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1장 때론 예상치 못한 인연도 있다 (1)
평화란 무엇인가?
싸우지 않아서 평화가 유지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싸울 수 없는 상황이라서 평화가 유지되는가?
태평성대란···
그저 모두가 무기력한 그런 시대가 아닐까?
난주(蘭州)는 예전부터 서역과 중원의 교역 요충지로 유명했다· 중원의 문물이 이곳을 통해 서역으로 전해지고 사막 너머 이역의 신비한 물건들이 이곳에서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물건이 몰리니 돈이 자연스럽게 흘러들고 그 돈을 따라 또 수많은 이가 몰려들면서 난주는 불야성(不夜城)을 이뤘다· 비록 중원의 여타 성도들에 비해 화려함은 뒤처질지 몰라도 맥동하는 생명력 하나만큼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과 상단이 오가고 그들의 주머니를 노린 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목청을 높여 싸우고 또 어떤 이들은 만족스러운 거래에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거리 양쪽에는 수많은 객잔과 기루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유달리 객잔과 기루가 많이 모여 있는 이곳을 사람들은 복주가(復酒街)라 불렀다· 떠난 사람도 술을 마시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곳이란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현월객잔(玄月客棧)은 복주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객잔이다· 다른 객잔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장사가 꽤 잘되는 곳 중의 하나였다· 현월객잔과 불과 십여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인 백룡상단의 정문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째 한가하구나·”
현월객잔의 점소이 마복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어제만 해도 정신없이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혼이 쏙 빠졌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한가했다·
‘뭐 이럴 때도 있어야지·’
손님이 많으면 주인이야 돈을 많이 벌겠지만 일개 점소이에 불과한 마복은 그저 죽어날 뿐이다· 그래도 손님이 없으면 눈치가 보이긴 했다·
끼익!
그때 누군가 현월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당히 먼 길을 걸어왔는지 남자의 머리와 피풍의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복이 반갑게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저희 현월객잔에 잘 오셨습니다·”
“자고 갈 건데 방은 있느냐?”
“물론입지요· 몇 인실로 드릴까요?”
“일인실로 다오· 가급적이면 수욕을 할 수 있는 욕조가 있는 방이면 좋겠구나·”
마복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얼굴 가득 난 수염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커멓게 낀 때가 남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어이쿠야! 까마귀가 형제 하자고 하겠구나· 도대체 물을 몇 번을 퍼 날라야 하는 거야·’
마복의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무언가 번쩍이더니 마복의 손으로 들어왔다· 은빛이 번쩍이는 은자였다·
“오늘 숙박비로 쓰고 남는 것은 가지거라·”
“아이쿠! 손님 이러실 거까지야·”
마복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점소이 일을 하루 종일 해봐야 동전 열 문이나 받을까 말까 한다· 은자 한 냥이면 최소 쌀 두 섬 값이다· 현월객잔의 최고 좋은 방에서 머물며 최고 비싼 음식을 주문해도 최소 서른 문 정도가 남았다· 마복이 사흘을 뼈 빠지게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금액이다·
“최고 좋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요· 복주가와 백룡상단이 한눈에 들어오니 묵으실 만할 겁니다· 흐흐!”
“수욕부터 하고 싶구나·”
“이를 말이겠습니까?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복은 재신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마복을 따라간 곳은 현월객잔의 별채였다· 별채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담 밖으로 백룡상단과 복주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금방 수욕하실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고맙구나·”
“그럼····”
마복이 달려나간 후 남자가 별채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광목으로 칭칭 둘러싼 기다란 막대기와 조그만 보따리가 전부였다·
“휴!”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자 본모습이 드러났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검고 깊은 눈동자와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누가 봐도 호남형인 얼굴의 주인은 바로 진무원이었다·
“열흘 만인가?”
