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3장 진흙탕에 사는 용도 있다 (3)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에 제법 힘을 쓸 것 같은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십여 명이나 노려본다면 오금이 저릴 만도 했지만 그들에겐 불행히도 진무원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진무원이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거친 박도가 들려 있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문제?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배불뚝이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왼쪽 뺨에는 긴 자상이 나 있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그가 진무원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적의 어린 그의 시선에 진무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 분명히 오늘 당신들을 처음 봅니다만·”
“하진월 그 사기꾼 새끼를 찾아왔잖아·”
“그게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지· 이 새끼 꿇려!”
마지막 말은 부하들에게 한 것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들이 진무원을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쉬아악!
박도가 공기를 가르는 품새가 제법 칼을 많이 휘둘러 본 듯했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했다면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진무원이 박도를 향해 두 손가락을 쭉 뻗었다·
“미친놈!”
그 모습을 본 박도의 주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비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캉!
진무원의 두 손가락에 맞닿은 박도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했기 때문이다·
쇄병지(碎兵指)였다·
진무원이 두 손가락을 뻗을 때마다 남자들의 박도가 펑펑 터져 나갔다· 도편이 사방으로 튀고 남자들의 당혹한 신음성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으으!”
배불뚝이 사내가 앓는 듯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엔 불신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냥 손가락만 닿았을 뿐인데 박도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
진무원의 두 손가락이 배불뚝이 사내를 향했다· 그의 손가락이 이마에 닿을 듯 다가오자 배불뚝이 사내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들고 있던 박도가 터져 나간 남자들은 얼음이 된 것처럼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씨팔! 잘못 걸렸다·’
‘고수다· 그것도 무지····’
곤명에도 무림인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빈민가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십 년 동안은 말이다· 그 때문에 남자들은 진무원이 무공을 익힌 무인이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진무원에게 당하고 나서야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망할! 고수가 왜 이런 곳에····’
맨손으로 검을 박살 낸 자다·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 무기가 터져 나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진무원이 자신들이 감히 예단할 수 없는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진무원이 배불뚝이 사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아직도 문제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배불뚝이 사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럼 이제 대화가 되겠군요·”
“그럼요! 저는 언제라도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헤헤!”
“잘됐군요·”
진무원의 미소가 배불뚝이 사내에게는 사신의 웃음으로 보였다· 웃고 있지만 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는다면?
부르르!
단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삼뇌서생 하진월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 개자식이····”
배불뚝이 사내가 무의식중에 욕을 하려다 진무원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진무원과 하진월의 관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불뚝이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마등으로 이곳 도박장의 주인이자 빈민가의 지배자였다· 그의 주 수입원은 바로 도박장이었다· 빈민가의 도박장에 누가 찾아올까 싶지만 실제로는 아주 많았다·
특히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고관대작이나 부호들이 그들의 주 고객이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포교나 관군들이 이곳 빈민가에는 잘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마등은 그들에게 자리를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거나 고리의 이자를 붙여 도박 자금을 빌려주는 것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이곳에서 쌓은 부를 발판으로 곤명 중심가로 세력을 넓히겠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얼마 전 하진월이 찾아오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비루한 행색으로 찾아온 하진월을 처음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도박을 시작한 자금은 은자 한 냥이었다· 처음에는 그마저도 잃고 도박장에서 고리의 자금의 빌려 쓰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변했다·
원래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것인지 또는 실력이 갑자기 늘어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진월이 돈을 따가는 횟수가 급증한 것이다· 마등이 자랑하는 최고의 도박사들도 하진월에게 돈을 잃기 일쑤였고 같은 자리에 앉은 다른 부호들 역시 많은 돈을 잃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등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는 부하들을 동원해 하진월의 돈을 모조리 빼앗고 팔 하나를 자르려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놈이 히죽히죽 웃으며 허공에다 손가락질을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웬 헛짓거리를 하나 싶어서 지켜만 봤습지요· 그런데····”
마등은 다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등에겐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진무원에겐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그래서요?”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천상의 여인들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하늘하늘한 능라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유혹하더란다· 그녀들의 교태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등과 부하들은 순식간에 넋을 잃고 말았다·
비단 같은 하얀 피부 하며 그윽한 검은 눈동자 그리고 은방울 같은 목소리에 그들은 처한 상황도 잊고 그녀들에게 빠져들었다·
“정말 꿈같았습니다· 제 생에 그런 여자들을 만나는 것을 감히 꿈이나 꿨겠습니까? 그 순간만큼은 제 꿈이 이뤄진 것 같았지요·”
마등과 부하들은 선녀 같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꿈결 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들의 진정한 악몽이 시작됐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껴안고 있는 커다란 바위였다· 대로 한가운데서 벌거벗은 채 바위를 상대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본 것이다·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공포로 지배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우습게 보인 상황이 된 것이다· 한번 얕보이면 언제고 뒤통수를 맡는 것이 이곳의 생리였다·
‘환영진을 펼친 것인가?’
