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5장 기연(奇緣)과 악연(惡緣)은 연이어 찾아온다 (2)
진무원이 고개를 들자 마차에서 내리는 당미려와 당기문이 보였다· 당미려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진무원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당 소저 여긴 어떻게?”
“저희는 옥계로 가는 길이에요· 설마 진 소협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옥계로 간다구요?”
“네!”
당미려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뒤로 당기문이 다가왔다·
“그러는 자네는 여기서 뭘 하는 겐가? 곤명의 객잔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었는가?”
“저도 일이 있어 옥계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패권회에서 운중천에서 온 분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운중천에서 약속을 변경했다네· 갑자기 옥계에서 곧장 합류하자고 하더군·”
“음!”
“다행히 패권회에서 옥계까지 호위해 줄 무인들을 대동시켜 줬다네·”
이미 곤명으로 오는 도중 습격을 받았기에 패권회에서는 정예무인들로 하여금 당기문 숙질을 호위하게끔 했다·
당기문이 수하들을 지휘하며 노숙을 준비하는 우두머리 무인을 바라보았다·
“팔비신장(八臂神將) 임수광 대협이라네· 듣기로는 패권회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인데다가 권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당할 자가 거의 없다더군·”
진무원의 시선이 자연 임수광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가 어두워 사람들은 그의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 소협이 옥계로 가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함께 가는 건데요·”
“이제부터라도 함께 가면 되지 않겠느냐? 허허! 진 소협이 대동하면 든든하지·”
당기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임수광보다는 진무원이 훨씬 더 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
당기문이 일행을 모닥불 가로 이끌었다· 진무원과 곽문정 등이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옥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언질을 받았습니까?”
“대충은 들었는데 너무 엄청나서 쉬이 믿기지 않는군·”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 아직은 나도 확인하지 못해서 쉽게 말하지 못하겠군· 하나 옥계에 들어가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니 조금만 참게·”
“알겠습니다·”
당기문의 무거운 분위기에 덩달아 진무원과 곽문정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때 임수광이 다가와 당기문에게 말했다·
“당 대협 노숙할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고생하셨네· 이쪽은 나를 구해준 진 소협일세·”
당기문의 말에 임수광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그는 정광이 형형한 눈으로 진무원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아직 나이가 젊은데 무공이 대단한 모양이군· 나는 패권회의 임수광이라고 하네·”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진무원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순간 임수광이 흠칫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이름이 똑같군· 혹시 사문을 알 수 있겠는가?”
“워낙 조그만 곳이라 말해도 모를 겁니다·”
“음!”
진무원의 대답에 임수광이 침음성을 흘렸다· 진무원이 일부러 대답을 회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려 하지 않는데 더 이상 따져 묻기도 힘들었다·
‘그일 리 없지· 그는 이미 칠 년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에겐 커다란 바윗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멍에가 있었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얼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이름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눈앞에 있는 진무원과 똑같았다·
대세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지만 그에 대한 동향만큼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다· 칠 년 전 그가 죽었단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한 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임수광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진무원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무원과 비슷하게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했다·
‘아닐 게야· 진짜 그라면 절대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볼 수 없어·’
임수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무거워졌기에 당미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불을 쬐고 있는 진무원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어볼 것이 많은데 무거워진 분위기 때문에 선뜻 말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모두가 잠이 든 밤 진무원은 설화를 품에 안은 채 홀로 모닥불 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곽문정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진무원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질 것처럼 빛나는 별들의 바다가 북방의 거친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거친 세상에 홀로 버려지기 전 그의 곁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맴돌았다· 그들은 진무원에게 무척이나 친절했고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진무원은 세상이 무척이나 따뜻한 곳인 줄 착각했다·
임수광도 진무원이 착각하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진무원에게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다· 만날 때면 웃음으로 대해줬고 항상 무언가라도 하나 더 가르쳐 주려 했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그는 누구보다 매정하게 진무원 부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다고 딱히 그를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진무원 부자를 배반한 이가 비단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진무원은 더 이상 임수광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 중원을 주유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을 것이다· 그때마다 일일이 분노하다 보면 스스로를 좀먹게 될 것이다·
‘이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일·’
진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 문득 지난밤 금단엽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그를 불러내고는 신비롭게 사라진 남자·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운남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것뿐이다·
‘그의 정체는? 목적은 무엇일까?’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겨우 사적인 원한으로 이런 일을 벌일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좀 더 크고 원대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와는 앞으로 계속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치 운명처럼·
진무원은 꺼져가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불길이 확 살아 올랐다·
‘어쩌면 그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밀실에 상의를 벗은 채 남군위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최근에 생긴 듯한 끔찍한 검상이 나 있다·
남군위는 눈을 감은 채 운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코에서 흘러나온 하얀 기류가 요동쳤다·
운공이 절정에 달한 듯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전신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웅!
