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5장 기연(奇緣)과 악연(惡緣)은 연이어 찾아온다 (1)
진무원과 곽문정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챙겨 먹은 후 태평객잔을 나섰다· 아직 거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가자· 부지런히 걸으면 내일 저녁쯤이면 옥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예!”
곤명에 올 때는 백룡상단 덕분에 편히 올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의 두 다리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말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시간에 마시장이 문을 열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말을 살 만큼 형편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옥계로 가는 관도가 제법 잘 닦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 초출인 두 사람이 길을 찾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곽문정이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참 신기한 곳이네요· 운남에 들어올 때는 그렇게 습하고 더웠는데 막상 곤명에 도착하니 이곳은 또 선선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고원에 있다 보니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은 것 같구나·”
진무원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자연의 조화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태평객잔의 주인은 곤명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소수 부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진무원은 주인의 말에 동의했다· 이곳은 모든 것이 풍족했다· 그가 살던 북방은 너무나 척박한 데 반해 이곳은 모든 것이 넘쳐났다·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 덕에 이모작이 가능했고 숲 속 곳곳에도 이름 모를 과일이 넘쳐났다· 조금만 움직이면 언제라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대지는 신의 축복을 받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모든 것이 풍족한 만큼 원주민들은 크게 욕심이 없어 보였다· 욕심을 부린 자들 대부분은 중원에서 이주해 온 자들이거나 무공을 익힌 무인뿐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원주민들의 힘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오히려 고달픈 삶을 사는 것이 운남의 현실이었다·
거친 북방의 삶과 풍족한 운남의 삶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진무원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의 삶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그때 곽문정이 그의 상념을 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이것저것····”
“형도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네요·”
“너도 그러냐?”
“네 그냥 잡생각이 많이 떠올라요· 솔직히 불안하기도 하고····”
호기롭게 진무원을 따라나섰지만 아직 그는 열세 살 소년에 불과했다· 자신이 가는 길 앞에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은 그런 곽문정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 역시 그랬으니까· 불안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상에 나오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큰일이 터지고 있었고 연신 막강한 무인들과 조우했다·
인연과 악연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이제는 그 역시 더 이상 예전처럼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강호의 인연은 절대 희석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불안하구나·”
“정말요? 형이요?”
“나도 인간이다· 어찌 불안한 마음이 없겠느냐?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지 않느냐? 더 이상 나에게는 물러설 땅이 없다· 그러니 전진할 수밖에·”
“형?”
“물러설 곳이 있다고 안주하는 자는 조그만 위험 앞에서 주저하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진무원의 말에 곽문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없이 강하게만 보이는 진무원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살기에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형처럼 그렇게 살아갈 거야· 하루하루를 절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진무원이 더 좋아졌다·
처음엔 황철의 조카라고 생각해서 좋아했는데 그를 알면 알수록 인간적인 매력에 더욱 빠지게 됐다· 진무원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헤헤!”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헤! 우리 빨리 가요·”
“그래·”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곽문정과 보폭을 맞췄다·
옥계로 가는 여정은 순탄했다· 관도가 잘 닦여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고 날씨도 덥지 않아 걷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옥계와의 거리가 있다 보니 중간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 두 사람은 관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바닥이 고른데다 근처에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어 식수를 구하기도 용이한 것이 이유였다·
진무원이 나무를 구해오고 곽문정은 식수를 떠왔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노숙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 순식간에 노숙할 준비를 끝냈다·
준비해 온 건량을 불려 간단히 식사를 때웠다· 진무원보다 한발 앞서 식사를 끝낸 곽문정은 적아를 들고 수련하기 시작했다·
휙휙!
이젠 근력이 제법 붙었는지 적아를 휘두르는 모습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곽문정은 조금씩이지만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곽문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형?”
“덤벼라·”
잠시 의미를 몰라 눈만 끔뻑이던 곽문정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진무원은 이제까지 간간이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곽문정은 감히 그에게 가르침을 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격차가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다·
곽문정이 적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전신의 피가 빠르게 휘돌았다·
그 순간 진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해지거라· 벌써부터 흥분해서 어쩌려는 것이냐?”
“옛!”
“덤벼라·”
“넵!”
힘찬 대답과 함께 곽문정이 진무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악!