적암산을 떠나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열흘이 걸렸다· 중간에 길을 잃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도착했겠지만 말을 타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충분히 빨리 온 셈이다·
진무원은 태어나서 북천문과 적암산을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본의 아니게 연금 생활을 하다 보니 천하의 지리에 어두웠다· 비록 열흘이나 걸리긴 했지만 이곳 난주를 찾아온 것만 해도 그에게는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무원이 백룡상단의 정문을 바라봤다· 활짝 열린 백룡상단의 정문으로 긴 마차 행렬이 들어가고 있었다·
황철이 일하는 곳이었다· 진무원은 황철이 이곳에서 힘들게 일해 번 돈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백룡상단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마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수욕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리 오세요·”
진무원은 상념에서 깨어나 마복의 목소리가 들려온 별채 뒤쪽으로 향했다· 별채 뒤쪽에는 따로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 큰 나무 욕조가 있었다·
“헤헤! 여기서 씻으시면 됩니다요· 물을 갈고 싶으면 절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다·”
“그럼 저는 가서 미리 식사를 준비하라 일러놓겠습니다·”
마복이 자리를 뜨자 진무원이 옷을 벗고 나무 욕조로 들어갔다· 맑은 물이 가득하던 욕조는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지난 열흘간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듯했다·
진무원이 가슴까지 물에 담근 채 눈을 감았다·
‘황숙·’
석 달 전에 오겠다던 사람이 소식조차 없었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황철에게 무언가 변고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황철은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도 아니고 함부로 잠적할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
항상 황철에게 받기만 했지 그가 하는 일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황철이 백룡상단이라는 곳에서 보표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무리 무공을 익히는 데 정신이 없었다지만 너무나 무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철의 일인데 말이다·
진무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디 살아만 있길·’
살아만 있으면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테니까·
아버지 진관호가 그렇게 비명에 간 후 유일하게 그의 편이 되어준 황철이다· 진무원에겐 아버지 대신이고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수욕을 마친 진무원은 조그만 소도로 수염을 밀기 시작했다·
슥슥!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염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후우!”
마침내 수염을 모두 깎은 진무원이 한숨을 쉬며 턱을 만졌다· 매끄러운 감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진무원은 내친김에 봉두난발인 머리까지 잘라냈다·
밖으로 나온 진무원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곱게 접혀 있는 적갈색 무복이 보였다·
이 역시 황철이 선물해 준 것이다·
‘북천문의 영역은 모두 적갈색입니다· 갈색의 대지에 적의 피가 흘러 그렇게 변한 거지요· 그래서 적갈색은 북천문을 상징합니다· 공자님에겐 이 적갈색의 무복이 어울립니다· 누가 뭐래도 공자님은 북천문 그 자체니까요·’
진무원은 이제까지 입고 있던 누더기 대신 황철의 염원이 담긴 적갈색 무복을 입었다· 마치 자로 잰 듯 옷은 진무원의 몸에 딱 맞았다· 황철이 얼마나 세심히 골랐는지 그 마음이 느껴졌다·
진무원은 무복과 함께 있던 끈으로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머리를 대충 동여매고 밖으로 나왔다·
마복이 별채 밖으로 나온 진무원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나이가 무척 많은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젊고 잘생겼기 때문이다·
“어이쿠!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이렇게 헌앙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부는 그만하고 음식이나 내오거라·”
“진심입니다요·”
마복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장된 그 모습이 싫지 않았기에 진무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마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때쯤 나오실 것 같아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앉아 계시면 금방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마복은 자신의 말대로 금방 음식을 내왔다·
돼지볶음에 잉어찜 볶은 죽순까지 꽤나 신경 쓴 듯한 요리가 탁자를 가득 채웠다·
“헤헤! 마지막으로 요건 저희 현월객잔이 자랑하는 소홍주입니다·”
경망스러운 웃음과 함께 마복이 탁자 위에 조그만 항아리를 올려놨다· 밀봉된 마개 사이로 흘러나오는 주향이 보통 향긋한 것이 아니었다·
“맛있겠구나·”
“끝내줍니다· 제가 보증할 테니 맛있게 드십시오·”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밀봉을 풀었다· 그러자 주향이 더욱 강하게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황철이 찾아왔을 때 함께 마신 술이 생각났다· 주향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진무원이 우선 한 모금 맛보았다·
‘똑같다·’
그때 마셨던 그 술이 분명했다·
진무원의 시선이 마복을 향했다·
“혹시 황철이란 이름을 쓰는 무사를 알고 있느냐?”
“황 보표님을 아십니까?”
마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무원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내 숙부 되시는 분이다·”
“그럼 공자님 성함이 진 무 자 원 자 되시겠군요·”
“내 이름을 어찌 아느냐?”
“어이쿠! 어찌 모를까요· 황 보표님은 술에 취하면 항상 공자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실 소중한 분이라면서 어찌나 자랑을 하시던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마복의 말에 의하면 황철은 이곳의 단골이었다· 힘든 상행을 마치고 나면 항상 이곳을 찾아 소홍주를 마시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황 보표님이 자주 앉던 자리도 공자님이 지금 앉은 자리네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마복의 말에 진무원이 탁자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황철이 앉아서 술을 마시던 곳 황철이 세상을 바라보던 곳이다·
백룡상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황철은 술을 마시며 백룡상단을 바라봤을 것이다· 황철은 하루 일과를 끝내고도 백룡상단 지척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황철이 얼마나 백룡상단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황숙·’
그의 귀로 마복의 주절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