갑자기 그의 전신이 크게 떨렸다· 운공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하얀 기류는 빠른 속도로 그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얀 기류가 그의 콧속으로 훅 빨려들어 갔다·
마침내 운공이 끝난 것이다· 남군위가 이제껏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크윽! 지독하군· 온종일 운공했는데도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다니·”
그가 옆구리의 검상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보통의 상처는 운공 한 번이면 완치는 하지 못하더라도 운신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낫는다· 하지만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는 달랐다· 상처의 회복이 더딘데다가 끔찍할 정도의 고통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군위는 몇날 며칠을 밀실에 처박힌 채 상처를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남군위는 곁에 벗어두었던 옷을 대충 걸친 채 밀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인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듯한 수림과 각종 기화요초가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남군위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모든 풍경을 지나쳤다· 누군가 정성을 들여서 가꾼 곳이겠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에 심력을 소모하는 시간에 차라리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 허름한 복장으로 풀을 뽑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단엽·”
그의 부름을 들었는지 남자가 뒤돌아봤다· 농부들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옷을 입고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바로 금단엽이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남군위를 맞았다·
“군위 다 나은 모양이군·”
“또 흙을 만지고 있는 거냐? 네놈이 그 짓 하는 거 보니까 생각할 것이 많은 모양이구나·”
“후후!”
금단엽이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남군위의 말처럼 그는 생각할 것이 있을 때마다 흙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남군위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그를 만나고 온 거냐?”
“그렇다네·”
“크크! 역시 그랬군· 그가 자네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어·”
남군위가 근처에 있는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엄청난 몸무게가 더해지자 평상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그 모습에 금단엽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았다·
“몸은 괜찮은가?”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움직일 만은 해· 뒈지지 않은 것으로 감사해야지· 그때는 정말 목줄이 끊어지는 줄 알았거든· 크큭! 정말 악귀 같은 놈을 만났어·”
“다행이군·”
“자네는 어땠는가?”
주어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금단엽은 단숨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곤란하게 됐어·”
“그 정도인가? 자네가?”
“범상치 않더군·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어· 이제까지 우리의 이목에 왜 그런 자가 걸리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야·”
남군위는 많이 놀랐다· 금단엽이 이 정도의 극찬을 하는 것을 처음 본 까닭이다·
냉소적이면서도 타인에 대한 평가가 박하기 그지없는 금단엽이다· 최근에 그가 타인을 평가한 가장 극찬이 겨우 ‘쓸 만하다’ 정도였으니 말 다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일단 자신도 그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심혈을 기울여 키운 철귀궁사(鐵鬼弓士)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손실이었다·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더군·”
“역시 그렇군·”
남군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무원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존재였다· 겉으로 보이는 온화한 모습은 거짓이었다· 그의 내면은 실로 불같은 투쟁심이 가득 타오르고 있었다· 직접 그와 싸워본 남군위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떡할 것인가? 이대로 계획을 철회할 것인가?”
“그럴 수야 없지· 그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인 것은 확실하지만 겨우 그 한 사람 때문에 대계를 철회할 수는 없어·”
“으음!”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어·”
금단엽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남군위가 그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다· 하지만 금단엽은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재밌게 됐어· 세상은 이래서 살 만한 곳인 것 같아·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세워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연이어 나타나니까·”
“크큭! 그게 웃을 일인가? 울어도 모자랄 판에·”
“아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해·”
“단엽·”
“잠들어 있는 밀야를 깨우려면·”
금단엽의 나직한 목소리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