진무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등의 추태를 목격한 자들에 따르면 하진월은 그 광경을 한참이나 구경하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고 했다·
‘역시 인간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더 지배를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이 녀석들의 본능이 이렇게 구린 것인가? 이건 짐승과 다름없잖아?’
마등의 이야기를 들은 진무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절로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기는요 저희가 혼이 빠진 사이 놈은 도박장의 돈을 모두 털어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게 어떻게 모은 돈인데· 크흑!”
마등이 눈물을 훔쳤다· 마등은 하진월을 잡기 위해 수하들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하진월은 잡힐 듯하면서도 유유히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지금은 마등도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혹시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압니까?”
“요즘에는 광명로 끝 쪽의 우시장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음!”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가시려구요?”
“그럼 더 있다 갈까요?”
“아닙니다· 어서 가십시오· 두 번 다시 오지 마십시오·”
진무원이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마등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야! 소금 가져와! 왕소금으로 팍팍 뿌려라!”
하진월의 행적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했다· 그는 우시장에서 십여 마리의 건장한 소를 사갔다고 했다· 소를 몰고 간 곳은 인근의 한 마을이었는데 그곳에서 소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이틀을 지켜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벌였다는데 소싸움이 모두 끝난 후에는 소들을 미련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떠났다고 했다·
그 후에 그가 향한 곳은 인근 야산에 있는 한 암자였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수도해 온 승려와 함께 논쟁을 벌였는데 그 살벌함이 무인들의 비무 못지않았다고 한다·
그와의 논쟁에서 패한 승려는 눈물을 흘리며 환속했다고 한다· 진무원은 승려에게 내용을 물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함구했다·
그의 행적만 보면 점소이의 말처럼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일관성도 없고 어떤 특별한 목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즉흥적인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건만 진무원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의 행적을 쫓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이 미치광이 사내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진무원은 묻고 물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진무원이 도착한 곳은 석림이었다·
석림(石林)·
말 그대로 돌이 숲을 이루는 곳이었다· 온갖 기괴한 암석이 마치 울창한 수림처럼 늘어서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오는 곤명의 명물이었다·
진무원은 석림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검을 닮은 바위도 있고 부처를 닮은 바위도 있었다· 수많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며 수림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자연의 조화가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 실감나게 했다·
진무원은 석림을 천천히 감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진월의 마지막 행적은 이곳 석림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 꼬박 하루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진무원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진이 소개해 준 하진월이란 인물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던 진무원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검을 닮은 바위· 분명 방금 전에 지나왔는데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설마?”
진무원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검을 닮은 바위를 지나쳐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까와 반대 방향이다· 그런데도 한 식경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온 곳은 검을 닮은 바위 앞이었다·
진무원의 표정이 굳었다·
“진법에 빠진 것인가?”
전방위 감각을 익혀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진무원이다· 그런 그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진법에 빠지고 말았다·
“단순한 환영진이 아니군·”
시야를 현혹하는 환영진에 감각을 왜곡하는 미혼진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다행히 살상을 염두에 두고 펼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계속 이렇게 제자리를 맴돌다 보면 어느 순간 탈진하게 마련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진무원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석림 사이로 창공이 보였다·
팟!
진무원이 대지를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 순간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세상이 돌변한 것이다· 방향을 잃은 진무원은 결국 바닥으로 착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원래의 풍경을 회복했다·
진무원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공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한단 말이지?”
진무원은 하진월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하진월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역작을 지켜보며 박수를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썩 내키지 않는군·”
지혜로운 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상대보다 더한 지혜를 갖추든가 지혜와 상관없는 무력을 사용하든가·
진무원이 택한 것은 후자였다·
자신이 모자란 것을 알면서 상대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진무원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것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이쪽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나서야 했다·
설화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웅!
검명이 석림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설화가 환영을 갈랐다· 밤하늘에 유성이 떨어지듯 석림 안에 한줄기 빛이 번쩍였다·
푸화학!
그를 가로막고 있던 거짓된 세상이 갈라져 나갔다· 그리고 장막 뒤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