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4장 거센 바람이 분다고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아니다 (2)
진무원과 곽문정은 백룡상단과 떨어져 선착장 근처 공터에 앉아서 강바람을 쐬었다· 백룡상단의 보표들은 일절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철기당의 무인들도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마치 그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오직 함지평 부녀만이 그들에게 다가와 식사를 챙겨주고 갔을 뿐이다·
진무원은 함지평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이 예상보다 더 큰일에 휩쓸렸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다·’
곽문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라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어찌 모를까· 분위기상 그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백룡상단의 보표들이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이라 생각한 이들이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강호란 정말 비정한 곳이군요·”
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세 살 나이에 이미 강호의 생리를 깨달았다· 힘이 없으면 물어뜯기고 마는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세계란 것을·
진무원은 곽문정을 말없이 바라봤다·
곽문정의 심정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북천사주가 그와 부친을 배신했을 때 기분이 그랬으니까·
북천문의 네 기둥이던 북천사주는 진무원에게 가족이었고 아비가 못해준 부분까지 채워주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들과는 영원히 함께 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배신했고 그 결과 북천문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친 혈족마저도 배신하는 세상에 가족도 아닌 사람을 믿은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곽문정도 이제 그 비정한 강호에 발을 디뎠다· 오늘 일로 느끼는 바가 클 것이다·
‘이번 시련을 무사히 넘긴다면 이 또한 너를 성장시킬 양분이 될 것이다·’
진무원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에 곽문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쉿!”
진무원이 검지를 들어 입을 가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곽문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백룡상단의 보표들이 있는 곳에서 소요가 일더니 일단의 무인이 진무원과 곽문정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모두 일곱 명으로 하나같이 옷소매에 청죽 문양이 새겨져 있고 죽문검을 허리에 차고 있다· 공동파의 일대제자들이었다· 그중에는 무해와 무월도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장년인이 진무원과 곽문정을 바라보았다·
‘잘 벼려진 명검이구나·’
장년인을 본 순간 진무원의 뇌리에 든 생각이다·
키는 겨우 오 척이 넘을까 말까 한 단신이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전신에서 풍기는 칼날 같은 분위기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무해와 무월도 감히 장년인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 그로 미뤄보아 장년인이 무해 등보다 훨씬 더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장년인의 눈은 마치 화등잔처럼 빛났다· 그 모습이 사뭇 공포스러웠기에 곽문정은 그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장년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무원인가?”
생김새만큼이나 날카로운 목소리다· 목소리만으로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진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진무원입니다· 당신은?”
“내 이름은 무진이다·”
그의 음성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무해와 같은 항렬이다· 하지만 무해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무진이었다· 바로 그가 공동파의 일대제자들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였다·
모든 일대제자가 그를 대사형이라 부른다· 그가 바로 대공동파의 장문제자 즉 차기 장문인이라는 뜻이다·
무진은 십오 년 전 공동일수를 뽑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대회에 참여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는 이미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일수를 뽑는 그 대회가 벌어지는 시기에도 무진은 폐관 수련을 하고 있었다· 공동파의 최고 검공이라 할 수 있는 오음신검(五陰神劍)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오음신검은 삼백 년 전 공동파의 전설적인 검객이던 운양 진인이 만들어낸 검공이었다· 공동파의 모든 검공을 집대성해 만들어낸 이 검공은 오직 장문인에게만 이어졌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 무진이 오음신검을 얼마나 성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외부에 자신의 성취를 자랑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마는 무진의 성정을 아는 공동파의 일대제자들은 그의 성취가 결코 적잖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무진은 천성적인 무광(武狂)이어서 오직 무공만 익힐 뿐 공동파의 대소사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무공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공동파의 장문제자에서도 물러나려 했을까?
“네가 공동파의 제자들을 핍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인가?”
“그게 핍박이라면 할 말이 없군요·”
“아니란 말인가? 감히 공동파의 신물인 죽문검을 부수고도 변명을 하겠다는 것인가?”
무진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죽문검은 공동파의 일대제자를 나타내는 신물이자 자존심이다· 죽문검이 부러졌다는 것은 공동파의 자존심이 부러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무해는 무진에게 죽문검이 부러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 했다· 대사형 무진에게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이 사실을 어떻게든 자신이 수습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사제만 더 데리고 오려 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진무원을 응징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움직임은 무진에게 들통이 났고 결국 사정을 모두 들은 무진이 이곳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 공동파의 제자들을 핍박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순순히 제압을 당하면 공동파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정말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인가?”
“당신의 사제들이 보인 모습이 그리 믿을 만한 것은 아니라서요·”
진무원의 말에 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무해가 소리쳤다·
“저놈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사형! 음험하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반드시 무슨 수작을 부릴 겁니다! 아예 이 자리에서 처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형! 기괴한 무공을 쓰는데다 심계가 뛰어나니 한시라도 빨리 제압하는 것이 옳습니다!”
무월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어둠 속에서 진무원의 눈이 빛났다·
‘역시!’
남해객잔의 주인인 함지평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모두 들은 진무원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기에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랐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지금 무해와 무월의 행동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무원이 곽문정에게 전음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 너는 지금 남해객잔으로 가보거라·]
곽문정이 알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무진이 진무원을 향해 걸어왔다·
“어떡할 것인가? 반항할 것인가 아니면 순순히 제압당할 것인가?”
진무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진무원은 북천문의 마지막 문주이다· 개인 입장이라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황철이나 곽문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국 벌주를 택하겠다는 말이군·”
“그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무언가?”
“당신의 사제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순간 무해와 무월의 안색이 싹 변했다·
“저놈의 궤변은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습니다 사형! 아주 요망한 놈입니다!”
무해가 진무원을 향해 추운권을 펼쳤다· 그러자 무월과 다른 사제들이 진무원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쉬쉭!
권영과 검영이 허공에 가득 차며 진무원을 압박해 왔다· 그 모습에 무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대사형인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선 무해 등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말리기도 늦어서 일단 지켜보기만 했다·
비록 한쪽 어깨가 탈구되었지만 무해와 무월의 권술은 정묘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다른 사제들까지 합세하니 그 위용이 엄청났다·
쉬악!
죽문검이 허공을 가르고 그 사이를 무해와 무월의 추운권이 파고들었다· 물 샐 틈 하나 없는 합공이었다· 그 모습에 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개인의 무위는 조금씩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들의 합공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완벽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러나 진무원은 그들의 합공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적갈색 무복을 펄럭이며 표표히 걸음을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잡을 수도 구속할 수도 없는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특별한 절학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틀이 잡힌 보법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공동파의 일대제자 중 누구도 그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치 바람 같구나·”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에게 감탄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