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3장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3)
곽문정은 목이 메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무해가 죽문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네놈의 헛된 자존심과 오지랖 때문에 이들 부녀는 물론이고 너도 팔병신이 되겠구나!”
설궁과 다른 도사는 그 모습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무해가 죽문검을 힘껏 내려쳤다· 그에 곽문정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터억!
“헉!”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무해의 당혹한 음성이 동시에 곽문정의 귀에 들려왔다· 곽문정이 슬며시 눈을 뜨자 그의 앞을 막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형?”
곽문정의 눈을 크게 떴다· 적갈색 무복을 입은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이 설화를 쥔 왼손으로 뒷짐을 진 채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무해의 죽문검을 막고 있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죽문검을 막고 있음에도 진무원의 손가락은 멀쩡했다· 오히려 당혹한 표정을 지은 것은 무해였다· 설마 자신의 검이 다른 누군가에게 막힐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
맨손으로 날아오는 검날을 잡아채는 고난도의 공부이다· 그러나 그것도 평수 혹은 하수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무해와 같은 고수들에겐 통하지 않는 수법이다·
비록 내공을 주입하지 않았다 해도 절정의 고수라 할 수 있는 무해가 마음먹고 날린 일격이다· 그런 공격을 손가락 두 개로 막아냈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무공 노수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해가 검을 거두며 진무원을 노려봤다·
“누군가? 감히 내가 공동파의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입하는 것인가?”
“이 아이의 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개입할 자격이 된다고 봅니다만·”
진무원이 무해를 오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무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허! 숨어 있는 고수가 있는데도 몰라봤군· 하면 이 아이가 그리 방자할 수 있던 것도 자네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겠군·”
무해는 이 상황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무원은 그에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해명이 아니라 곽문정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이 아이를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하면 이 아이도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마음대로 개입하고 마음대로 물러나겠다? 강호의 모든 일에는 은원이 분명한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한번 맺은 은원은 수대가 흘러도 결코 희석되지 않는 법이지·”
무해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에 진무원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의 아픔은 누구보다 크게 느끼면서 타인의 아픔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저런 사람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원한을 잊지 않는다· 오히려 곱씹고 또 곱씹어서 원한을 더욱 크게 키우고 가슴에 담아둔다· 오늘의 사달도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무해가 물었다·
“어느 파의 고수신가? 설마 사문을 밝힐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도장에게 말해줄 만큼 대단한 사문은 없으니 대답해 드리기가 그렇군요·”
“허! 이 지경이 되어서도 끝까지 자신을 숨기겠다? 우리 공동파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이렇게 업신여기는 것을 보니·”
“이건 공동파의 문제가 아니라 도장과 우리의 문제입니다·”
“뭣이라?”
“아닙니까?”
진무원이 무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해가 움찔했다·
눈을 아프게 하는 정광이나 신광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살기를 흩뿌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무해는 이상하게 진무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나를 핍박하겠다는 것인가? 이 무해를?”
“핍박이 아닙니다· 자비를 구하는 거지요· 안 되겠습니까?”
“그게 자비를 구하는 자의 모습이던가?”
“그럼 제가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저 아이의 한쪽 팔을 잘라라· 그럼 모든 은원을 잊겠다·”
무해의 시선이 곽문정을 향했다· 그는 아직도 곽문정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수십 년이 흘러도 곽문정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장의 방식대로라면 이 세상에 온전하게 두 팔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네놈이 정녕 나를 능욕하려는 것이냐?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무해가 노성을 토해내며 진무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동파의 절학 중 하나인 소양검(少陽劍)을 펼친 것이다·
쉬악!
파공음과 함께 무해의 죽문검이 진무원의 목젖으로 날아왔다· 순간 진무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살초다· 반드시 진무원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지가 검에 담겨 있었다·
‘도사의 검에 일말의 자비도 없구나·’
진무원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날아오는 검을 향해 쭉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무해가 코웃음을 쳤다·
“흥! 공수납백인이 또 통할 줄 아느냐?”
무해는 오히려 진무원읜 손가락을 자르기 위해 검에 공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검이 더욱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형!”
“저···?”
