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2장 북에서 온 검호(劍豪) (3)
“휴!”
용무성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돌아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보표가 서른 명 가까이 죽었다· 그 때문에 백룡상단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죽음을 지척에 두고 살아가는 부나방 같은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의 죽음은 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철기당의 무인들도 어두운 표정으로 백룡상단의 무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귀병단의 무위는 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무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엄청난 결속력과 유대관계였다· 그 짧은 시간 그들은 동료들의 시신까지 챙겨 퇴각했다·
보통의 무인이나 단체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엔 그들의 정체를 유추해 볼 만한 시신 한 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용무성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지랄 같구만 지랄 같아·”
말은 안 했지만 모두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설마 운남성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타격이었고 엄청난 손실이 생기고 말았다·
종리무환이 용무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자책의 빛이 가득했다·
“휴! 아무래도 이번에는 소제가 잘못 생각한 듯합니다·”
“어디 네 잘못뿐이겠느냐? 동조한 내 잘못도 크다· 아주 체면에 똥칠을 했어·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다·”
“죄송합니다·”
종리무환의 시선이 마차에 앉아 있는 당미려 숙질을 향했다·
적들이 퇴각한 사이 당미려는 당기문에게 응급조치를 했고 그 결과 당기문이 정신을 차렸다· 당미려는 당기문에게 방금 전 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 때문인지 철기당과 백룡상단을 바라보는 당기문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당미려와 당기문이 죽었다면 별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곳에서 있던 모든 일을 묻어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하나 그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이상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가자·”
“예? 어딜····”
“더 늦기 전에 수습해야 할 거 아냐·”
용무성이 향한 곳은 당기문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리무환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용무성의 말처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마차 앞에 도착한 용무성과 종리무환이 당기문에게 포권을 취했다·
“말학 후배 용무성이 당가의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철기당의 종리무환이 당기문 장로님께 인사드립니다·”
당기문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잠시의 시간이 두 사람에겐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당기문이 입을 열었다·
“반갑네· 당가의 만독각주 당기문이라고 하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질녀에게 들었다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네·”
당기문의 차가운 목소리에 두 사람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형편없이 구겨졌다·
당가의 일반 장로라고 해도 수습하기 버거울 판이다· 한데 상대의 신분이 만독각주란다· 만독각주면 당가에서도 핵심의 요직이다· 일반 장로와는 차원이 다른 신분이었다·
종리무환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가 만독각주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도왔을 텐데·’
그러나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가 악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수습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능력이 없어서 별반 도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할 게 무에 있겠나? 강호의 인심이란 것이 그렇게 덧없는 것임을·”
당기문의 차가운 시선에 종리무환은 속이 다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마치 그의 속내를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용무성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당 장로님· 당가의 귀한 분인 줄 알았으면 목숨이라도 걸었을 텐데· 솔직히 그때는 저희가 끼어들 일인지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자네들은 사람의 신분을 가지고 목숨의 경중을 따지는 모양이군·”
“그게 강호 아니겠습니까?”
당기문이 용무성을 빤히 바라봤다·
용무성은 그런 당기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게 강호라····”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 이 당기문이 많은 것을 배우는군· 고맙네· 이 가르침 결코 잊지 않겠네·”
“아이쿠! 가르침이라니요·”
“그 대가로 오늘의 일을 마음에서 털어내지·”
“감사합니다요·”
“그렇다고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말게· 자네 말대로 그런 게 강호 아니겠는가?”
“흐흐! 괘씸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집니다·”
용무성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기문은 용무성의 배포가 꽤나 크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그 어떤 무인일지라도 자신의 진실된 신분을 알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데 용무성의 모습에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놈도 보통이 아니구나· 철기당주 용무성· 앞으로 주의해서 살펴봐야겠구나·’
당기문이 몸을 일으키려다 극통에 휘청거리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극심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오장육부가 모조리 위치를 벗어난 것 같았다· 당미려의 응급조치 덕에 최악의 상황은 막았지만 서둘러 치료를 해야 했다·
당기문이 당미려에게 당부했다·
“지금부터 내 주위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거라·”
“예 숙부님·”
당기문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억지로 마차에서 내려 공터로 갔다· 용무성과 종리무환 등이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당기문은 공터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품에서 조그만 자기병 두 개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당미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숙부님?”
