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1장 은원의 탑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기만 하다 (1)
백일창(百日槍)-창을 익히는 데 백 일이면 족하고
천일도(千日刀)-도를 익히는 데 천 일이면 족하고
만일검(萬日劍)-검을 익히는 데 만 일이면 족하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단 하루면 족하다·
강호(江湖)란 그런 방법을 아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당미려가 흔들리는 눈으로 남자가 내민 손을 바라봤다·
남자의 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이 고우면서도 상처 하나 없었다· 여인의 섬섬옥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서는 여인들이 갖지 못하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수많은 시련을 견디고 이겨온 자들만이 갖는 연륜과 단단함이 마디마디에 배어 있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타십시오·”
남자의 목소리에 당미려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당미려와 당기문을 동시에 끌어올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고 고마워요·”
당미려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나왔다·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대답을 하는 남자는 진무원이었다·
그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종리무환과 철기당이 다가왔다·
“무슨 짓입니까?”
종리무환이 진무원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철기당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무원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왜 허락도 없이 그들을 태웁니까? 방금 전 이야기하는 것 듣지 못했습니까?”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태운단 말입니까?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
종리무환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은은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도무지 통제 불가다· 이런 단체 행동에는 모두가 뜻이 맞아야 한다· 설령 약간의 불만이 있더라도 묵묵히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집단을 이루는 힘이고 응집력의 원천이다·
그런데 진무원은 그런 금기를 번번이 어기고 있었다· 그의 일탈 행위는 일행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을 버리십시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전체의 안전이 위험합니다·”
“종리 부당주의 말을 듣게·”
공진성까지 종리무환의 편을 들고 나섰다·
진무원의 시선이 종리무환의 옆에 있는 용무성을 향했다·
“용 당주께서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십니까?”
“뭐 어쩌겠는가?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따라야지·”
용무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종리무환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 또한 종리무환과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거대한 무게 추가 되어 진무원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모두가 진무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에 진무원의 옆에 서 있는 곽문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진무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었다· 종리무환은 그 모습을 보며 압박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정말 이들을 버려두고 가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최소한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겠습니까? 전무(全無)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당신의 행동은 자신뿐 아니라 일행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버리란 말이군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입니다· 괜히 크게 만들지 마십시오·”
종리무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처럼 시퍼렇게 날이 벼려져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당미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가슴엔 피멍이 들고 있었다·
‘강호에 의기 따윈 존재하지 않는구나·’
당가를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막연히 강호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정의와 의기가 존재하는 협객들의 세상·
무인은 곤경에 처한 약자를 돕고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상상한 낭만강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빈틈을 보인 그 순간 목을 물어뜯는 짐승들이 득실거리는 잔혹한 세상 그것이 그녀가 경험한 강호였다·
그녀가 불안한 시선으로 진무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무원도 종리무환의 압박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진무원만이 그녀의 희망이었다· 당미려는 진무원이 그에게 가해지는 이 엄청난 압박을 부디 견뎌내길 기원했다·
마침내 종리무환이 최종 통보를 해왔다·
“우립니까 그녀입니까? 선택하십시오·”
“····”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종리무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종리무환이 발끈하려 했다·
“당신····”
“잠깐!”
그 순간 용무성이 종리무환의 어깨를 잡았다·
“왜?”
“쉿!”
용무성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갑게 굳었다· 그 모습에 종리무환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큭! 아무래도 늦은 것 같구나·”
“무슨?”
“느껴지지 않느냐?”
종리무환이 급히 기감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은은한 살기가 느껴졌다·
“언제?”
마치 살기로 벽을 쌓은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이미 한참 전에 포위망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부터였냐는 것이다·
종리무환이 급히 진무원을 바라봤다· 여전히 진무원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종리무환은 그제야 진무원이 처음부터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설마 그때부터 저들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단 말인가?’
