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3장 진흙탕에 사는 용도 있다 (4)
남자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게 뭐야? 한나절이나 걸려서 힘들게 펼친 건데·”
선이 유달리 고운 남자였다· 널찍한 이마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콧날과 얇은 입술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여자라고 오해할 정도로 남자의 선은 고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남자가 진무원을 노려봤다·
“어이 거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남이 힘들게 펼쳐놓은 진법을 왜 부수고 지랄이야?”
“····”
“내가 아침부터 이걸 펼치느라고 얼마나 뺑이쳤는지 알아? 제길! 이걸 언제 다시 펼치누·”
“삼뇌서생 하진월 맞습니까?”
“어라? 나를 알아?”
“공동파의 무진 도장께서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무진이?”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이름은 하진월· 진무원이 찾는 바로 그 남자였다·
“너 그 새끼하고 어떤 관계야?”
“예?”
“그 꼬장꼬장한 새끼가 별 볼 일 없는 놈을 나한테 보내진 않았을 테고 그래도 자기 기준선을 넘었으니 보냈을 텐데 너도 공동파의 도사 나부랭이냐?”
“아닙니다·”
“그럼?”
“그냥 주먹다짐한 사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갑자기 하진월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흥미진진한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럼 이겼다는 건데?”
하진월이 진무원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주위를 맴돌았다·
“흐흠! 겉으로 봐서는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은데 무진을 이겼다는 말이지· 무진이 성격이 지랄 같긴 하지만 무공 하나만큼은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데· 네놈 최소 절정은 넘어섰겠구나·”
하진월이 자신의 턱을 만지며 계속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무원은 잠자코 그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무진을 이길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는데도 표가 나지 않는다? 하하! 이거 제법 음흉한 놈일세·”
“오래 살고 싶으니까요·”
“그래! 대놓고 나 강하다고 선전하는 놈치고 오래 사는 놈은 드물지·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들은 대부분 너처럼 음흉하게 마련이지·”
대놓고 음흉하다는 말에도 진무원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하진월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모양이다·
“너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일단 하던 일은 끝내고 다시 이야기하자·”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월이 뒤돌아섰다·
하진월이 향한 곳은 진무원이 베어버린 커다란 바위였다· 검을 닮은 바위 그래서 하진월이 검봉(劍峰)이라 부르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너 어떻게 이놈이 진의 핵심이란 것을 알았느냐?”
“그냥 감으로····”
“감?”
진무원의 대답에 하진월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무원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무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장 강한 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고 그곳이 검봉이었다·
“흥! 어지간히도 감이 좋은 놈이군· 네놈 운이 좋았다· 그때는 진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거든· 진이 완성되었다면 오히려 공격한 네놈이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진무원은 그의 호언장담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이렇게 맥없이 진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진을 펼친 겁니까?”
“아직은 개념만 잡아가고 있는 단계라 이름 따위는 없다· 완성도 안 된 진법에 이름은 개뿔·”
하진월이 투덜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진무원은 그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그는 진의 매개체로 짐작되는 바위들을 오가며 손을 놀리고 있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현기가 어려 있었다· 그에 진무원의 눈빛 또한 덩달아 침중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하진월이 바위를 어루만질 때마다 석림 안의 기운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가 진에 갇혀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진월의 말대로 진법이 완성되었다면 그렇게 쉽게 진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쿠우우!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의 떨림이 강해졌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에 진무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하진월과 진법을 지켜보았다·
하진월과 같은 천재가 심혈을 기울여 고안해 낸 진법이라면 그 위력도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기의 떨림은 더욱더 강해져만 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 내가 있음으로 천지의 조화가 일어나고 내가 없음으로 세상도 존재의 이유를 잃음이다· 결국 내가 존재해야만 세상도 존재하는 법·”
하진월이 나직한 읊조림과 함께 마지막 바위에서 손을 땠다· 그러자 석림 전체가 어두워졌다· 진이 본격적으로 발동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진이기에····’
진무원도 진의 원리를 대충 알고 있고 간단한 환영진 정도는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진을 펼치는 것은 환영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이야기였다·
진의 원리를 꿰뚫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천문지리에도 능통해야 한다·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학문을 집대성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기의 진동이 더욱 강해지면서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갑자기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쿠우우!
