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4장 없는 집안에 손님만 는다 (2)
지난 며칠간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기어이 하늘이 가득 모았던 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씩 흩날리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졌다· 그렇게 사흘을 내린 눈은 천지를 하얗게 만들었고 때맞춰 찾아온 추위는 세상을 꽁꽁 얼렸다·
북천문에도 겨울은 찾아왔다·
장패산을 비롯한 삼조원들은 외부 활동을 멈추고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무원의 일과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옷깃을 파고드는 맹렬한 바람에도 그는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산책을 하였고 만영탑 정상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다가 아침 해가 뜨면 잠시 잠을 잔 후 황철이 보내준 서책을 읽었다·
진무원은 단순하지만 꽉 짜인 일과에 따라 하루를 보냈다· 소무상은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진실한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이런 곳에서 저런 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음이 보통 굳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하루가 지나가도록 다른 사람 한 명 보기 쉽지 않았다· 아찔한 고립감과 상실감이 마음을 좀먹기에 심약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타락하거나 망가져 간다·
실제로 삼조원 중에서도 그런 자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고 있었다· 만일 장패산의 강력한 장악력이 없었다면 진즉 사단이 나도 났을 것이다·
그나마 그들에겐 앞으로 일 년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진무원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과 영원 같은 유배만이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인지 소무상은 궁금하기만 했다·
만일 만영결이 없었다면 그래서 하루 종일 화두를 잡고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면 진무원은 소무상의 생각처럼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진무원의 하루는 만영결로 시작해 만영결로 끝이 났다· 새벽 동이 떠오를 때면 만영탑에 올라 만영결에 따라 운공을 하며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만영결이라는 화두를 잡고 놓지 않는다·
숨 쉬는 것 움직이는 것 밥 먹는 것조차도 만영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진무원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영결의 진전이 딱 막혔기 때문이다·
격세천변(愅世千變) 아건심족(我健心足)·
‘세상이 바뀌고 또 천 번을 변하더라도 나는 굳은 마음 하나면 족할지니·’
만영결 중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만영결 자체가 모호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특히 이 부분은 진무원에게 심마를 안겨주고 있었다·
굳은 마음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을 건너뛰고 다른 부분을 운용해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것처럼 허전했기에 진무원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만경각에 있는 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거니는 것처럼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아건심족 굳은 마음 하나면 족하다? 휴우 알 수가 없구나· 도저히 알 수가 없어·”
한참을 고심하던 진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고로 향했다· 혹시나 서책에서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사박사박!
발끝에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졌다· 발끝을 통해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이 진무원의 정신을 일깨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잠시 멈춘 눈이 다시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진무원은 올해가 유난히도 긴 겨울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런 때일수록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했다·
만경각 한쪽에는 아직 보지 못한 서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 황철이 생필품과 함께 들여온 것들이다· 표물을 운송하는 틈틈이 진무원을 위해 고서점에서 고서를 구하는 것이 황철의 기쁨 중 하나였다·
“음?”
문득 진무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만경각의 창문이 부서지고 바람에 날린 눈이 서고 바닥에 쌓여 있었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잠시 바닥을 살피던 진무원이 만경각 구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에 찍힌 조그만 발자국이 그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윽!
구석의 서가를 돌자 갑자기 목에 섬뜩하면서도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허!”
진무원이 혀를 찼다·
등 뒤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누군가 그의 목에 조그만 비수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어찌나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새하얀 빛을 뿌리는 비수의 옆면에 인영의 모습이 은은하게 비쳤다·
‘여자?’
이제 겨우 열너덧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유난히도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에 흑옥처럼 선명한 검은 눈동자와 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은은한 푸른 기가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여전히 진무원의 목에 비수를 댄 채 등 뒤에서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냐?”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소녀가 비수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질문은 내가 했어·”
“큭! 이곳의 주인이다·”
“주인? 그럼 북천문의 후인이란 말인가?”
“그래 비록 망했지만 그래도 주인인 것은 확실하지· 이젠 네 차례군·”
비수가 조금만 더 파고들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지만 진무원의 목소리에는 추호의 떨림이나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쩔그렁!
순간 소녀의 말이 끊기며 진무원의 목에 대었던 비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무원이 뒤돌아보니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소녀의 왼쪽 어깨는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어찌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바닥이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진무원이 급히 소녀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심장 소리가 미약한 것이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사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소녀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진무원은 소녀를 안고 자신의 거처로 데려왔다· 자신의 침상에 소녀를 눕힌 후 그녀의 장삼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그러자 피로 물든 겉옷이 나타났다· 진무원은 겉옷의 어깨 부분만 살며시 내렸다·
“음!”
소녀의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진무원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어깨에는 동전 크기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상처 주위가 온통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극독을 바른 암기에 당한 건가?”
상처의 크기로 짐작해 보건대 화살이나 조그만 비수 같은 것일 가능성이 컸다·
진무원은 침상 근처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조그만 단환을 하나 꺼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둥뿌리까지 뽑히겠군·”
북천문에서 무공과 더불어 가장 발달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의술이었다· 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밀야와 전쟁을 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그때 만들어진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진무원이 들고 있는 호심제독단(護心除毒丹)이었다· 호심제독단은 심맥을 보호하고 독을 해독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북천문의 몰락 당시 제조법이 유실되고 제조되었던 것도 대부분 사라져 진무원이 가지고 있는 한 알이 전부였다·
만일을 대비해 보관해 두었던 것이지만 진무원은 호심제독단을 쌓고 있는 금박을 거침없이 벗겼다· 그러자 검은색이 감도는 환단이 모습을 드러내며 은은한 향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은 모조리 가져갔는데 호심제독단은 별로 쓸모가 없다고 느낀 것인지 손대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무원이 인후혈을 누르자 소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진무원이 호심제독단을 집어넣자 순식간에 물처럼 녹더니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진무원은 다시 서랍을 뒤졌다· 이번에 그가 꺼낸 것은 조그만 목함이었다· 목함 안에는 의원들이 사용하는 은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소녀의 상처 주위에 은침을 꽂았다· 그러자 지혈이 되며 출혈이 멈췄다·
“휴!”
진무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한 것이다·
그제야 여유를 얻은 진무원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신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기다란 눈썹과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이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선명했다·
유난히도 하얀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푸른 기 감도는 검은 머리는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도 대단한 미모였지만 몇 년 만 더 지나면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 같았다·
“없는 집안에 자꾸 손님만 느는구나·”
의자에 앉은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