용무성이 혀를 찼다·
“쯧!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구나· 저 녀석 처음부터 포위당한 것을 알고 있었어· 당가의 무인들을 외면했더라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게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야····”
종리무환이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치졸한 변명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은신해 있는 자들의 살기는 비단 당미려와 당기문만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살기는 이 지역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그들의 목표라는 의미였다·
“큭!”
종리무환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진무원이 곽문정에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 거라·”
“예 형!”
곽문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짝짝짝!
“이거 참 워낙 흥미진진해서 더 지켜보려 했는데 아쉽구만· 그래도 좋은 구경 잘했네·”
박수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수염을 가득 기른 거대한 장한이었다· 보기에도 위압적인 거대한 방천화극을 등에 짊어진 채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철기당과 백룡상단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종리무환이 외쳤다·
“웬 놈이냐?”
그러나 남자는 그의 물음에 귀찮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종리무환이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흥미롭다는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내 이름은 남군위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진무원·”
“좋은 이름이군·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
“크큭! 역시 그랬나 보군· 하도 어이가 없어 지켜보기만 했는데 설마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스스로를 남군위라고 밝힌 사내가 키득거리며 웃자 종리무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남군위의 등 뒤에서 붉은 갑주를 입은 무인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무인이 무려 오십 명이 넘었다· 한 명 한 명의 역량이 철기당의 무인들에 그리 뒤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자들이?’
마치 틀로 찍어놓은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똑같은 무공을 익힌 것 같았다· 이 정도 수준의 무인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대 문파에서 막대한 자금과 무공비급 각종 영약을 비롯해 수십 년의 세월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 중원의 그 어떤 문파에도 이처럼 붉은 갑주를 입은 무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혹시 운중천에서 오셨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군· 설마 답해줄 것 같은가?”
“우리가 그냥 가겠다면 보내주겠습니까?”
“그런 병신 같은 소리는 또 처음 듣는군· 그럴 것 같으면 뭐 하러 이 지랄을 하고 있겠는가? 멀쩡하게 생겼는데 머리는 별론 것 같군·”
남군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종리무환이 수작질을 부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밌어서 지켜보았을 뿐 그냥 보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가는 결코 우습게 볼 가문이 아니다· 그들이 운중천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랬다·
종리무환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남군위는 그런 종리무환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진무원만 바라봤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들을 내놓지?”
“그런 병신 같은 소리는 또 처음 듣는군요· 그럴 것 같으면 뭐 하러 이들을 마차에 태웠겠습니까? 생긴 건 멀쩡한 거 같은데 머리는 별론 거 같군요·”
진무원의 대답에 남군위가 한 방 얻어맞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정말 마음에 드는군· 크하하! 이 남군위에게 그런 말투라니· 정말 재밌어·”
우웅!
그의 앙천광소에 철기당과 백룡상단 무인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머릿속이 울리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용무성이 급히 소리쳤다·
“모두 내공을 끌어올려 심맥을 보호하라!”
무인들이 급히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몇몇 이의 입가에는 벌써 혈흔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미 내상을 입은 것이다·
‘가공할 내공·’
종리무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지 웃음소리만으로 내상을 입힌다는 것은 보통의 무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만이 이런 신위를 발휘할 수 있었다·
“순순히 내주지 않겠다면 모조리 죽이고 빼앗을 수밖에·”
남군위의 음성에 이제껏 숨죽이고 있던 붉은 갑주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앙!
그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용무성이 종리무환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는 내가 맡아야 할 것 같구나·”
“하지만 당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알겠··· 습니다·”
종리무환이 입술을 힘껏 깨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용무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남군위를 바라봤다·
“어이 붉은 귀신 이거 본의 아니게 바닥까지 보이고 말았군· 하지만 철기당의 역량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단지 귀찮은 것이 싫어서 그랬을 뿐 네놈들에 비해 실력이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확실히 알게 해주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용무성이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몸에서는 투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에 반응해 철기당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파를 뿌리기 시작했다·
푸화학!
그 순간 붉은 갑주의 무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거대한 붉은 해일이 철기당과 백룡상단의 무인들을 향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