그 모습에 하진월은 오히려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 잘되고 있군· 이제 여기선 갑문만 손을 보면····”
그는 발동되고 있는 진 앞에 서서 두 손을 치켜 올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순간 진무원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하진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뭐야?”
놀란 하진월이 경호성을 내질렀지만 진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안고 대지를 박찼다·
번쩍!
그 순간 하진월이 서 있던 곳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놀란 하진월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가 만든 진이 심상치 않은 요동을 일으켰다·
“젠장!”
진무원은 하진월을 안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하진월이 펼친 진이 붕괴되며 사방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쿠콰쾅!
진무원의 품에서 하진월이 그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벽력탄이 터지기라도 한 듯 굉음과 함께 석림이 무너지고 있었다·
“분명 모든 계산이 맞았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내 계산이 틀릴 리 없는데····”
하진월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계산은 완벽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쏟아 부었고 변수까지 계산해서 대비했다· 그런데 결과는 또다시 실패였다·
진무원은 진의 붕괴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에 도착해 하진월을 내려놨다· 그래도 하진월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진이 붕괴되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마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하진월의 모습에 진무원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스스로 일어나길 지켜볼 뿐이었다·
☆ ☆ ☆
“빌어먹을! 또 실패라니· 어디가 잘못된 거지?”
“····”
“점소이 여기 오리 구이 한 마리 더·”
하진월은 게걸스럽게 오리고기를 뜯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그가 해치운 음식의 잔해가 널려 있고 진무원은 그 모습을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찾은 곳은 근처의 객잔이었다· 그는 마치 먹는 것으로 화를 풀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시켰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그는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진법을 펼치던 과정을 복기하고 있었다·
‘천재라는 족속은 다 이런 건가?’
주위에 누가 있든 간에 일단 자신이 화두를 잡은 생각에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지 못한다· 하진월은 벌써 진무원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진무원은 혼자 상념의 세계에 빠진 하진월을 내버려 두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한 남자는 미친 듯이 음식을 먹으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다른 남자는 그 옆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어울려 보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하진월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래 감위(坎位)가 문제였어· 건위(乾位)에서 기운을 휘돌려서 나올 때 완충 지대가 필요했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어·”
그가 환해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진무원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라니? 문제점을 알아냈으니 다시 가서 진을 펼쳐봐야지·”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마 진을 펼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응?”
그제야 하진월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진무원의 말처럼 사위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젠장! 겨우 해결책을 알아냈는데····”
하진월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진무원의 앞에 놓인 술병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가 진무원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따라봐라·”
진무원은 말없이 그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하진월은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 다시 진무원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후에야 하진월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으! 이제야 살 것 같네·”
“문제는 다 풀렸습니까?”
“확인해 보기 전에는 모르지· 그래도 실마리는 찾은 것 같으니까 시험해 보려는 거지·”
“하늘이라도 가두려는 겁니까? 무슨 진법이 그렇게 요란 법석합니까?”
“하늘? 흐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군· 흐흐흐!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하진월이 다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진무원은 하진월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진무원이 말없이 술잔을 들이켜자 이번에는 하진월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진이 소개시켜 줬다는 것 외에는 진무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진무원입니다·”
“아 이름 말고 정체가 뭐냐고·”
“그런 거 없습니다·”
“흐음!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좋아 그건 넘어가지· 그럼 무슨 일 때문에 날 찾은 거야?”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 그런 거라면 차라리 하오문을 찾아가는 게 나을 거다·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섯 달 전 이곳 곤명에서 실종되었습니다·”
진무원의 말에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하진월의 동작이 딱 멈췄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진무원을 바라봤다·
“여섯 달 전이면 백룡상단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불과 며칠 만에 실종됐지· 백룡상단과 연관 있나?”
“맞습니다·”
“흐음!”
“아시는 거 있습니까?”
“찾는 사람이 혈육이냐? 동생이나 누나 뭐 이런 것·”
“아닙니다·”
“그럼 포기해·”
“그럴 수 없습니다·”
“네놈 목숨이 위험해도?”
하진월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제가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충분한 사람입니다·”
진무원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