곽문정과 임진엽이 동시에 경호성을 내뱉었다· 그들의 눈에는 진무원의 손가락이 잘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해의 검과 닿기 직전 진무원의 손가락이 기묘한 변화를 보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검첨을 뚫고 지나가 검신을 훑는가 싶더니 중간을 살짝 짚은 것이다·
무해가 그런 진무원을 비웃었다·
“무슨 수작을····”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쩌적!
진무원의 손가락과 맞닿은 검신에서 갑자기 균열이 나타났다·
“이건···?”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죽문검의 검신이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검편에 무해의 뺨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는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망연한 얼굴로 손잡이만 남은 죽문검을 바라보았다·
“주 죽문검이····”
죽문검은 공동파 일대제자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누구보다 명예욕이 강한 무해에겐 목숨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런 신물이 진무원의 손짓 한번에 부서지다니· 무해는 정신이 붕괴되는 충격을 느꼈다·
무해에겐 단순한 손가락질로 보였겠지만 진무원이 펼친 것은 쇄병지(碎兵指)였다· 대장장이로 보내던 시절에 터득한 그만의 지법이었다·
무해는 죽문검이 한 점의 흠집도 없는 명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결이 똑똑히 보였다·
“사형!”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의 도사 무월이 달려왔다· 무해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손에도 죽문검이 들려 있다·
츄화학!
죽문검에서 검기가 폭출했다· 무해의 죽문검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것이다·
진무원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무월의 검이 진무원의 목 위로 지나갔다· 처음부터 진무원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진무원의 눈빛에 차가운 빛이 일렁였다·
“소년은 오직 자신만 신경 쓰고 부모는 오직 자식에게만 신경 쓰고 장사치는 오직 이득에만 신경 쓰나 도사는 오직 중생의 구제에 신경 쓰는 법· 도사의 손속에 자비가 없으니 진짜는 아닌 모양이구나·”
진무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무해와 무월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어갔다· 진무원의 목소리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놈! 닥치거라!”
무해와 무월이 동시에 노호성을 터뜨리며 진무원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잃은 무해는 추운권(追雲拳)을 무월은 소양검을 펼쳤다· 두 사람의 합공은 매우 정묘해서 평소 꽤 많이 연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쉬쉭!
객잔 안에 권풍과 검풍이 몰아치며 탁자와 의자가 부서져 나갔다· 그 속에서 진무원은 표표히 움직였다·
상대가 밀고 오면 물러나고 상대가 물러나면 그만큼 다가가는 진무원의 모습에 임진엽이 감탄을 터뜨렸다·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구나·”
왼손에 들고 있는 검은 아예 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혀 그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무원의 손가락이 무월의 검을 향했다· 그의 쇄병지에 무해의 검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이미 목도한 무월이었다·
‘놈! 단숨에 손가락과 손모가지를 잘라주마!’
무월은 오히려 쾌재를 부르며 죽문검에 공력을 더욱 주입했다· 그러자 검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쩌엉!
검과 손가락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울렸다· 이어 쩌적 하는 소리가 검신에서 터져 나왔다·
퍼억!
무월의 눈앞에서 검이 산산조각 나며 검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헉!”
무월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있었으니까·
퍼벅!
뒤이어 격타 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크윽!”
비칠비칠 물러나는 무월과 무해의 오른쪽 어깨가 퉁퉁 부어오른 채 축 처져 있다· 진무원에게 각자 일격을 허용해 탈구된 것이다·
그들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다· 진무원에게 어떻게 공격을 당한 것인지 눈으로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이 멈춰 서서 오연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에 검 한 자루가 잡혔다·
“헉!”
진무원 등 뒤로 몰래 접근하던 이의 입에서 새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바로 설궁이었다·
그는 두 사형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몰래 암습하려다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에 걸리고 말았다·
설궁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어린놈이 비겁하기 그지없구나· 너 같은 놈이 명문 공동파의 지존을 꿈꾸다니 공동파의 미래가 실로 암울하구나·”
진무원이 검신을 비틀었다·
우두둑!
“으아악!”
검을 잡은 설궁의 오른손이 함께 뒤틀리며 파열음과 비명성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