지·’
그가 알고 있는 임수광은 결코 요령을 모르는 남자였다· 그 때문에 그의 휘하에 배치된 부하들은 항상 죽겠다고 난리였다· 반대로 전장에 나갔을 경우 가장 피해가 적은 것도 임수광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유지한 채 말을 몰았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옆에 있는 곽문정의 호흡과 마차에 타고 있는 당기문 숙질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금단엽 남군위 그리고 또 어떤 위협이 존재할는지····’
진무원은 임수광에게 금단엽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 역시 잘 알지 못하는 이였고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무원은 임수광을 믿지 않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북천사주에 속한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대주님 여기····”
그때 패권회 무인의 목소리가 진무원의 상념을 깼다· 진무원이 정신을 차리니 앞서가던 패권회의 무인이 말에서 내려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진무원도 말에서 내려 패권회의 무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음!”
진무원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맹수에게 습격을 받은 것처럼 갈가리 찢겨진 시신의 모습은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시신이 세 구가 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 흩어진 팔다리와 육신이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우웩!”
멋모르고 다가오던 곽문정이 급히 뒤돌아서서 구역질을 했다·
임수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다시 습격이 있었던 건가?”
그의 말 속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식의 습격이 있었고 패권회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단 뜻이군· 그리고 운중천에서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이 시신의 무엇이 운중천이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했을까 생각하며 진무원은 시신을 자세히 살폈다· 그 결과 진무원은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은 시신의 상처에서 어떠한 무기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시신 곳곳에서 인간의 손바닥 모양의 멍이 보였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당기문이 탄식을 토해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맨손으로 찢어 죽인 것 같군· 엄청난 괴력이야·”
‘찢어 죽였다는 건가? 사람이 사람을?’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 관념적 선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집안의 교육을 통해서든 사회적인 경험을 통해서든 제반 지식을 익히고 자신이 넘어야 할 선과 그러지 않아야 할 선을 구별하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본능적으로 살인을 할 때 주저하게 마련이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다· 그래서 권력욕이 높은 지도자일수록 휘하의 병사들에게서 도덕적인 관념을 제거할 여러 가지 방안을 시행하게 마련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입맛에 맞는 병기로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병장기로 죽이는 것과 산 채로 찢어 죽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아무리 타고난 살인마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의 악력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자라면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훨씬 힘이 덜 드는 방법으로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찢어 죽인 자는 무공을 익힌 자만큼이나 강하고 사람을 산 채로 찢어 죽일 만큼 인성이 마비되었단 뜻인가?’
진무원의 상식으로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옥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임수광이 소리쳤다·
“모두 진용을 유지하고 경계를 철저히 하라! 적이라 판단되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죽여도 좋다!”
“옛!”
패권회의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말에 올라탔다·
진무원의 시선이 옥계를 향했다·
‘기연(奇緣) 다음엔 악연(惡緣)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