적아가 매서운 기세로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진무원은 한 걸음 옮겨 슬쩍 피하며 나뭇가지로 곽문정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검을 휘두를 때는 팔꿈치를 좀 더 펴야 해· 그래야 검격에 힘이 실린다·”
“큭! 옛!”
진무원의 말처럼 팔꿈치를 좀 더 피며 곽문정이 달려들었다· 이번엔 진무원의 나뭇가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퍼억!
“너무 경직됐어· 그래서는 몸의 반응이 너무 늦어져·”
“예!”
“눈은 언제나 수평을 이뤄야 하고·”
“옛!”
“발바닥은 대지를 잡고 있어야 한다·”
“큭!”
“호흡은 항상 아랫배에서 끌어올려야 한다·”
“크윽!”
진무원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곽문정은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가르침과 함께 약점이 되는 부분을 타격했기 때문이다·
가볍게 때리는 것 같아도 그 충격은 곽문정의 내장을 울렸다· 지독한 고통에 움직이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곽문정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바닥에 나뒹굴어도 온몸에 멍이 하나씩 늘어도 그는 진무원에게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진무원은 그런 곽문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초식은 그다음이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에게는 초식이 필요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곧 절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초식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초식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야 비로소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경지에 이르고 이때야 비로소 초식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퍽!
“큭!”
곽문정이 또다시 뒤로 나가떨어졌다·
의복은 찢어지고 헝클어졌으며 머리는 산발이 되어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때서야 진무원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버렸다·
“더 더할 수 있어요·”
곽문정이 푸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유지한 채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쉬어야 할 때다· 서둘러 삼원심법을 운용하거라·”
결국 곽문정은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적아를 놓고 삼원심법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진무원은 모닥불을 쐬며 그런 곽문정의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쯤 내장이 진탕되어 숨조차 쉬기 힘들 것이다· 진무원이 일부러 그렇게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근육은 찢어지고 관절은 연이은 충격으로 걸레처럼 해져 있다· 보통 사람은 고통을 견디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삼원심법을 익힌 곽문정은 달랐다· 오히려 지금 이 상태가 삼원심법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때였다·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삼원심법과 곽문정의 육체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진무원은 이렇게 속성으로 성취를 높이는 방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곽문정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어떤 수라장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곽문정을 챙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 곽문정이 자신의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진무원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운공이 절정에 달했는지 곽문정의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나오며 붉게 달아올랐다· 삼원심법이 곽문정이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진무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그러자 모닥불이 더 거세게 피어올랐다·
곽문정의 운공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전신에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고생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은요· 형이 더 고생하셨죠· 감사해요·”
곽문정이 진무원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미소를 짓던 진무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곽문정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관도 쪽을 보거라·”
곽문정이 진무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칠흑 같은 어둠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진무원이 괜히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안력을 집중했다·
두두두!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말발굽 소리가 조그맣게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진무원의 가공할 안력에 곽문정은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마차 한 대와 그를 호위하는 듯한 십여 명의 무인이었다· 그들이 진무원과 곽문정이 있는 공터로 곧장 다가왔다·
곽문정이 긴장하며 적아를 집어 들었다· 지금으로써는 저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공터에 도착했다·
마차를 호위해 온 무인들은 하나같이 형형한 안광과 범상치 않은 기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슴에 패(覇)라는 글자가 적힌 무복을 입고 있었다·
진무원의 눈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패권회의 무인들·’
한때 숙부라 부르던 조천우가 운남에 세운 문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듯한 장년의 무인이 말에서 내려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 떡 벌어진 어깨와 어지간한 여자 몸통만큼 굵은 허벅지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몸에서는 상대를 압도하는 기백이 절로 발산되고 있었다·
그가 진무원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역시 선객이 있었구려· 우리도 마침 이곳에서 노숙을 하려 했는데 자리를 조금만 양보해 주시지 않겠소? 이곳은 우리가 노숙할 때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오·”
“그러십시오·”
“고맙소·”
진무원의 허락에 장년의 무인이 부하들을 돌아봤다·
“이곳에서 노숙한다· 모두 짐을 풀어라·”
“예!”
부하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말에서 내려 노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동공이 흔들렸다·
‘못 알아보는 건가?’
고개 숙인 진무원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어머 진 소협·”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