“괜찮다· 이 정도는 사용해야만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당기문은 우선 오른쪽 자기병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단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다 어질해졌다·
용무성이 호흡을 멈추며 생각했다·
‘독인가?’
당기문이 가지고 다니는 독이라면 보통의 극독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기문은 거침없이 독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복용한 것은 백와산독(白蛙酸毒)이라는 극독이었다·
청해의 오지에 혈백와(血白蛙)라는 개구리가 살고 있다· 보통의 개구리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동면하는 데 반해 이 녀석은 오히려 추워질수록 원기가 왕성해졌다·
그 이유는 체내에 품고 있는 독 때문이었는데 한 방울의 독으로도 황소 십여 마리를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지독했다· 백와산독은 바로 혈백와에게서 추출한 극독으로 이것을 얻기 위해 당기문은 무려 두 달이나 청해의 오지를 뒤지고 다녀야 했다·
백와산독은 일단 체내에 들어가면 잠력을 폭발시키며 전신의 신경을 공격하는데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당기문은 그런 백와산독을 한 병이나 털어 넣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복용 즉시 즉사했겠지만 그는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독인이었다· 고통스럽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당기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왼손에 들고 있는 자기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자기병에 담긴 독은 학정홍(鶴頂紅)이었다· 수백 년 묵은 학의 정수리에서 추출한 독으로 구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백와산독과 마찬가지로 한 방울만으로도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극독 중의 극독이었다· 당기문은 그런 학정홍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마 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봤다면 미쳤다고 소리쳤을 것이다· 한 가지 독만으로도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는데 두 가지 독을 한꺼번에 복용하다니·
“크윽!”
학정홍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당기문은 지독한 고통에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제아무리 독에 면역이 있는 독인일지라도 두 가지 독의 공격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의 몸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의 공격이 이어졌다· 백와산독과 학정홍이 협공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당기문의 표정이 점차 원래의 모습을 회복해 갔다·
츠츠츠!
그의 모공에서 지독한 독기가 흘러나왔다·
용무성이 급히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그렇지 않아도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던 이들이 더욱 멀리 물러났다· 용무성도 멀찍이 물러나서 당기문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봤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아니 이독상생(以毒相生)인가?”
독으로서 독을 제압하는 것을 이독제독이라 부른다· 하지만 지금 당기문이 행하는 것은 각기 다른 독을 이용하는 상생의 독술이었다·
백와산독이 잠력을 격발시키며 신경을 공격한다면 학정홍은 신경을 보호하면서 내장을 공격한다· 그런 두 가지 독의 각기 다른 성질이 어우러져 절묘한 치료 효과를 내고 있었다·
두 가지 독기는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면서 당기문의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리를 이탈했던 장기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오고 손상당했던 근육이 원상태를 회복했다·
당기문 자신이 극한까지 독을 탐구한 자이기에 가능한 치료법이었다· 조금만 배합이나 비율이 어긋나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만독각주라더니 정말 명불허전이구나·’
용무성이 쓴 침만 삼켰다·
당기문과 친분만 쌓아두었더라도 무궁무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지를 넘어 살릴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독인이 당기문이었으니까·
당기문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로 인해 그의 주위 방원 오 장이 완벽하게 죽음의 대지로 변했다· 방금 전까지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던 수풀이 회색빛으로 물들며 죽어갔다· 반대로 당기문의 얼굴에는 점차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당기문이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켜 당미려를 향해 다가왔다·
“숙부님 괜찮으세요?”
“너에게 짐만 되었구나· 덕분에 무사히 회복했단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제야 당미려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무원이었다·
당미려가 대번에 반색했다·
“은공·”
당기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빈사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은 당기문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그 청년이군· 고맙네· 난 당기문이라고 하네·”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응당 그리했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난 당가의 사람이네· 원한도 절대 잊지 않지만 은혜도 절대 잊지 않지· 이 은혜 반드시 갚겠네· 나 당기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당기문은 단호했다·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돌려준다는 것이 당가의 신조였다· 그리고 당기문은 누구보다 당가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는 천금보다 더한 가치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용무성과 종리무환이 쓰린 표정으로 진무원과 당기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무원과 당기문이 조우한 자리에 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